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62화
662화.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 (3)
시련의 탑 50층.
탑의 최정상부에 위치한 아자토스의 궁전에선 태고의 존재들이 모여 있었다.
쿠쿠쿠쿠쿠!
한 자리에 절대자들이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마주하는 즉시 이성을 잃고 미쳐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느긋하게 서 있는 남자에게선 약간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토록 자랑하던 언노운이 결국 죽었군. 당신이 한 표현을 빌리자면,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최강의 랭커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니알라토텝이 너스레를 떨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한때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였거든.”
만약 티모대령이 100%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결과는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큰 피해를 입혔거나 멤버들 중 몇몇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르지. 누가 뭐래도 게임이었을 당시 탑을 정복했던 기억이 있는 데이터였으니까.
남자가 과거를 곱씹으며 묘한 표정을 자아냈다.
그것도 잠시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언노운이 모두를 처리하는 건 내가 바라던 게 아니야.”
그저 강진혁이라는 존재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한 밑거름이었을 뿐.
진혁은 온전히. 최상의 컨디션으로 정상을 향해서 올라와야 한다.
그래야만.
변명할 여지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테니까.
“난 녀석과의 싸움을 아주 오랫동안 고대해왔어. 치밀하게 준비했고.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렸지.”
무료하고 재미없는 하루하루. 그걸 유일하게 잊게 해줄 수 있는 게 바로 진혁이었다. 너무나 맛있게 잘 익은 과실. 그걸 먹어치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몸 속 가득 쌓여 있는 권태감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으니까.
남자가 니알라토텝을 바라봤다.
“뭐, 하지만 저번 싸움은 내가 오판한 부분이 많고 실패한 것도 사실이니… 이번에는 너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주지. 너희 입장에서 네크로노미콘을 빼앗긴다는 건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할 테니까.”
“의외로군. 강진혁이라는 먹잇감을 빼앗기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지 않았나?”
“맞아. 근데 그 질긴 고인물이 쉽게 죽을 것 같진 않거든.”
“그 말은… 마치 놈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것처럼 느껴진다만.”
니알라토텝의 지팡이에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스르륵….
지면이 검게 물들었다.
남자가 과장되게 놀랐다는 제스처를 하며 양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워. 진정하라고. 당신들과 나하고 싸워봤자 서로에게 손해라는 거 몰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살짝 노파심에 하는 말이야.”“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라. 놈을 비롯해 협곡 자체를 쓸어버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했으니까.”
툭.척….
“흐음.”
“킥킥!”
“…….”
니알라토텝의 뒤로 3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드 가드들이 사라진 이후 새로운 친위대를 소집했다.
강진혁이라는 인간이 이 탑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면….
……이들은 다른 차원에서 정점을 찍고 귀환한 존재들이다.
“호오. 50층에 귀환자들을 데리고 오다니… 서리혼령을 비롯한 고대의 은둔자들이 이 층계에 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벌써 잊은 거야?”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 부분은 우리가 알아서 컨트롤 하지.”
“뭐, 주제넘은 참견이었나보군. 확실히 저들이라면 재밌는 변수를 만들어 줄 수 있겠지.”
남자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벌써 갈 생각인가?”
“누굴 좀 만나기로 했거든. 오래 기다리게 했다간 꽤나 쓴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말이야.”
*
저벅저벅.
니알라토텝과의 만남을 마친 남자가 통로를 따라 걸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두우면서 쓸쓸해 보이는 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남자의 발걸음이 멈춘 곳엔 중절모를 쓴 중년의 신사가 서 있었다.
시련의 탑 상급 관리자 릭 헤네시가.
“귀하신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서 다 보자고 하시고. 역시 이래서 시련의 탑은 재밌는 모양입니다.”
“언노운까지 쓰러진 마당에도 여유가 넘치시는군요. 오른 팔을 잃은 셈인데도 괜찮은 겁니까?”
릭이 중절모를 벗으며 상대를 도발했다.
“흐음. 물론 아쉽긴 하죠. 진짜 강진혁을 만나기 전까진 그 녀석이 제 가장 훌륭한 장난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진짜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는데 가짜가 없어졌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가짜라….”
릭이 피식 웃었다.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가요?”
“…….”
오싹하고.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마저 잊혀질 정도. 차갑게 식은 살기는 지금까지 남자가 보여주던 여유와는 너무도 상반되어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런 말을 하시는 걸 보니 기억이 거의 다 되돌아오신 모양이군요.”
“며칠 전에서야 대부분 떠올랐습니다.”
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지팡이가 허공을 가로로 가로질렀다.
[릭 헤네시가 고유능력 ‘시련의 탑’을 발동합니다!]
쿠쿠쿠쿠쿠!
주위의 구조물들이 자유자재로 변하며 도서관의 형태로 변했다. 그윽한 커피향과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는 장소다.
“하하하. 이것 참 대단하군요. 과연, 대상단의 주인이자 상급 관리자다운 능력이십니다. 아니, 아니지. 이제는 그런 칭호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이명으로 불러드려야 할까요?”
요란하게 박수를 치던 남자가 이내 목소리를 바꿨다.
“시련의 탑의 주인이시여.”
최초의 운영자이자 탑의 창조주 ‘릭 헤네시’.
시스템을 만들고 관장하는, 말 그대로 시련의 탑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존재다.
