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60화
660화.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 (1)
아자토스의 궁전에는 기상천외한 것들이 가득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이고 위험한 걸 말하라면 단연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을 꼽을 수 있다.
터무니없는 힘을 지닌 아자토스를 잠들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수면제. 동시에 태고의 존재들에게 막강한 마력을 공급하는 원료.
그것이 묘목이 가지고 있는 힘이었다.
하지만….
이 묘목이 진짜로 위험한 이유는 묘목 주위가 급속도로 오염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땅이나 자연을 파괴하는 것만이 아닌 사람이나 동물 혹은….
‘상위 신수나 신격들까지 타락시킬 수 있다는 점이지.’
진혁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이들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 협곡은 머지 않아 묘목의 영향권 안에 놓이게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정신 계열 능력에 대한 저항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뛰어나지 않는 이상 버텨내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재밌네.”
분명 위험한 상황인 건 맞다. 그러나 동시에 쉽게 구경할 수 없는 묘목을 확보할 기회이기도 했다.
“항상 현명하고 자비로웠던 우리 왕을 원래대로 돌려줘. 부탁할게.”
“이제는 믿고 의지할 존재가 없어. 당신을 제외하곤.”
“맞아맞아.”
정령수들이 진혁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였다. 기존의 정령특전대와는 미묘하게 다른 외형을 지닌 꼬물이들이 칭얼거리는 게 꽤나 귀엽게 느껴졌다.
“알겠어. 일단 나도 우리 쪽 애들을 데리고 올 테니, 밤 이슬이라도 좀 피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 나는 괜찮은데, 정령수들과 여자애들이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돼서.”
진혁이 측은한 눈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을 바라봤다.
거기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엘리스와 베헤모스가 있었다.
품 안에 있는 운디네 역시 격하게 몸을 떨고 있었고. 노움도 작은 흙더미로 간신히 비바람만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응!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우리 마을이 있어.”
살라맨더가 흔쾌히 마을로 초대했다.
[정령들과의 친화력이 +10만큼 상승합니다!]
통상 자기 집으로의 초대는 친밀함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방식.
일부러 난로 하나 틀지 않은 채 최대한 조촐하게 잠자리를 만든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불침번 끝나고 잘 땐 풀캠핑 장비를 다 쓰려고 했는데 다행이네. 타이밍이 맞아서.’
진혁이 스스로의 완벽함에 다시 한 번 자화자찬을 늘어놨다.
***
잠시 뒤, 잠에서 깬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일행들이 정령수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도착했다.
쉽사리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정령.
그런 희귀한 자연의 존재들이 수백, 수천씩 모여 있는 마을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5대 원소의 정령들은 물론, 각종 신수와 환수들이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이런 곳이 있다니….”
페시스가 가장 놀란 듯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2달이란 시간 동안 협곡을 구석구석 탐험했지만, 이처럼 대규모로 정령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은 발견하지 못 했다.
아니, 아예 이런 게 존재할 거라는 짐작 자체도 하지 못 했었다.
‘진짜 뭐하는 분일까.’
진혁을 바라보는 페시스의 동공이 미미하게 떨렸다.
평생을 숨겨진 지역을 탐험하고 최초로 그 끝에 도달하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서 모든 걸 바쳤다.
재능과 노력은 물론 열정까지 갖췄다 자부했건만…. 눈앞에 있는 진혁은 그걸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심지어 진혁은 탐험에 특화된 것이 아닌 전투에 특화된 전투 계열이 아니던가?
‘제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알면 알수록 더 대단한 분이야.’
그리고 그런 위대한 재능의 플레이어가 자신과 함께해 주고 있기에 정령수들의 마을에까지 올 수 있게 되었다.
자연히 고마움과 존경심이 샘솟을 수밖에.
천유성과 엘리스도 흥미롭다는 얼굴로 경계심과 호기심 섞인 정령수들을 바라봤다.
바로 그때.
“우쿠라, 이 멍청한 불도마뱀아! 어째서 인간들을 신성한 우리 마을에 데리고 온 게냐!”
장로쯤 되어 보이는 나이 지긋한 정령수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머리가 반 정도 벗겨진 빛의 정령이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길을 안내하던 통통한 살라맨더가 화들짝 놀라 진혁의 뒤로 몸을 숨겼다.
