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65화
665화. 탑의 귀환자들 (1)
“뭐, 뭐야?”
이홍섭이 갑자기 느껴지는 이변에 기함했다.
덜덜 떨리는 손발.
마라톤을 전력 질주하기로 한 듯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식이 완료되었습니다.]
[숭고한 희생에 ‘요틀레암 협곡의 자연’이 감동합니다.]
10분가량 이어지던 의식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으니까.
쿠쿠쿠쿠쿠쿠!
“커억. 컥.”
“쿨럭.”
“으으으…으아아아.”
함께 하던 동료들이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정화의식이 완성됨에 따라 몸 안에 있는 생기가 모조리 뽑혀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딱 한 명.
기존의 의식과는 약간씩 다른 동작을 하고 있던 진혁을 제외하고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라이볼트에게 접근했네.’
진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라면 여러 가지로 위험부담이 높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텐데, 피냄새를 맡고 온 백상아리들 덕에 일이 수월하게 풀리게 됐다.
그래도 희생 의식은 대상의 마력과 정기만 뽑아갈 뿐,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는다.
신체 나이가 20살 정도 더 먹긴 하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내 목숨을 노리고 온 애들한테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주고… 나도 요즘 너무 착해지긴 했어.’
망각의 샘물로 인해 인류의 기억이 지워진 후. 최대한 조용하게 밑 준비를 해오다보니 심성이 물러진 모양이다.
진혁이 너덜너덜해진 스윙뱃 공격대 사이를 가로질렀다.
“너….”
그나마 가장 강한 이든이 진혁을 올려다봤다.
꼴에 대장이라고.아직까지 의식을 잃지 않은 놈은 이 녀석 하나였다.
“속였느니 뭐했느니 하는 진부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이 바닥이 약육강식이라는 건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다 알고 있던 거냐? 우리가 널 노리고 있다는 것도? 저 수사슴 역시 우릴 미끼로 쓴 거였고?”
“물론이지.”
“정보가… 잘못 됐었군.”
이든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 진혁을 마주했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느꼈던 불안감.
이제야 비로소 그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상대의 경지가 안 보였던 건 상대가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나 높이 있기에 그 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
한없이 약하기만 할 줄 알았던 자가 알고 보니 먹이 사슬 최정점에 위치한 포식자였다. 감히 얼마나 강하고 약은지 가늠이 안 될 만큼.
그러니 다수의 인원이 둘러싸고 압박을 넣었음에도 저토록 능구렁이처럼 여유롭고 능숙하게 상황을 주도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를 상대로 고작 이 멤버로 왔으니….’
당연히 이런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임무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결과가 예견되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런 강자가 어째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어차피 그런 건 지금 와서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든이 수사슴에게 다가가는 진혁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라이볼트에게 도달한 진혁이 빛의 파편을 꺼냈다.
“그으…으오오….”
정화 의식 덕에 일부나마 정신을 되찾은 라이볼트가 원래의 자아를 되찾기 위해 스스로와 싸우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 금방 악몽에서 꺼내줄 테니.”
파치칙! 파츠츠!
하얀 스파크가 사방으로 뿜어져나왔다.
진혁이 안으로 파고들 타이밍을 살폈다.
그냥 맨 몸으로 들어갔다간 저 겁화에 휘말려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고유성창 ‘세라핌’이 발동됩니다!]
눈부신 신성력이 또 다른 빛의 형태로 발현되었다.
아름다운 한 쌍의 날개가 펼쳐지며 황금빛 빛줄기가 라이볼트의 체내 깊숙이 자리잡은 태고의 힘에 개입했다.
……지금이다!
‘신속의 왕관’을 착용한 진혁이 최대한의 가속력을 끌어올렸다.
콰앙!
지면에 깊숙이 파고든 발자국.
진혁의 몸은 이미 라이볼트의 코앞까지 파고든 상태였다.
[‘빛의 파편’이 주입됩니다!]
[라이볼트의 정신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우우우우웅!
빛의 파편이 라이볼트의 심장에 닿았다. 황금빛과 보랏빛 물결이 뒤엉키며 엄청난 폭풍이 일어났다.
마력이 동조와 격돌을 반복함에 따라 예상하기 힘든 파동이 뒤엉켰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그오…으…어어….”
초점을 잃은 라이볼트의 동공이 빠른 속도로 생기를 되찾아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콰아아앙!
측면에서 예상치 못한 마력이 끼어들었다.
푸른화염으로 뒤덮인 빛줄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해 왔다.
세라핌의 가호로 실드가 생성됐지만, 화염과 격돌한 순간 진혁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라이볼트에게 신경 쓰면서 만든 실드만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걸.
판단을 내린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퍼어어엉!
진혁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이글거리며 타들어가는 불꽃.
9서클의 헬파이어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마법이지.
“휘유! 반응 좋고.”
분홍빛 포니테일을 한 여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 뒤에는 흑발의 동양인 남성과 2m에 이르는 서양인도 함께 있었다.
지금까지 함께 놀았던 스윙뱃 랭커들이 갓난 아이들처럼 느껴지는 마력. 끈적끈적하게 녹아있는 살기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진혁이 쓴 입맛을 다셨다.
상대가 누군지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 * *
귀환자.
각기 다른 차원에서 정점을 찍고 돌아온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시련의 탑에는 이런 귀환자들이 서른 명 정도가 있는데, 대부분은 어느 세력에 속하지 않은 채 은둔생활을 이어나갔다.
워낙에 혹독한 곳에서 닳고닳아온 탓에 세상 일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많은 탓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예외가 있는 법.
권력욕과 금전욕 명예욕 혹은… 그저 누군가를 죽이고 베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존재했다.
‘간만에 보네.’
진혁이 마법을 날린 여자를 바라봤다.
