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38화
638화. 멸망을 예고하는 자 ‘그로스’ (4)
“행성을 삼키는 뱀이라….”
그로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이명에 걸맞게 벌어진 아가리는 그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과연, 외우주의 신격들에게 버금가는 힘이라 칭할만하다.
하지만.
“지금 상대하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쿠쿠쿠쿠쿠쿠!
“키에에에!”
샤가이의 뿌리가 울부짖으며 보라색 폭풍을 만들어냈다.
일전에 보여준 심연의 섬광보다도 오히려 더 강력하고 소름돋는 기운이 몰려들었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권역 결계의 영역마저 갉아먹으면서 나오는 현상이리라.
끔찍한 혼돈.
그로스의 주위에 물든 보라색 운무를 표현하자면 정확히 그러했다.
진혁이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적을 눈앞에 두고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허나, 완전히 무방비한 모습에서 빈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세하게 흐르는 마력.
아주 천천히….
……별들의 기운과 자신의 마력을 동기화시켰다.
신비로운 빛이 혼돈에 잠겨가던 빛을 서서히 거둬냈다.
[결계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복잡하고 난해하며 짧은 시간 동안 경지에 오르기 힘든 직업. 그렇기에 결계사는 수많은 이들로부터 배척받아왔다.
효율성과 가성비가 너무나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걸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 직업을 선택했고 거기에 후회 따윈 없었다.
가장 하찮은 결계에서부터.
황도십이궁에 이르는 대결계까지.
하나씩 성장해가는 모든 순간들이 너무도 만족스러웠으니까.
[13개의 별자리들이 당신을 굽어살핍니다.]
“간다.”
진혁이 높게 치켜든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그에 맞춰 그로스의 울부짖는 검이 위로 솟구쳐올랐다.
콰콰콰콰콰콰콰!
검격과 검격의 충돌.
뱀과 촉수가 서로를 뚫어내기 위해 사력을 다해 맞부딪쳤다.
온 몸에 존재하는 모든 세포가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만 같은 통증이 뇌수를 불태웠다.
한계를 넘어선 고통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크읍!”
진혁이 비명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최적의 조건.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해둔 수많은 장치들.
그 모든 것들이 압도적인 힘 앞에 전부 무의미하게 되어버렸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나름 재밌는 여흥이었다. 벌레 한 마리를 짓밟을 거라 생각했었거늘. 모처럼 만에 제대로 몸을 풀었구나.”
쿠쿠쿠쿠쿠!
그로스가 검의 궤도를 미묘하게 비틀었다.
“키에에에!”
샤가이의 뿌리에서 수많은 촉수들이 뱀의 목을 조르며 점점 더 진혁을 향해 다가왔다.
아슬아슬했던 힘의 균형은 이미 무너졌고. 이제 머지 않아 저 촉수들이 진혁에게까지 도달할 것이다.
“끝이다.”
그로스가 완벽한 끝을 위해 한층 더 강력한 힘을 해방했다.
촉수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수많은 외눈들이 온 우주를 뒤덮었다.
절망밖에는 보이지 않는 상황 속.
진혁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외눈달린 촉수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굳이 이 정면 대결이 위험한 걸 알고 있음에도 힘 싸움을 고집한 이유. 그것은 바로 저 눈알들을 뜨게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복사조건: 태고의 신 중 하나인 그로스는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한 세계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수많은 행성들을 먼지로 만들어버리며 부유하는 절대자. 그런 그로스의 능력을 복사하기 위해선 그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눈알들에게 잊지 못할 악몽을 선사해주십시오. 정신적 타격의 정도에 따라 그로스가 가지고 있는 고유능력과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마디로 끔찍한 트라우마를 선사해 주라는 소리.
돈가스를 먹으러 가자며 고래를 잡아버리거나. 산타할아버지가 사실은 없었다는 식의 잊지 못할 추억을 각인시켜 주면된다.
……바로 지금!
[‘다중결계’가 발동됩니다!]
[13성급 결계 ‘뱀들이 머무는 몽환의 숲’이 발동됩니다!]
마지막 결계가 펼쳐지자 푸른 숲을 따라 수백 개의 백색 나무들이 자라났고. 나무 줄기들 사이에서 전신이 하얀 비늘로 뒤덮인 백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세계 같지 않은 너무나 신비롭고 이질적인 광경.
그 모든 것들이 수없이 많은 그로스의 눈동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것도 잠시. 뱀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호수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내 씹어먹기 시작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그것도 너무나 귀엽고 앙증맞은 새끼 문어들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귀염둥이 문어들이 뽈뽈거리며 숲을 돌아다니다가 순식간에 뱀들에게 낚아채졌다.
질겅질겅.
촉수들이 뱀의 입속으로 빠르게 빨려들어갔다.
“키에에에!”
“캬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그로스의 눈은 압도적인 격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눈 탓에 그만큼 환술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평소의 그로스 였다면 어지간한 환각이나 환술 따위에 현혹당할 일 따윈 없다.
엘더 갓들이나 다른 태고의 존재들에 해당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태고의 권능’이 방해받고 있는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파고들 틈이 존재한다.
역류하는 보라색 빛.
“무슨…!?”
그로스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상대를 끝장내기 위해 위력을 올린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되는 상황으로 반전되어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샤가이의 뿌리에서 솟구친 촉수들과 눈알들의 빛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반면.
쩌억하고.
행성을 집어삼키는 뱀의 아가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벌어졌다.
이걸로 체크 메이트다.
