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63화
663화. 빛의 정령왕 ‘라이볼트’ (1)
“잠깐….”
선두에 서 있던 여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예리한 감각에 저 멀리 있는 목표물이 포착되었던 것이다.
“확실하군.”
이든이 진혁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런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니.”
“드디어 찾았구나!”
“크흐흐. 이거 일이 빨리 끝나겠어.”
나머지 랭커들도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을 달싹였다. 저 인간 한 명을 생포해서 데려가기만 한다면 평생을 펑펑 놀고먹어도 남아도는 보상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바로 잡을 겁니까? 지금이라면 한 번에 제압이 가능합니다.”
“아니, 기다려라.”
이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무 손쉽게 일이 마무리되어지는 게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쳇! 뭐가 그리 조심스러운 거야? 그냥 대놓고 걸어가서 잡아도 한 방에 끝나겠구만.”
서정희에게 직접 의뢰를 받은 일성 그룹의 이홍섭이 혀를 찼다.
플레이어 강진혁.
별달리 눈에 띄는 활약을 한 적 없는 흔하디흔한 버러지들 중 하나다. 대체 어째서 VVIP께서 저런 덜떨어진 놈에게 이토록 관심을 갖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반드시 사지 멀쩡히 데리고 오라는 말만 전했을 뿐이니까.
뭐가 됐든.
고고하기 짝이 없는 신흥 귀족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편안하게 죽긴 틀렸다.
하지만. 이든이 저리 신중한 걸 좋아하니 당장은 그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저벅.
이든을 비롯한 11명의 랭커들이 진혁에게 다가갔다.
“어라?”
진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곳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는 건 덤이다.
너무나 순진무구한 얼굴에 약간이나마 긴장하고 있던 이들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에 계셨군요. 강진혁 플레이어님. 계속해서 찾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예. 일전에 신라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이 각성자 협회에까지 들어갔거든요. 아,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이든이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각성자 협회 ‘스카우트 부서 팀장’]
[A급 ‘잭 이든’]
몇 시간 전에 뽑은 듯 명함이 빳빳하다 못해 날이 서 있었다. 물론, 그 명함 안에 담겨진 내용은 훨씬 더 엄청났다.
‘보통이라면 눈이 돌아가겠지.’
평범한 C랭크 이하 플레이어들이 언제 각성자 협회 간부를 만날 일이 있을까?
그것도 ‘스카우트 부서’는 모든 부서들 중에서도 가장 결정권이 강력한 곳인데?
인생역전의 기회가 찾아왔다면서 손발을 덜덜 떨거나 무슨 말을 하든 고개를 끄덕이며 순종하는 게 기본적인 반응이리라.
하지만, 잭 이든을 포함한 스윙뱃의 용병들도. 서정희가 고용한 각 길드의 상위 랭커들도 알지 못했다.
한국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인 한상진이 진혁에 관한 세세한 정보들을 모두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S급이었던 기록과 자료들 역시 완벽하게 소거되거나 조작되어 있는 상태였다.
“무시하기 힘든 소동이긴 했습니다만, 협회에서는 처벌보다 강진혁 플레이어님과 천유성 플레이어님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결정했습니다. 저희와 함께해주신다면 B급 이상의 대우를 해드리고 그에 걸맞은 지원도 약속해드리죠. 뭐, 형식적인 몇 가지 질문과 서류절차가 있긴 하겠습니다만, 그거야 사소한 부분 아니겠습니까?”
“이런 엄청난 곳에서 절 스카우트 하러 이 먼 곳까지 오셨다고요? 세상에나…. 해야죠. 당연히 하겠습니다.”
진혁이 감격에 겨운 듯 울먹였다.
무릎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으려고까지 했다.
역시나.
‘쉽게 되겠군.’
‘과연, 이든 저 남자에게 맡기길 잘했어.’
‘그럼 그렇지.’
‘빨리 끝내고 시원한 맥주나 한잔하러 가자고.’