“탑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건 이 정도로 해두시죠. 당신의 목적 때문에 너무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스스로의 유희를 위해서 기억을 봉인하고 무한히 윤회하는 삶을 사는 주제에…. 이제 와서 강진혁이니 탑의 질서니 하는 꼴이 가당치도 않군요.”
거의 40층대까지 공략 범위에 들어갔기에 릭 역시도 본래의 기억을 대부분 되찾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릭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건 탑의 창조주로서의 역할을 자각했다는 뜻. 이제 더 이상 릭 헤네시는 강진혁만을 편애해 전적으로 도움을 제공하지 못 한다.
딱 한 번의 기연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남자와 릭이 서로를 정면에서 마주봤다.
“서로가 가진 패는 한 장씩.”
“누가 가진 게 더 강력하냐에 따라 탑의 정상에 서 있는 자가 바뀔 겁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교차했다.
***
[‘협곡의 마지막 암석’을 획득하셨습니다!]
빛의 파편을 획득한 진혁은 소원권을 빌미 삼아 빠르게 두 번째 성유물까지 손에 넣었다.
수없이 많은 정령수들로 이루어진 노예군단.
“케엑….”
“켁! 쿨럭… 컥!”
“나 죽어. 아니 제발 죽여 줘. 이제 안식을 찾고 싶어.”
혹사에 혹사를 거듭한 마을의 정령수들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삐이익!
하지만 쉴 틈도 없이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지금 뭣들 합니까? 더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고.”
“라떼는 지금보다 10배는 더 힘들었어도 끙 소리 한 번 안 했는데.”
“여기 정령수들은 좀 정신력이 약한가 봐.”
진혁에게 소속된 정령특전대 정령수들이 같은 종족을 핍박했다.
보고 배운 게 그런 거라고.
아주 착실하게 진혁의 손발이 되어 일을 수행했다.
덕분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일들을 허무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손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진짜 뭐 이리 순조로워. 이대로라면 며칠 안으로 끝나겠는데?”
“어이가 없군.”
“쳇!”
기가 막히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특히나 페시스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것처럼 영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나저나 녀석은 말도 없이 또 어디로 간 거냐?”
천유성이 대뜸 정령수들의 리더라 할 수 있는 운디네에게 물었다.
“으응! 주인은 혼자 뭐 좀 확인하러 갔다 온다는데 머지않아 돌아올 거야.”
운디네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답했다.
⁕
같은 시각.
진혁이 ‘코인 거래소’에서 구매한 망원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파치칙…! 파츠츳!
엄청난 스파크가 숲속을 따라 퍼져나갔다.
백색의 광휘에 감싸여 하얀 불꽃을 뿜어내고 있는 존재.
저 녀석이 빛의 정령왕 ‘라이볼트’다.
하얀 수사슴의 형태를 하고 있는 라이볼트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선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얌전해 보인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그으으으르….”
텅 빈 동공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위험하긴 하겠네.
처음 라이볼트를 관찰한 평가는 딱 그러했다.
빛의 파편을 이용해 정신을 차리게 해주는 것까진 가능하긴 한데.
문제는 라이볼트 주변에 겹겹이 쳐져 있는 ‘빛의 권역’을 돌파하는 방법이다.
그냥 뚫자니 무차별적인 포격이 여러 가지로 까다로울 수 있었고.
멘트라 테이밍이나 교감 같은 능력도 묘목의 효과로 인해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조금 더 안전하고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있을 텐데….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때.
사박.
진혁의 귀에 낯선 기척이 들렸다.
이번에는 정령수들이 아니다.
“플레이어…?”
마력을 다룰 줄 아는, 그것도 기억이 지워진 이후에 만났던 이들 중 가장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실력자들이었다.
예전 대형길드들의 랭커들과 비교해도 오히려 몇 수는 위다.
물론.
‘귀엽네.’
진혁의 입장에서는 이제 막 상층부에 들어온 어설픈 뉴비들을 보는 기분이었지만.
‘이런 외지고 맛대가리 없는 유적에 저런 실력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왔을 리는 없고….’
뭔가 목적성이 확실한 게 분명하다.
그것도 아주 수상쩍고 음흉한 냄새가 물씬 나는.
[‘탐식의 눈’이 발동됩니다!]
진혁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인물들을 향해 스킬을 발동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이름: 잭 이든
레벨: 66
고유성창: 마법 거점구축
고유능력: 네이비 씰
스킬: Lv21 ‘잠입’, Lv20 ‘단독전투’, Lv20 ‘철혈의 의무’, Lv20 ‘원거리 투시’….
복사조건: 소수 정예로 잠입, 암살, 요인 납치 등. 현대전에 특화된 임무를 주로 하며 스스로의 성과 능력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그에게 잊지 못할 악몽을 선사할 수 있으면 그가 가진 고유능력과 스킬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침투를 중시하는 그의 특성상 방어에 특화된 고유성창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기에 지금껏 제대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잭 이든이 고유성창을 사용하게 할 경우 그의 고유성창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거대 길드의 막대한 돈으로만 움직인다는 스윙뱃 놈들이었다.
김희웅과 다크웹에 익숙한 멜레나를 통해 정보를 구석구석 모아둔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 이상한 아줌마가 결국 선을 넘었네.’
화가 난 건 알겠는데.
건드리는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짚었다.
새로 추가된 변수들.
아무래도 라이볼트에게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 같다.
진혁이 모처럼 속 안에 있는 악마를 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