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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614화


614화. 범천(梵天)의 연꽃 (1)

‘크큭…푸하하하…!’

진혁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천군만마를 얻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좌우로 도열해 있는 수많은 신격들과 그를 따르는 병력들을 보니 괜시리 가슴까지 웅장해졌다.

“우릴 죄다 이곳에 불러 모으다니.”

“그것도 천세와 전쟁을 할 목적으로 말이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이런 대접은 처음이다.”

신격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놨다.

각기 다른 신화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찰진대.

그 목적이 45층의 천세 때문일 줄이야.

수천 년간 조심스레 땅따먹기를 해왔던 자신들이 바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기야 이토록 반강제적으로 세력의 존폐를 건 판때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넌… 정말로 대단한 놈이다.”

크로노스가 진심을 가득 담은 얼굴로 혀를 찼다.

제우스를 제거했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평범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위그드라실은 대체 어떻게 하라고…!”

“제가 쌓아올린 기도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됐다고요!”

“티 타임에 대한 보상도 반드시 받을 거다….”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의 목소리가 솟구쳤다.

‘이래서 제국의 패왕은 항상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반동분자들이 이리 반발이 심해서야 어떻게 대업을 이루겠는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충실한 병사들이 왜 필요한지 알 것 같다.

세뇌 교육이 필요한 이유 또한.

“크흠. 다들 귀한 시간 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바쁘신 분들을 모은 건 다름이 아니라 근사한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근사한 제안이라고?”

로키의 눈썹이 갈매기처럼 휘었다.

대체 무슨 놈의 근사한 제안이길래 위그드라실을 통째로 이동시켜 버린 걸까?

만약 어중간한 제안을 하는 거라면 분노를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오딘과 토르는 물론 나머지 신격들도 진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렴 내가 그 정도도 준비를 안 했을까 봐.’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우우웅!

아공간에서 80년 전에나 쓸 법한 낡은 마이크가 나타났다.

[‘괴벨스의 마이크’가 발동됩니다!]

[최고의 선동가의 특전으로 인해 마이크를 사용하는 이의 신뢰도가 500%만큼 상승합니다.]

3개의 거래 불가 아이템 중 마지막 아이템은 바로 히틀러의 최측근인 괴벨스의 마이크였다.

직접 전투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알려진 ‘선전’과 ‘정치’.

대중을 선동시킬 수 있는 능력은 이런 자리에서 엄청난 빛을 발했다.

물론, 상대는 신격.

아무리 아이템이 좋다고 해도 단순히 이 마이크만으로 속일 순 없다.

정신계열 면역치에 관해서는 사기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의 방어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얼간이가 멍청하게 썼을 때 이야기고.’

아이템을 사용하는 이가 누군지에 따라선 완전히 다른 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코인 거래소’가 개방됩니다.]

탑에 있는 수많은 아이템들을 거래할 수 있는 보고의 장이 펼쳐졌다.

고를 거는….

‘마술사의 일곱 가지 도구(B)’

– 70,000코인

‘명가수의 마지막 음반(D)’

– 5,200코인

‘시계명인의 공구세트(C)’

– 12,000코인총 3개다.

빠른 쇼핑이 끝나자마자 진혁이 두 가지 아이템을 하나로 합쳤다.

[‘괴벨스의 마이크’에 ‘명가수의 마지막 음반’이 융합됩니다!]

밝게 빛나는 빛.

판매 금지 아이템에 대한 융합은 일종의 도박이다.

기존에는 해본 적이 없기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소리다.

‘경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루트를 선별할 수 있는 선구안을 갖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거기에 탑을 최초로 등반한 혜택으로 인해 운을 올린 것도 단단히 한몫했다.

진혁이 미세한 마력의 흐름을 조절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마력과 마력의 끈들이 정확히 맞물렸다.

바로 그 순간.

띠링!

[융합에 성공했습니다!]

황금색 알림창이 나타났다.

[성유물 ‘괴벨스의 보급형 라디오’를 획득하셨습니다.]

입수 난이도: S

특수효과: ‘대중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

– 이 라디오를 소유한 이의 말을 들을수록 강한 현혹과 선동을 당하게 됩니다.

좋아.

그래 이 맛이지.

11년 동안 개고생을 했던 보람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여기에 ‘마술사의 일곱 가지 도구(B)’와 ‘시계명인의 공구세트(C)’를 이용해 튜닝을 마치자 라디오의 랭크가 SS로 상승했다.

장사 준비는 모두 끝났고.

이제 신들에게 본격적으로 강매를 할 시간이다.

“제가 드릴 제안은 바로 이것입니다.”

진혁이 아공간에서 툭하고 무언갈 꺼냈다.

쨍끄랑.

“뭐야?”

“응?”

난데없이 쇠붙이를 던지자 신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것도 잠시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저, 저건 설마…?”

틀림없다.

시련의 탑에 존재하는 최상위 아이템.

탑에 단 7개만 존재하는 ‘왕관’이다.

진혁이 왕관을 가지고 있는 거야 널리 알려져 있으니 그리 새로운 소식은 아니었으나….

놀라운 건 지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왕관의 생김새였다.

“저, 왕관은… 뭐지?”

“처음 보는 종류인데?”

일곱 왕관의 생김새와 모습은 각 주신들이 익히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진혁이 꺼낸 왕관은 너무도 낯설었다.

신(新)왕관.

범접할 수 없는 마력과 기운을 볼 때.

의심할 필요 없는 8번째 왕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진혁이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사실… 전 왕관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짧고 굵은 한 마디.

그 말이 미치는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왕관을 만들 수 있다니.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억겁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런 이야기는 단연코 처음 들었다.