‘고통의 마도사 클레망스’.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타인을 고문하고 죽음에 몰아넣는 어둠의 대마도사다. 신성 제국이 압도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던 세계에서 홀로 제국을 점령해버린 악몽.
클레망스는 그녀가 속해 있던 차원에서 걸어다니는 종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로 시작한 학살 마법은 마족을 거쳐 마왕에까지 닿았고. 종국에는 자신을 영웅이라 칭송하던 제국과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이르렀다.
수천만이 넘는 인구의 말살.
실제로 클레망스는 제국에서 더 이상 죽일 생명체가 없어졌기에 다시 이 세계로 귀환했다는 설정이었다.
“킥킥! 이런 식으로 묘목에 감염된 걸 정화시킬 수 있다니. 재밌네. 재밌어.”
“과연, 태고의 존재들이 우리에게 직접 일을 맡길 만하군.”
나머지 두 명도 만만치 않은 놈들이다.
두 개의 사슬 낫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남자와 대조적으로 2m가 넘는 신장을 가진 근육질의 남성.
각기 다른 세계를 정복하고 온 귀환자들이었다.
“보아하니 저 인간에게 당한 것 같은데… 특별히 내가 기회를 주지.”
클레망스가 탁한 빛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빙그르르.
빠르게 회전한 유리병이 이든을 포함한 스윙뱃과 용병들의 앞에 떨어졌다.
“마셔. 그럼, 살아날 수 있을 거야.”
클레망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악마가 건네는 독이 든 성배.
하지만.
죽기 직전의 상태인 이들에게 선택지 따윈 없었다.
“으으으….”
“사, 살 수만 있으면….”
“커윽….”
떨리는 손으로 유리병을 입에 댔다. 검은 액체가 꿀렁이며 입술을 적셨다.
“잠…깐.”
이든이 만류하려 했다.
난데없이 나타난 이들이 단순히 호의를 베풀 리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모든 멤버들이 액체를 마셔버린 뒤였다.
두근…!
꺼져가던 맥박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그것도 잠시 공대원들의 눈이 검은빛으로 물들었다.
“크아아아.”
“크오오오.”
광기에 젖은 광전사들.
태고의 피로 인해 감염된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없었다.
“꺄하하! 저걸 진짜로 마셨네. 멍청이들이.”
클레망스가 두 눈을 반짝이며 박수를 쳤다.
격통에 미쳐버린 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을 가늘게 떨어대는 걸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케이시와 주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광기다.
진혁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협곡에서의 일이 쉽게쉽게 풀린다 했는데, 하여간 지독한 태고의 놈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다.
설마 저 제멋대로인 귀환자들을 포섭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퍼스트 블레이드’가 소환됩니다!]
두 자루의 단검이 부드럽게 손바닥에 감겼다.
“흐응. 우리와 싸우려고?”
“다 된 밥에 재를 빠뜨렸으니 꿀밤 한 대 정도는 때려줘야지.”
“어머나 무서워라. 잰틀맨이 레이디를 때리려 하다니. 이 세계는 정말로 각박하다니까.”
“산 채로 남자들을 갈아버리는 악녀가 젠틀맨을 찾는 걸 보니 토가 다 나오려 하네. 됐고. 죽고 나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그 잘난 마법을 죄다 꺼내야 할 거야.”
파츠츠…!
검의 무덤이 발동되자 보랏빛 칼날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솟구쳤다.
분위기가 한순간에 급변했다.
본격적으로 마력을 해방한 진혁의 기세에 귀환자들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클레망스.”
“알고 있어.”
근육질의 남자가 입을 열자 클레망스가 쯧하고 혀를 찼다.
“나도 당신 같은 남자를 이 자리에서 죽이지 못하는 게 너무나 아쉽지만, 우리 계획은 여기서 총력전을 펼치는 게 아니거든.”
[클레망스가 ‘차원 아공간’을 발동합니다!]
쩌어억!
허공에 거대한 입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라이볼트를 집어삼켰다.
……젠장.
라이볼트를 회수하는 게 주목적이었나.
“누구 마음대로.”
진혁이 즉시 왕관의 힘을 이용해 가속하려 했다.
바로 그때.
콰콰콰콰콰콰!
태고의 피에 감염된 이들이 한꺼번에 진혁에게 달려들었다.
각종 마법과 공격 스킬들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서걱!
진혁이 공간을 통째로 베어버렸다.
아무리 태고의 피에 감염되었다고 한들 이들의 기본 스펙은 어중간한 수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없듯 강화로 올라갈 수 있는 경지는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이바이. 까칠한 오빠.”
클레망스는 애초에 이 녀석들을 이용해 진혁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저 1초라는 시간을 벌기 위한 용도로서 사용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공간이동이 발동되었습니다.]
대규모 공간이동이 이뤄지면서 클레망스와 라이볼트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의 귀환자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숲.
진혁이 마력의 잔향이 남은 곳을 보며 머리를 마구 헝그러트렸다.
완전히 한 방 제대로 먹었다.
그래도.
‘아예 손해만 본 건 아니네.’
[현재 라이볼트가 있는 위치를 추적 중입니다.]
진혁이 손에 쥐고 있는 빛의 파편의 일부를 만지작거렸다. 나머지는 라이볼트의 몸에 남아 있었으니 이쪽으로서도 히든 카드를 하나 쥐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다행히 귀환자들의 정체와 각각의 성격과 특성 등을 알고 있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즐겨하는 전투 스타일과 방식을 파악하고 있으니….
……다음 수를 예측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올라갈 것이다.
“일단은 돌아가야겠어.”
운디네에게 말하고 왔긴 했지만, 그래도 기약 없이 몇 시간이나 자리를 비웠었다.
이제는 멤버들과 합류해 새로운 전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