비릿한 미소들이 연이어 퍼져나갔다.
그런데.
“너무 감사한 제안이긴 한데, 제가 이곳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것만 좀 마무리하고 밖으로 가도 될까요?”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저기, 저 멀리 보이는 사슴을 사냥해야만 하거든요. 정확히는 녀석의 뿔이 필요한데. 타이밍 잡기가 영 쉽지 않네요.”
“녹용이 필요한 거라면 협회에서 얼마든지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어서 나머지 일행분들을 데리고 탑 밖으로 나가시죠.”
이든이 진혁의 팔목을 잡고 서둘러 움직이려 했다.
“쩝, 아쉽네요. 저게 남자한테 참 좋은 건데…. 머리카락도 쑥쑥 자라나고. 당뇨랑 이런저런 병도 치료되고.”
예로부터 정력에 좋다면 뭐든지 먹어치우는 게 인간들이 가진 본성이다.
하물며 탈모에까지 효능이 있다는 건 천외천의 영역.
저 말이 진짜라는 가정하에 노벨상까지 받을 수 있을 만한 발견이었다.
“그 말, 진짜요?”
“거짓말이면 당신….”
“빨리 대답해!”
나머지 일행들이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제, 제가 왜 협회 분들에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진혁이 상급 관리자 중 하나의 인장이 찍혀 있는 퀘스트 창을 공유했다.
‘고대 결계’와 과거 릭의 인장을 위조한 짝퉁이었지만, 신격들이나 관리자도 아닌 일반 플레이어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봐라. 실제로 모두의 눈에 탐욕이 뚝뚝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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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꿀꺽….”
무려 S급에 해당하는 연계 퀘스트. 이걸로 진혁이 어째서 이 협곡에 왔는지도 이해가 됐다.
“확실히 심상치 않아 보이긴 하군.”
파츠츠…! 파치칙….
하얀 스파크가 연이어 퍼져나간다.
정령들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마력을 발산하고 있으니 당연히 심상치 않아 보일 수밖에.
이 요틀레암 협곡이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하고 얻을 건 없다고 알려졌는데. 알고 보니 보석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커 보이는군요. S급 연계 퀘스트라면 훨씬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공략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진혁이 오래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숫사슴이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하고 움직이는지에 대한 세세한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심지어 어떤 마법과 아이템들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상대를 약화시키거나 저지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적혀 있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장. 부수입을 얻는 것도 괜찮지 않수?”
“맞습니다. 이런 눈 먼 보물은 우리가 챙기지 않으면 다른 놈들이 집어삼켜버릴 겁니다.”
무엇보다.
S급 연계 퀘스트의 시작 점이라면 앞으로는 더욱더 엄청난 보상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 블랙 마켓에 퀘스트 자체를 거래하는 것만으로도 의뢰비에 육박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녹용뿐 아니라 저 사슴을 잡아서 나오는 각종 아이템과 부산물까지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저 사슴의 뿔을 확보하는 것까지만 도와드리도록 하죠.”
이든이 결정을 내렸다.
* * *
스윽.
라이볼트가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침입자들을 바라봤다.
이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협곡을 파괴하지 않는 건 모든 정령들을 다스리는 빛의 정령왕으로서 가지고 있던 신념 때문이었다.
“파괴… 지켜… 야 한다. 모든… 것들을.”
아직까지 정령수들을 건드리진 않았지만, 그 외의 종족들은 고려해야 할 대상 자체가 아니다.
[라이볼트가 Lv??? ‘문 라이트’를 발동합니다!]
파치치칙!
지면을 따라 하얀 불빛이 점멸했다.
“온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은 뒤로 가시죠. 혹시라도 다치면 안 됩니다!”
이든이 고함을 질렀다.
끔찍한 고문을 하기 위해서.
진혁은 반드시 사지 멀쩡히 데리고 가야 한다.
그렇기에 가장 안전한 포지션에서 보호받아야만 하리라. 기껏해야 C~D급을 오고가는 플레이어는 저런 괴물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우우웅!