“때, 때리려고만 하지 말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이 인간은 정령들하고도 친분이 있다고요!”
“뭐?”
당장이라도 지팡이로 뚝배기를 날리려던 장로가 멈칫했다.
우쿠라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잔뜩 부풀렸다.
“봤죠? 제가 멍청한 게 아니라….”
따악!
“끄아아아!”
우쿠라가 머리를 감싸 쥔 채 그 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정령수들과 친한 게 뭐 대수라는 거냐? 이자가 저 정령수들을 노예로 만들어서 필요할 때마다 부려먹고 평소에는 노예처럼 가둬두고 있을지 어떻게 알고? 내가 오래 살아서 아는데, 저놈 관상이 자기 빼고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이용해 먹고 단물을 쭉쭉 뽑아 먹는… 아주 마왕 뺨치는 얼굴을 가졌어.”
장로의 지팡이가 진혁에게 향했다.
흐음.
묘하게 통찰력이 있네.
너무나 진실을 정확하게 찔러서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옆에 있는 모든 이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기에 변명할 기회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냥 공짜로 머물겠다는 게 아니라. 제가 묘목의 저주를 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까요?”
이제 정공법으로 나가는 수밖에.
진혁의 말 한마디에 웅성이던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것도 잠시. 장로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거짓말이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어!”
“그래. 대체 무슨 수로…!”
“직접 정령왕님의 상태도 보지 못 했으면서 무슨 수로 저주를 정화시키겠다는 건데?”
백날 말해도 소용없을 분위기다.
진혁이 말 대신 스킬을 발동시켰다.
‘역병의 꼬리’가 발동되자 보랏빛을 머금은 불길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반대 쪽에서 ‘세라핌’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우우웅!
빛과 어둠이 맞부딪치자 중간에 회색 반응이 일어났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일종의 중화작용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장로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두 눈은 너무 놀라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건 일단 맛보기 삼아 보여드린 겁니다만, 실제 묘목에서 나오는 기운은 훨씬 더 강하고 광범위할 겁니다. 당연히 저 혼자서 정화하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한 가지 아이템을 찾아야만 합니다.”
“빛의 파편 말인가?”
“알고 계셨습니까?”
“정화를 위해서 우리도 몇 달 전부터 찾고 있던 물건이네. 물론, 아직까지 성공한 적은 없었지만.”
빛의 파편.
가장 순수한 빛을 머금고 또 머금은 광석만이 ‘빛의 파편’이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주어졌다.
지금껏 다이아몬드나 운철 등을 비롯해 수많은 보석들로 빛의 파편이 되기 위해 시도해봤지만, 단 한 번도 그 자격을 획득한 아이템은 나오지 않았다.
정령수들도 나름 열심히 찾아봤는데도 실패했다는 건 그릇이 될 만한 보석도 그 그릇에 담을 순수한 빛을 확보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뜻이리라.
“저희가 그걸 찾아드리겠습니다.”
“이 협곡에서 계속해서 살아온 우리도 찾지 못한 걸. 난데없이 나타난 외부인이… 그것도 인간 나부랭이가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영감탱이가 아까부터 계속해서 사람을 무시하네.
아무리 협곡에 처박혀서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온 종족이라곤 하지만, 종족 차별이 DNA 하나하나에까지 박혀 있었다.
친밀도를 올려야 하는 조건만 아니었어도 저 얼마 남지 않은 작고 소중한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버릴 텐데.
진혁이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럼, 내기라도 해볼까요? 앞으로 48시간 안에 빛의 파편을 먼저 찾아내는 쪽에게 어떤 것이든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걸로? 아 쫄리시면 물론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하셔도 되고요.”
“……그 말, 후회할 텐데? 우리도 가능성이 높은 곳 한두 군데 정도는 추려두고 있어.”
“그럼, 내기를 하겠다는 걸로 받아들이죠.”
두 종족 사이에 대결이 성사되려고 할 때.
“잠깐, 그 소원권.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거냐?”
옆에 있던 천유성이 끼어들었다.
이글거리는 두 눈.
이 거머리같은 놈은 새로 무기 하나 얻었다고 자신감이 하늘을 뚫어버린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덤비려고 하는 열기에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으니까.