“너야 말로 끝이야.”
“빌어먹을.”
그로스가 멍하니 다가오는 입천장을 바라봤다.
너무나 거대한 크기에 도망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별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생명체가 그로스를 통째로 삼켰다.
.
***
콰콰콰콰콰!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몰아쳤다.
별자리들의 가호가 없었다면 방금 전 폭풍에 같이 휘말려버렸을 거다.
“허억…. 허억…. 허억.”
진혁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워낙에 모든 걸 바닥까지 퍼부었기에 서있는 것은커녕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몸에서 전달하는 통증에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위험한 단계까지 간 건 아니라는 소리였으니까.
그만큼 방금 전 공격은 13번째 별자리의 힘을 모조리 쏟아부어서 만들어낸 최후이자 최강의 일격이었다.
쩌저적….
쩌적!
[13번째 별자리가 끝을 고합니다.]
계속해서 환상향을 유지시켜주던 결계가 사라졌다.
부서진 파편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털썩!
진혁이 비틀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스터!”
“괜찮아?”
“모기이이이!”
“미요오오!”
고구마와 후라이드 그리고 티본과 정령수들을 비롯한 동료들이 한걸음에 진혁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다들 결계 밖에서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주인이 승리하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그래. 덕분에 어떻게든 이길 수 있었어.”
진혁이 품에 꼭 안긴 소환수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렇게 보니 참 고맙긴 하다.
그렇게 굴리고 갈궈대도 항상 옆에서 함께 해줬으니까. 이번에 돌아가면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실컷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기분 좋은 알림음이 울려퍼졌다.
[능력 복사에 성공했습니다.]
[고유능력 ‘원 아이 문’]
입수난이도: 측정 불가
내용: 행성에 심연의 눈을 만들 수 있으며 정신 공격과 원거리 광선 공격 두 가지를 모두 가능하게 합니다. 압도적인 사거리와 파괴력은 드래곤의 브레스를 웃돌며 마력이 뒷받침된다면 무한히 사용 가능합니다. 단, 태고의 능력을 장시간 사용할 경우 심연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존재합니다.
‘된…건가.’
진혁이 떠오르는 상태창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똑같은 방법으로는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기적일 거다. 그로스가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 알려진다면 이처럼 거대한 권역 결계를 허용할 리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한 마리를 잡은 걸로는 나쁘지 않지.’
지금 스팩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결과를 만들었다.
그 말을 증명하듯.
띠링!
황금색과 보라색 상태창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지금까지와 달리 처음 보는 형태의 장식들로 화려하게 치장된.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최초로 탑을 정복한 자를 위한 다섯 번째 특전이 개방됩니다!]
[기존의 보상 대신 추가 적인 보상에 관한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다음 보상 중에 두 개를 고를 수 있게 됩니다.]
1. ’35레벨업’.
2. ’50층의 자유 출입권’.
3. ‘네크로노미콘에 관한 핵심 단서’
4. ‘보라 등급에 해당하는 성유물 중 하나’ (단, 카탈로그에 있는 1.026개 중에 하나로 제한)
5. SSS급 랜덤 보물 박스
6. 남은 ‘왕관’의 위치 추적 스크롤.
[선택의 제한 시간은 이 상태창을 본 시간으로부터 3시간 이내에 결정하셔야만 합니다. 선택을 하지 못할 경우 보상은 자동으로 취소처리됩니다.]
미친.
글자를 읽던 진혁이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 했다.
워낙에 궤를 달리하는 존재를 사냥했기에 보상도 심상치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으나, 이건 상상을 초월해도 너무나 초월해 있었다.
하나같이 너무나 중요하고 귀한 것들이라 뭘 선택할지 감이 안 올 정도.
‘그나마 다행인 건 하나만 고르는 게 아니라는 점이네.’
무려 2개.
가장 비싸고 화려한 뷔페에서 두 접시를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샤가이의 뿌리 대검’을 획득하셨습니다.]
[최상급 마정석 104개를 획득하셨습니다.]
[태고의 정수 14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대형 촉수….]
그 외에도 그로스를 처리하면서 얻은 굵직한 보상들이 이어졌다.
목록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힘들 만큼 수십 개의 아이템들이 바닥을 가득 채웠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목숨을 건 보람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을 오래 누릴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마스터!”
저 멀리서 다가오는 새로운 마력에 티본이 목소리를 높였다.
콰콰콰콰콰콰콰!
넓게 진형을 펼친 언데드 전사들과 데스나이트들이 분전하고 있긴 했으나, 심상치 않은 마력을 지닌 존재들이 이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굳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언노운이 보낸 아포칼립스의 사도들이다.
“달그락! 내 아이들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싸울 거라면 모두가 다시 한 번 뭉쳐서 맞서야….”
티본이 흑검을 뽑으며 당장이라도 달려갈 자세를 취했다.
조금 전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서 그런지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기회에 잔뜩 목말라 있는 듯 보였다.
“모기이이!”
“미요미요!”
“대왕 문어는 모르지만, 나머지 들이야. 우리 정령수 오총사가 혼내줄 수 있어!”
“그럼그럼!”
고구마와 후라이드 그리고 정령수들 역시 의지를 불태우며 적들이 오는 방향을 노려봤다.
이야. 이리 혈기왕성한 걸 보니 확실히 든든하긴 한데….
“일단은 다시 돌아가야 해.”
진혁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이 컨디션으로 적들과 싸우는 건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 당장은 모두가 있는 성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 3시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를 내려야만 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