나 혼자 만렙 뉴비 491화
491화. 32층, ‘벼락 고원’ (1)
완전히 포위된 상황.
진혁의 시선이 ‘나폴레옹의 대관식’으로 향했다.
약, 10m 정도만 이동하면 손에 쥘 수 있는데 하필이면 이런 골치 아픈 애들이 가로막고 있을 줄이야.
‘마지막 남은 카드가 있긴 하지만, 그건 너무 도박수인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의도된 방향으로 향한다면 다행이나, 아니라면 3:1이 아니라 4:1의 지옥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젠 죽이 되나 밥이 되나 앞으로 가야 할 때다.
천유성까지 실패한 이상 어차피 뒤는 없었으니까.
[아공간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진혁이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저벅.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
호문쿨루스 ‘프레이’가 걸어 나왔다.
“응. 대기하고 있었어.”
프레이가 무미건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언제나 표정 변화가 없던 프레이가 테레사와 엘리스를 보더니 살짝 몸을 움찔거렸다.
“저…… 옷 특이하네.”
드레스가 유독 눈에 밟힌 모양이다.
‘저런 데 관심을 보이는 애가 아닌데?’
진혁이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느꼈다.
왜인지 모르게 마계 이후 프레이가 미묘하게 변했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프레이!”
“응?”
“저 옷 가지고 싶어?”
진혁의 말에 프레이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물건에 대한 소유욕은 애초에 나에게 없어.”
하지만…….
“응. 그런데 저건 왠지 한 번쯤은 입어봤으면 좋겠어.”
“저 앞에 저 녀석들만 막아주면 네가 갖고 싶다는 드레스. 종류별 색깔별로 다 사줄게.”
“……정말이야?”
“탑에서 나가면 당장 백화점부터 가자.”
진혁이 생긋 웃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프레이가 아직까지 순진해서 다행이라고.
만에 하나 이 녀석까지 저 무리에 합류했다면, 나폴레옹의 그림이고 나발이고 간에, 당장 신혼여행 코스부터 짰어야 했을 것이다.
“꼭…… 받아낼 거야. 응. 내 힘으로.”
두 개의 단창이 교차한다.
프레이가 진혁의 앞에 서서 모두를 바라봤다.
[프레이가 고유 성창 ‘불멸의 인형사’를 발동합니다!]
콰콰콰콰콰콰!
지붕을 뚫고…….
눈부신 빛줄기들이 쏟아졌다.
프레이와 똑같은 모습을 한 인형들이 소환됐다.
“방해하지 마. 바보 인형!”
엘리스가 즉각 꼬챙이들을 소환했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짓을 하다니……! 제발 줄 좀 똑바로 서라고! 그쪽에 붙으면 더 손해인 거 몰라?”
테레사도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프레이는 그런 말들에 넘어가지 않았다.
아직 때가 완전히 묻지 않았기에, 진혁이 무언가를 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던 것이다.
“이 바보가아아!”
엘리스의 비명을 끝으로.탓.
진혁이 앞으로 향해 몸을 날렸다.
[각 계약자에게 주어지는 마력의 공급량이 최소로 제한합니다!]
엘리스의 힘이 한풀 꺾이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프레이 혼자 모두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시간을 살짝 버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고말고.
“앗! 놓쳤어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진혁이 안드리아의 꼬리들을 떨쳐냈다.
“칫!”
“아아……!”
다음은 엘리스와…… 그 다음은 테레사를 넘어섰다.
이제는 방해꾼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진혁이 손을 뻗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획득하였습니다!]
푸른색 상태창이 모든 것의 끝을 알렸다.
⁕ ⁕ ⁕
로젠베르크 가문에서의 휴가가 끝나고 5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가장 큰 건 역시나 테레사의 약혼식.
천유성의 위조 스티커를 은근슬쩍 테레사에게 붙여뒀기에, 한바탕 큰 난리가 났었다.