“의심스러우신 건 알고 있습니다만 탑에 있는 모든 아이템들과 마찬가지로 왕관 역시 누군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알맞은 제조법과 재료만 있다면 그 누구라도 제작이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50층의 존재들이 천세와 연합해 언약이란 아포칼립스를 발동시킨 겁니다.”

융합이란 사기적인 능력과 주어진 상황을 적절하게 끼워맞춰 새로운 시나리오를 쓴다.

거기에 ‘괴벨스의 보급형 라디오’까지 추가되자 신들마저 이 발언에 혼란스러워했다.

“설마, 우리에게 한다는 제안이라는 것이 왕관의 제작법을… 공유하겠단 건가?”

크로노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전 누구처럼 아이템을 독점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거든요. 좋은 건 다 같이 나눠야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요.”

특히.

“그것이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라면 더욱더 말이죠.”

[마술사의 일곱 가지 도구 – ‘무대 조명’ & ‘조련된 하얀 비둘기’가 발동됩니다.]

진혁의 등 뒤로 은은한 후광이 비췄다.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며 마치, 자비로운 신이 현현한 듯한 장면이 펼쳐졌다.

확실히….

수많은 세월 베일에 싸여 있던 태고의 존재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언약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아포칼립스가 진혁 한 명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왕관을 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뒷받침된다면 모두 이치에 맞았다.

그리고 그 제작법을 공유받을 수 있다면….

모두의 눈동자에 탐욕이 스쳤다.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

“우리도 왕관만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어.”

“위그드라실을 희생시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면 납득할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100년 정도 아침 기도야… 까짓거 좀 하면 되죠.”

여기저기서 감탄과 경외가 흘러나왔다.

차가웠던 분위기는 간데없고 그 자리에 훈훈한 훈풍이 불어왔다.

“여러분들의 신화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함께 했던 게 누구입니까?”

진혁이 대중들을 향해 마이크를 뻗었다.

“강진혁!”

“바로 그대다.”

“맞습니다! 그럼, 악독한 50층과 그를 따르는 천세가 이 세계를 위협할 때 여러분들은 누구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진혁이 재빨리 바닥에 있는 왕관을 쥐고 흔들었다.

쨍그랑 쨍그랑…!

“오오오!”

“고인물 코퍼레이션과 강진혁과 함께할 거다.”

“절대 왕관이 탐나서가 아니라 그대와의 의리를 지키는 게 중요하지.”

“그럼그럼.”

[다수의 신화들이 연합을 구축합니다.]

[특수 이벤트가 발동됩니다!]

[45층의 거대 신화 ‘천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태고의 성유물’ 중 하나를 획득하실 수 있게 됩니다!]

올림포스.

라그나로크.

에덴, 마계.

그리고 아직 합류하지 않은 이집트까지.

다양한 신화들로 이루어진 연합이 천세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진혁이 왕관 아래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이들을 바라봤다.

만족스러운 광경이다.

‘이제야 전략과 전술을 내 맘대로 쓸 수 있겠네.’

넘쳐나는 전력.

어떻게 활용할지는 그 가능성이 무한에 가까웠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신들 사이로 낯선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언제 이 자리에 껴있었는지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만큼 제3자의 개입은 자연스러웠다.

“이거… 우리 쪽 심상세계에 외부 손님들이 잔뜩 몰려왔군요. 쉽게 가려고 한 길이 이리도 복잡해질 줄은 몰랐습니다.”

인자한 얼굴에 여유 넘치는 모습.

상대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다.

“브라흐마….”

천세의 신격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주신이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아하니 다들 우리와 한 판 싸울 생각인가 보군요. 연회 시기도 아닌데 탑에 쟁쟁한 면면들이 이리 한 자리에 모인 걸 보면 말이죠.”

오싹하고.부드러웠던 공기가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수많은 신화들 중 천세가 가장 꼭대기인 45층에 위치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압도적으로 많은 신들과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신화의 연합과 싸우더라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내가 인맥이 좀 넓은 편이라서. 날 건드렸을 때 일이 커질 것쯤은 예상했어야지.”

진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당신이라면 주위 동료들을 전부 길동무로 데려가고도 남을 인물이죠. 어차피 저희도 이번 기회에 번잡스러운 라이벌들을 전부 정리할 생각이긴 했습니다.”

탑은 너무도 오랫동안 고착화되어 왔다.

각자의 층계에 얽매여 그 자리에 만족하는 나태한 삶.

이제는 그 균형을 깨고 더욱 위로 올라갈 때다.

“그럼… 어디 한 번 당신들의 실력을 가늠해 보겠습니다. 주신이라 해서 다 같은 주신이 아니라는 걸 알려드리죠.”

쿠쿠쿠쿠쿠!

몰아치는 금빛 물결.

[브라흐마가 고유능력 ‘범천{梵天}의 연꽃’을 발동합니다!]

***

세계가 격변했다.

모든 게 칠흑으로 물든 공간이 펼쳐졌다.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모두 사라졌고.

심지어 마력의 흐름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쳇!”

진혁이 혀를 찼다.

브라흐마가 성가신 이유는 삼라만상을 재구현할 수 있는 ‘창조’의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의 불꽃’이 발동됩니다!]

화르륵!

불길이 솟구치며 어둠 속에 빛이 피어났다.

“크오오오!”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보인 것은 거대한 새의 아가리였다.환수종 가루다가 진혁을 통째로 삼키려 하고 있었다.

콰앙!

천마군림보로 간신히 몸을 피했다.

조금만 늦었다간 저 무시무시한 이빨에 온몸이 갈가리 찢겼을 거다.

바로 그때.

분홍빛을 머금은 연꽃들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꽃잎이 한꺼번에 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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