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585화
585화. 사멸자의 유물 (3)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데….’
적들의 심장부에 파고든 지 벌써 1시간 30분.
매분 매초 광역기를 쏟아붓던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의 대비가 생각보다 탄탄한 데다, 거점을 이용한 방어 역시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킥킥! 왜, 벌써 질려 버린 건가?”
“천천히 즐기자고. 시간이야 넘쳐나니까.”
또옥… 또옥….
게걸스레 침을 흘리는 플레쉬 이터들이 각종 날붙이들을 움켜쥐었다.
지독한 놈들이다.
머릿속에서 공포라는 신경이 날아가버린 놈들이었기에, 아무리 찍어 눌러도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오히려 먹을 입이 줄었다는 것에 신나했으니 더 이상 말해봤자 입만 아프리라.
게다가 게 중에는 단순히 식인에 미친 것만 아닌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놈들도 섞여 있었다.
숫자를 줄여야 한다.
최소한 열 댓명은 죽여야 돌파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들 수 있었다.
진혁이 양 손에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검마천령보가 발동됩니다!]
서걱!
“킥…?”
가장 외곽에서 한 놈의 심장이 사라졌다.
이어진 이격에 또 한 녀석의 목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자도 약자도 아닌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놈들부터.
중간이 무너진다면 약한 놈과 강한 놈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중추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고유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페이즈 2’가 발동됩니다!]
검은 기운이 식인종들의 사이를 휩쓸었다.
검이 지나가는 검로를 따라 피보라가 몰아쳤다.
하지만.
카아앙!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결국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진짜 실력자가 나타났다.
욱씬!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을 타고 스쳐지나갔다.
완벽하게 상쇄시켰음에도 이런 감각이 느껴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모든 플레쉬 이터들이 보유하고 있는 패시브 ‘살점 분해’.
접근전을 펼치는 순간 서로에게 데미지를 입히는 일종의 자폭 스킬이다.
“너넨 아프지도 않냐? 살이 그리 쩍쩍 갈라지는데?”
“기분 좋은… 통증이다! 캬하하! 어디 듬뿍 피를 흘려보자꾸나.”
진짜 걸려도 변태들한테 제대로 걸렸다.
하지만, 가장 성가신 건 플레쉬 이터들이 아니다.
진혁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툭.
탓…!
담벼락 위로 다수의 닌자들이 빈틈을 재고 있다.
날파리처럼 요리조리 날뛰는 닌자들은 하나를 잃을지언정 어떻게든 핵심 전력은 보존했다.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을 펼치면서 천천히 이쪽의 체력을 갉아먹을 속셈이다.
‘무식한 식인종들하고 다르게 철저하게 실리만 챙기고 있어.’
최악의 경우 며칠이 아니라 몇 주 어쩌면 그 이상 따라다닐 수도 있겠지.
대결계가 발동되기 전까진 거머리들을 달고 다닐 수밖에 없으리라.
“그냥 무시하고 나가면 안 되는 것이냐!”
엘리스 역시 짜증이 났는지 고함을 질렀다.
“그랬다간 점점 더 포위망이 촘촘해 질 거야. 아예 떨쳐내든가 아니면 몰살시키고 가야 해.”
카카카캉!
말하는 와중에도 진혁이 날아오는 표창과 암기들을 쳐냈다.
반격을 하려는 찰나에 이미 놈들의 신형은 사라져 있었다.
“천 년이고 기다려라. 반드시 기회는 온다.”
“예.”
닌자들이 다시 한 번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하급 닌자들이 아닌 상급 닌자들이라 보통 눈치가 빠른 게 아니다.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플레쉬 이터들과도 호흡이 잘 맞았고.
더군다나 지금 이 와중에도 녹색 연기의 색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아포칼립스의 전조가 강해집니다.]
10분 사이에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최대한 안전한 루트를 개척하는 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긴 한데….
‘타임 어택이 걸린 상황에서 이 정도로 끈질긴 꼬리가 붙은 건 간만이네.’