실드가 펼쳐지며 라이볼트의 전격 공격에 맞섰다.
“우와아압!”
육중한 방패를 든 탱커 역시 온갖 종류의 버프를 받으며 최전선에서 버텼다.
콰콰콰콰콰쾅!
투명한 실드와 번개가 격돌하자 무시무시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공략이 말해주는 것대로 정확한 타이밍과 각도 덕에 전멸을 피했다. 실드는 박살 났으나 탱커가 방어하는 덴 성공한 것이다.
“새, 생각보다 더 묵직한데?”
“공략법이 아니었으면 위험했어. 진짜로 위험했다고.”
탱커의 방패에 기다란 상흔이 생겼다.
빗겨냈어도 이 정도라니.
과연, S급 퀘스트는 다르긴 다르다.
진혁이 덩치들의 등 뒤에 껌딱지마냥 붙어서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너무 무서워요!”
“꺄아악!”
“심장이 떨어질 뻔했네.” 등등.
다양한 추임새를 넣으며 재잘거렸다.
욕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지금 당장은 멸종위기종 마냥 보살펴야 한다.
‘의뢰주에 따르면 천유성이라는 놈과 테레사만 조심하면 된다고 했으니…. 이 놈은 제 한 몸 지킬 힘도 없을 거야.’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빠르게 끝내는 수밖에.
이든이 동료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전진해라!”
⁕ ⁕ ⁕
같은 시각.
탑의 상층부 중 하나인 에덴에서는 또 다른 회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것도 장관이군.”
“그러게 이 정도로 다양한 종족이 모이는 건 오랜만이야.”
“……어쩔 수 없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으니까.”
다양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각자 다른 층계에서 모인 주신급 존재들.
이들이 에덴의 성역으로 모인 목적은 단 하나였다.
바로 강진혁이라는 거대한 적에 맞서기 위해서.
이미 수많은 전쟁과 전투에서 쓴맛을 단단히 봤기에 대부분 강진혁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흥. 그깟 인간 하나가 대체 뭐라고.”
“알테라와 아덴 정도를 쓰러뜨렸다고 해서 우리까지 싸잡아서 얕보고 있나 보군.”
접점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고대룡들과 드래곤들은 아직까지 그 심각성을 제대로 느끼고 있지 못 했지만 말이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다들 바쁜 시간을 내서 오신 걸 테니 사소한 인사 따윈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가도록 하죠.”
잠시 자리를 비운 우리엘과 라파엘을 대신해 회의를 이끌게 된 ‘사미엘’이 조용히 단상 위로 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아시다시피 지난번 전쟁 이후 이 성역은 완벽하게 요새화를 완료했습니다. 정면에서 오는 공격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성역의 방어가 완벽하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또 아닙니다.”
탑의 등반자들이 에덴을 공략할 수 있는 루트는 모두 차단해놨다.
그런데 거기엔 한 가지 구멍이 존재한다.
“베리엘….”
비슈누가 중얼거렸다.
“예. 강진혁과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즉시 도우려 할 겁니다. 특히 마계는 에덴으로 오는 다양한 뒷구멍들을 알고 있기에 다양한 변수를 만들어낼 테죠.”
“완벽한 방어를 위해선 베리엘을 먼저 쳐야한다는 건가?”
“예전에도 마계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는 걸로 아는데?”
여기저기서 의구심 섞인 반응이 터져나왔다.
이미 한 번 실패한 작전을 또 다시 쓴다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설픈 거에 넘어갈 고인물 코퍼레이션이 아니기도 했고.
그러자.
“물론, 같은 방식으로 할 생각은 없다.”
기둥 그늘에서 침묵을 유지하던 존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하얀 피부.
어지간한 주신들마저 뛰어넘는 위압감을 뿜어내는 남자는 에덴을 함락시킨 장본인이었다.
고대룡 ‘에드온’.
40층 후반부를 지배하는 포식자가 존재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