“하하, 전 소원은 됐고. 이번에야 말로 도움이 되어보겠습니다.”
페시스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원권. 응… 나쁘지 않아.”
“그거 내가 찾아내면 날 자유롭게 해줄 거야?”
프레이와 베헤모스가 다른 의미로 두 눈을 반짝였다.
마지막으로….
“계약자와… 소원권이라고?”
계속해서 시큰둥한 자세로 일관하던 엘리스의 표정이 180도 바뀌었다.
쿠쿠쿠쿠쿠쿠!
무시무시한 광기가 솟구쳤다.
이성을 반쯤 잃어버린 눈동자에선 오롯이 상품에 대한 집념만이 가득 차 있었다.
[‘진조의 재보’가 개방됩니다!]
“어느 쪽에 그 파편인지 나발인지가 묻혀 있단 말이냐?”
산이든 들이든 협곡이든 상관없다.
그 지역 자체를 소멸시켜버린다면 안에 있는 파편이 튀어나올 터이니.
그게 안된다면 이 층계 자체를 뒤집어엎어서라도 반드시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장로가 한 발 늦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자칫잘못하다가는 오랜 터전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는 죽이되든 밥이되든 파편을 확보해야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시작.”
진혁의 웃음소리와 함께 숨겨진 파편 찾기가 시작되었다.
* * *
[‘요들레암 협곡’에 입장하셨습니다.]
게이트가 열리며 다수의 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렵하게 단련된 마력과 몸.
산전수전을 겪어오며 쌓아온 사냥꾼의 기세가 여과없이 뿜어져나왔다.
“별 이상한 곳에 다 왔군.”
“그러게. 30층대 후반 공략으로 정신이 없는데 이런 어중간한 층에 다시 올 줄이야.”
“이해들 해. 실력이 떨어지는 놈들이니 여기서라도 콩고물을 주워먹으려는 거겠지.”
“하기야. 층계 공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이 협곡은 보상이든 퀘스트든 맛대가리 없다고 결론이 난 유적이잖아.”
각종 병장기를 들고 있는 남녀가 한 마디씩 늘어놨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격전지와 달리 30층 대 초반부는 대부분 공략이 끝난 상태. 거주자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다져뒀을뿐더러 몇몇 미궁이나 유적을 제외한다면 크게 경계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목표물을 바로 확보하면 되는 겁니까?”
“놈들 중엔 정체 파악이 안 된 놈들도 있다. 의뢰인의 성질에 등 떠밀려 성급하게 접근할 이유는 없겠지.”
대장격인 남자가 신중하게 타겟의 프로필을 훑었다.
‘잭 이든’.
그는 소규모 용병 부대 ‘스윙뱃’을 이끌며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일들을 처리했었다.
그 중에서는 난공불락의 유적도 있었고 대량학살을 일삼던 S급 플레이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공률이 무려 100%.
빈틈없이 짜여진 작전보다 현장에서 쌓아온 직감과 본능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번에도 당연히 그렇게 목표를 완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해.’
강진혁이라는 이름.
분명 이번에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건만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강한 거부감이 드는 것과 동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시작 전부터 이런 적은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다.
“천하에 이든이 이리 신중할 줄은 몰랐네. 아니면 명성이 너무 과장됐던 거였나?”
“애송이 몇 놈이랑 대학생들 사냥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리 조심스러운 거야. 겁 먹은 것처럼 보이게.”
“정 불안하면 우리한테 맡기든가.”
서정희 쪽에서 따로 붙여준 랭커들이 이죽였다.
“이 자식들이 대장한테….”
“어디서 겁을 먹었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스윙뱃에 소속된 용병들이 으르렁거렸다.
분위기가 격해지려 하자 이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휘권은 나한테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고요하게 가라앉은 살기.
바늘처럼 날카로운 마력이 방출되자 이죽이던 이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쳇!”
“살벌하기는.”
1:1로는 안 된다. 굳이 싸워보지 않아도 몸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이든의 명령대로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서정희가 약속했다.
누구든 최우선 타겟인 강진혁과 천유성을 생포해오는 자에겐 3,000만 달러의 현찰과 1,000만 코인 그리고 원하는 성유물 하나를 지급하겠노라고.
그 정도 현상금이면 팔자를 바꿔도 10번은 더 바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