원래의 인격으로 돌아간 테레사는 얼굴이 홍시처럼 빨갛게 물든 채 입을 닫았고. 천유성 역시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물론, 그 모든 일의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일주일 노예권으로 인해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덕분에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없어진 문제는 2순위로 밀렸지.
‘엘리스랑 안드리아 달래는 게 보통 일이 아니긴 했어.’
격노한 엘리스를 위해 군것질 거리만 무려 3,000만 원을 샀다.
전국에 있는 각종 디저트란 디저트는 죄다 사다 바쳤으니, 죽기 전까지 단 것이라면 쳐다도 보기 싫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안드리아 역시 5층 정신병동에 놀러간다는 조건을 달고서야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고.
“하아, 나처럼 심성이 고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주고 맞춰주느라 사는 게 너무 힘든 것 같아.”
진혁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지 않니. 돌쇠야?”
당연히 옆에 있는 노예에게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뿌드득…….
천유성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갈았다.
“왜 그래, 그리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왜……그러냐고? 왜 그러냐고!?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콰아앙!
천유성이 마력을 잔뜩 실은 발로 탁자를 걷어찼다.
반으로 박살난 탁자가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미, 미쳤어? 갑자기?”
“네놈 때문에 지난 5일간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상스러운 옷을 입고 홍대와 강남 거리를 활보하게 시키질 않나. 되지도 않는 뷰튜버랑 합방을 시키고 별풍선을 뜯어내질 않나. 검술 학원이랍시고 24시간 동안 부려먹고 돈은 죄다 네놈 주머니에 들어가질 않나.”
천유성의 가슴이 격하게 들썩였다.
“그래, 거기까진 좋다.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다니는 학교까지 찾아 와서 의사 놀이를 하겠다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말.
눈가가 촉촉해지는 게.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음. 조금 심하게 굴리긴 했나?
그래도 이 정도면 가벼운 워밍업이라 생각했는데.
“의사 놀이는 나도 반성하는 중이야. 크흠. 그래도 간호사 누나들이 널 상대로 치료하는 연습 할 수 있다고 좋아했잖아.”
“엉덩이에 주사 놓는 게 좋긴 뭐가 좋아. 이 씹어먹을 놈아!”
한 번에 10만 원씩 받으니까 제법 좋긴 좋던데.
……라고 말했다간 당장 죽일 기세다.
실제로 분을 참지 못한 천유성이 검을 뽑았다.
스릉!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한국 대학교 캠퍼스에 있는 학생들이 죄다 기절할 정도로 묵직한 마력이다.
“어허! 돌쇠야. 아직 계약 기간 남았어. 지금까지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불명예 전당에 올라가고 싶어? 그 칼 내 목에서 좀 치워. 피 난다. 피난다고.”
“불명예는 개뿔. 그냥 널 죽이고 나도 죽겠다. 그럼 이 모든 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후후후. 그래 전부 상관없을 거야. 어차피 우리는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들이니까.”
“유, 유성아?”
어째 애가 눈빛이 아예 맛이 가버렸는데?
입에서 실실거리는 웃음까지 흘러나오는 게 상황이 많이 위험해 보인다.
이래서 채찍 말고 당근도 좀 줘야 된다는 거구나.
진혁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틀 남았어. 이틀. 그리고. 이제 힘든 거 다 했는데, 앞으로 시켜봐야 얼마나 힘든 걸 시키겠어?”
“……남은 기간은 조용히 넘어가 주겠다는 건가?”
“조용히……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이제 몇 시간 뒤에는 32층으로 가야 되잖아. 거기 공략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이상한 짓을 할 여유가 어디 있겠냐, 이 말이지.”
“…….”
천유성의 칼끝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진혁이 한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보였는지, 광기에 젖은 눈동자 역시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네 입으로 말해라. 최악은 이미 지나갔다는 걸.”
“그러엄. 약속할게. 최악은 이미 지나갔어.”
하지만, 극악과 지옥과 헬파티는 아직 남아 있을 거다.
“쳇. 그럼, 32층은 어떻게 할 거냐? 듣자하니 ‘이글아이(Eagle eye)’들도 고생이라던데.”