진혁이 혀로 입술을 적셨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전조가 발동되기 전까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력 아끼지 말고 내가 얼음 조각으로 표시해둔 놈들 위주로 공격해줘.”
“위험하다더니. 강행 돌파를 하기로 한 것이냐?”
“그래. 아예 대놓고 시간 끌기로 가려고 하니 우리도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수밖에. 최대한 갉아먹는 쪽으로 갈 거야.”
원래 반반짜리 도박을 그리 즐기진 않는다.
하지만.
진흙탕 싸움을 원하다면 제대로 어울려줄 생각이었다.
콰콰콰콰쾅!
콰아아앙!
곧이어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돌파하는 자와 막으려는 자 간의 팽팽한 균형 속, 수많은 은둔자들이 쓰러져갔다.
분명 실력 차이는 누가 보더라도 확연하다.
아무리 플레쉬 이터들과 닌자들이 강하고 수가 많다고 한들, 진혁과 엘리스의 조합을 뛰어넘을 순 없었으니까.
문제는 시간이다.
모래 시계의 알갱이들은 빠르게 떨어졌고. 촉박한 시간 속에서 진혁은 점점 더 무리한 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커다란 허점이 생기고 말았다.
광역기를 난사하는 사이, 엘리스와 진혁의 공간 사이에 파고들 수 있는 틈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그걸 놓칠 닌자들이 아니었다.
“지금이다!”
“한꺼번에 쳐라!”
빠르고. 매섭게.
닌자들 중에서도 가장 정예들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전부 죽더라도 상처 하나만 입힐 수 있으면 남는 장사라는 생각에서다.
각종 인술과 환술들이 동시에 펼쳐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툭!
탓!
그림자와 그림자들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카카카카캉!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과 암기들이 오고갔다.
한 치의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상쇄다.
“우리와 대등한… 움직임이라니.”
“웬 놈들이냐!”
난데없는 방해꾼에 닌자들이 고함을 질렀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생겼으니 화가 날 수밖에.
“늦지 않게 와줬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다행히 완벽한 타이밍에 지원이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군.”
반대쪽 담벼락에서 다수의 검은 암살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음영대 소속 사십 오명. 주군의 명을 받들어 전투에 합류합니다.”
월영과 음영대의 고수들이었다.
***
“쳇! 하루라도 편히 쉴 날이 없군.”
천유성이 혀를 찼다.
조금 전 일어난 심상치 않은 폭발부터 일이 꼬였다는 건 직감했다.
하기야 저 빌어먹을 놈과 엮이고 나서부터 언제 발 뻗고 잔 적이 있겠는가?
이제는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는 게 오히려 불안한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 하지 않는가?
보기만 해도 끔찍한 고문을 받은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고. 한 쪽에서는 사람을 엮어서 만든 거대한 장식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시련의 탑 여러 곳을 겪어왔었으나 이토록 처참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킥! 킥!”
“어서 오거라. 신선한 고깃덩어리들아!”
인두겁을 뒤집어 쓴 소름끼치는 은둔자들이 기다란 낫과 기묘하게 생긴 칼을 휘둘렀다.
카카카캉!
‘추혼검’의 초식이 펼쳐지자 허공에 어지러운 불꽃이 흩어졌다.
단숨에 안으로 파고든 천유성이 가장 앞에 있던 고문술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서걱!
깔끔한 검격과 함께 길고긴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공격은 그리 날카롭지 않아.’
까다로운 궤도나 복잡한 합격진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토록 소름이 돋는 건 상대방이 지닌 광기 때문이었다.
[악명의 격차로 인해 디버프 저주가 걸렸습니다!]
[쇠약과 공포 : 이동속도와 공격속도가 3%씩 하락합니다.]
[신성력과 빛 속성 계열의 능력이 10%만큼 감소합니다.]
고문술사들이 강한 건 지금까지 쌓아온 악행들이 압도적인 덕분.
이 은둔자의 마을 내에서는 놈들의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참혹한 현장을 목도한 이들은 사기가 꺾일 수밖에.
“신이시여. 어떻게 이런… 악행을….”