플레이어들이 올라갈 수 있는 층계가 30층을 넘어섬에 따라 몇몇 특수한 직업들이 생겨났다.
극도로 위험한 지역과 극악의 난이도에 맞서 좀 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업무 부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이글아이는 오롯이 ‘정보 수집’에 특화된 직군이었다.
무장은 최소화한 채 기동력과 생존력에 특화된 플레이어들이 새로운 층계나 미궁 유적 등을 탐사하는 이들.
그런 전문가들이 고전 중이라면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뜻이리라.
‘뭐, 그야 그렇겠지. 거긴 들어가는 순간부터 생존이 위험한 곳이니까.’
진혁이 32층의 면면을 떠올렸다.
최악의 기상과 험준한 지형.
그리고 그곳에서만 거주하는 독특한 몬스터들까지.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으로 30층대 난이도를 체험하게 해줄 수 있는 지점이다.
동시에, 각종 영웅들과 신격들이 활동하는 영역이기도 했고.
“이글아이들 말만 믿고 너무 겁먹지 말고 우리끼리 부딪쳐보자. 그게 제일 속편하잖아?”
어차피 공략법은 정해져 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손에 넣은 이상, 그보다 훨씬 쉽고 편한 지름길 또한 준비할 수 있을 터.
엘리스와 테레사가 시차를 두고 접근하기로 한 이상, 모처럼 과거 둘이서 티격태격했던 추억(?)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군. 알겠다. 준비하도록 하지.”
천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32층으로 가는 입구.
이곳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32층 내부에 있는 정보들을 고가에 팔기 위해 모인 ‘이글아이’들과 중간 매매상. 그리고 각종 길드의 랭커들과 뷰튜버들이었다.
“……아예 방법이 없는 건가요?”
짧은 갈색 단발머리를 한 여성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명 뷰튜버들이 모여 만든 길드 ‘프라임 서비스’.
이슈가 되는 거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뜻에서 모인 이들이었다.
인지도가 쌓이면서 어딜 가서도 알아주는 길드가 되긴 했지만, 큰 한 방이 부족한 이때.
탑의 32층을 탐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고야 말았다.
최초 등반!
이 타이틀이 지닌 의미는 남달랐다.
사이버 레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 빠른 정보 전달은 천금과도 같은 가치가 있는 셈이었으니까.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만만히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안 됐지만, 무리입니다. 가는 족족 반병신이 돼서 돌아오는데 이건 답이 없어요.”
“그래도 저희가 한 계약이라는 게 있는데…….”
“그래서 계약금은 돌려준다고 했잖소. 우리도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애꿎은 애들만 상하고 있다니까? 하늘에서 벼락이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데, 한 마디로 답이 없어요. 답이. 카악 퉤!”
엄청난 거금을 쏟아부어 고용한 상위 티어의 이글아이들은 연신 혀를 둘러댔고. 보디가드로 고용한 대형 길드의 랭커들 역시 미확인 지역에 맨몸으로 가는 위험부담은 피하려 했다.
그렇다고 자기들끼리 가자니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상황.
‘절대 포기할 순 없는데…….’
강수아가 갈색 머리카락을 연신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야, 생각보다 도전하려는 사람이 많은가 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저, 저 사람은?”
“강진혁이다!”
“천유성도 있어.”
“오오오! 둘이서 공략을 시작하려나 본데?”
모두의 시선이 한 쪽으로 집중됐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마스터 강진혁과. 검성 천유성.
두 사람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이건 초대형 이슈다.
하물며…….
‘우리가 저기에 합류할 수 있다면?’
꿀꺽!
강수아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흘러 넘어갔다.
그건 그야말로 대박이다.
세상의 모든 관심이 자신들에게 집중될 테니까.
‘듣기에는 되게 자상하고 리더십 있는 마스터라던데…… 레이드를 하는 내내 너무 행복할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그 외의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리, 저쪽으로 합류해요.”
강수아가 함께 온 네 명의 일행들에게 제안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