테레사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절대로 용서 못해요.”
안드리아 역시 송곳니를 드러낸 채 낮게 포효했다.
상식을 넘어선 행동에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우우웅!
신성력과 여우구슬에서 뿜어져나온 마력이 하나로 합쳐졌다.
[특수스킬 대천사의 성가 & 혼령의 의식이 발동됩니다!]
쿠쿠쿠쿠쿠쿠!
불과 빛이 폭발하며 주위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능력치가 줄어들었다고 해도 워낙에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던 이들이 전력을 발휘하는 것이
다.
이어진 것은 천지가 뒤흔들릴 만한 폭풍이었다.
퍼어어엉!
“크아아악!”
“아아악!”
고온의 불과 빛에 휘말린 고문술사들이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렸다.
한 번에 백에 이르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둘의 스킬이 고문술사들의 중심부까지 파고들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고문도구 ‘악마의 갈퀴’가 발동됩니다!]
허공에서 거대한 검은색 갈퀴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불길이 갈퀴 사이로 빨려들어가며 테레사와 안드리아가 있는 곳을 향해 역으로 쏘아졌다.
화르륵!
콰콰콰쾅!
제어되지 않은 불꽃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큭!”
“어떻게….”
당황할 새도 없이 테레사와 안드리아가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자신들의 불꽃에 사라져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면서 재빨리 갈퀴가 소환된 곳을 살폈다.
이 정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내 아이들에게…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 것이냐!”
역시나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뒤를 이었다.
다른 고문술사와는 차원이 다른 피냄새와 시체 썪는 냄새가 뒤섞여 있는 자가 있었다.
회색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비쩍 마른 체형의 여성.
[역귀(疫鬼), ‘카트란’.]
고문술사들을 이끄는 보스이자 그 누구보다 많은 이들을 고문한 희대의 악녀다.
대규모 수술이라도 받은 듯 온 몸이 바느질 자국 투성이었지만, 감히 카트란을 마주하고도 병약해 보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두렵다.
놈에게 산 채로 붙잡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아주 천천히. 극한의 고통을 모두 맛보게 해줄 테니까!”
카트란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은신 아니, 연기를 이용한 근거리 공간이동술에 가깝다.
기척을 감지한 테레사가 신성력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테레사가 Lv29 ‘에덴의 성호’를 발동합니다!]
우우웅!
황금색 십자가가 솟구쳤다.
주위의 모든 해로운 것들을 몰아내는 동시에 접근하는 적의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왼쪽!
측면에서 파고드는 마력을 감지한 테레사가 즉시 방패를 세웠다.
콰아앙!
묵직한 충격이 손끝에서 어깨까지 관통했다.
무지막지한 낫을 휘두른 카트란이 재차 공격을 퍼부었다.
콰앙!
쾅! 쾅! 콰콰쾅!
방패 째로 몸이 박살나버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긴 것은 낫이지만, 뒤에 붙은 거대한 쇳덩이 탓에 한 방 한 방이 공성추에 버금가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몰아치는 공격에도 테레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침착하게 방패로 충격을 분산시키며 기회를 엿봤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마침내 공격과 공격 사이의 틈을 파악한 테레사가 반격을 시작했다.
“일격이 위협적이긴 한데… 너무 느려요.”
방패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테레사가 날카로운 찌르기를 시전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식하게 힘으로만 찍어누르던 카트란의 움직임이 단번에 변했다.
마치, 이런 카운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카운터의 카운터.
카트란이 테레사의 뒤를 잡았다.
“빛을 쫓는 벌레는 으깨버려야 제 맛이지.”
[카트란이 고유능력 ‘고문실체화’를 발동합니다!]
[‘헤드 크레셔’가 나타납니다!]
테레사의 머리에 쇠로 만들어진 고문기구가 나타났다.
째깍! 째깍!
두개골을 으스러뜨리는 헤드 크레셔의 시계가 빠르게 움직였다.
[10, 9, 8….]
“도저히 풀 수가….”
신성력을 쏟아 부어도 머리에 있는 고문기구는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간이 줄어드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