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68화
668화. 열혈 용사 (1)
선택지는 두 개.
진혁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최초로 탑을 정복한 자로 얻은 독식 특전이 이럴 때는 안 좋네.’
어중간한 게 섞여 있으면 차라리 결정이라도 쉽지.
가장 좋은 것만 던져두고 고르라고 하니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다.
[남은 시간: 0H : 0M : 3S]
짧은 시간 동안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귀환자 ‘메드레이의 부름’을 선택하셨습니다.]
복사야 조건에 따라 가능하긴 했지만, 작정하고 몸을 숨기고 있는 메드레이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계속해서 거처를 옮겨다녔기에 진혁조차도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이건 확실한 타이밍이 올 때까지 보관해두도록 해야겠어.’
인장이 봉인된 양피지를 받아든 진혁이 다시 앞을 바라봤다.
콰콰콰콰콰콰콰!
“갑자기 혼자서 멍때리고 있으면 어쩌자는 것이냐! 바보 계약자!”
엘리스가 붉은 꼬챙이들을 쏟아부으며 진혁의 옆을 지켰다.
날개를 활짝 펼쳐 진혁의 몸을 감싸고 있던 건 덤이었다.
워낙에 찰나 동안 집중하느라 전투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안.”
“쳇! 그런 얼굴로 사과하면 뭐라고 할 수도 없지 않느냐? 그보다 정신 차렸으면 빨리 움직여라. 저 녀석들. 만만치 않으니까.”
쿵! 쿵! 쿵!
흔들리는 지축.
제국의 언데드들이 움직이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이 완전개화(完全開花)에 임박합니다!]
“키에에에에!”
이제는 10m이상 자라난 묘목이 기괴한 괴성을 질렀다.
태고의 마력이 네크로폴리스에 주입되자 클레망스의 고유성창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냈다.
“제국과… 황제를…위하여.”
“인간들은… 모조리 찢어버린다.”
한 때 제국을 수호하던 기사들도.
인간들로부터 나온 공포와 두려움을 포식하던 마족들도.
모두가 시체가 되어 클레망스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병력이 너무 많아. 응.”
이미 고유성창을 개방한 프레이는 자신의 인형들을 이끌고 적들과 맞서고 있었다.
인형놀이에 의해 정교하게 합을 맞춘 분신들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적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태고의 마력만 없었더라도 훨씬 더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과 클레망스의 네크로폴리스 거기에 라이볼트가 시너지를 내버리니 난이도가 몇 배는 상승해버렸다.
퍼퍼퍼퍽!
단창이 허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수십의 언데드들이 좌우로 쓰러졌다.
동시에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병력이 괴성을 지르며 거리를 좁혔다.
“모기이이이이!”
그 한복판에 고구마의 브레스가 작렬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한 줄기 섬광이 가로지르자 수천의 언데드가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렸다.
과연 고대종의 브레스다.
“어머. 부러워라. 나도 저렇게 많은 생명을 한 방에 죽여본 적 없는데.”
클레망스의 두 눈이 반짝였다.
얼굴을 붉히며 온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걸 보니 다시 한 번 역겹다는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그래도 저렇게 여유로운 건 아직도 엄청난 병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가장 강력하고 까다로운 언데드들은 아껴두고 있기도 했고.’
우선은 저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을 제거하고 네크로폴리스를 무너뜨리는 게 관건이다. 그래야만 라이볼트를 해방시키고 저 거대한 군단의 위력을 반감시킬 수 있을 테니까.
“엄호해줘. 엘리스.”
“저 안으로 파고들려고?”
“소모전만 해서는 끝이 없어. 우리 쪽에서 여유가 있을 때 승부를 봐야 해.”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엘리스가 꼬챙이를 더욱더 잘게 쪼갰다.
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붉은 비가 소나기로 변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쾅!
무지막지한 폭격에 서서히 길이 열렸다.
[엘리스가 ‘블러드 필드’를 발동합니다!]
[묘목의 위력이 30%만큼 감소합니다!]
태고의 힘마저 감소시켜 버리는 순혈의 권능. 탑의 절대자 중 하나가 전력을 발휘하자 시체들의 피로 얼룩진 붉은 길이 만들어졌다.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다.
‘지금…!’
‘신속의 왕관’을 쓴 진혁의 몸이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콰앙!
도약한 자리에 발자국이 깊숙이 남은 뒤에야 소리가 울려퍼졌다.
[천마신검 ‘마천대군’이 발동됩니다!]
검게 폭주하는 강기가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썰어버렸다. 숫자 따위는 무색하게 만드는 압도적 위용이다.
“헤에. 바로 이쪽의 심장을 노리시겠다? 너무 나를 물로 보네.”
클레망스가 고속으로 돌진하는 진혁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방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직접 상대한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태고의 존재들로부터 강진혁이란 인간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선 충분히 들었다.
전성기에 도달한 엘리스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다만.
자신 역시 한 세계를 정복한 자.
그건 결코 운이나 노력으로 되는 영역이 아니다.
선택받은 천재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잠재력을 개화했을 때야만 비로소 정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태고의 존재들로부터 받은 히든 카드까지 있으니….
승산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나보고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을 겪게 해준다고 했지?”
그것참 흥분되는 달콤한 속삭임이다.
너무나 기대돼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나도 그 보답으로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줄게.”
상대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면 굳이 쥐고 있는 카드를 아낄 필요는 없을 터.
[요정의 세레나데 ‘아쿠아 블레이드’가 발동됩니다!]
샘물 가운데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나며 거대한 물방울이 나타났다.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물방울이 점점 더 속도를 높이더니 이내 얇은 검의 형태로 변했다.
다이아몬드마저 잘라버리는 절삭력.
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검격이 진혁을 향해 쏟아졌다.
동시에.
툭!
탓!
언데드 몬스터 사이에서 숨어 있던 백색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제국의 검’.
전원이 고위 마족들이나 이세계 신격들을 베어버린 적 있는 ‘검성’들이다.
수 미터가량 솟구친 남색빛 오러 블레이드가 종횡무진 움직였다.
거기에.
[마왕 ‘타르밀리아스’가 ‘황색 적염포’를 발동합니다!]
[마왕 ‘무루칸’이 ‘적색 화염포’를 발동합니다!]
마왕의 머리에 돋은 6개의 뿔에서 황적색으로 뒤엉킨 화염들이 뿜어졌다.
***
“서둘러야 한다.”
천유성과 베헤모스 잭 이든 그리고 후라이드와 말랑흑두루미 외에도 다섯 마리의 정령수들이 샘물의 또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계곡을 지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조금 전에 느껴졌던 마력의 파장이 훨씬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쪽이야!”
킁킁거리며 흙냄새를 맡던 노움이 얽히고설킨 협곡 방향을 가리켰다.
귀환자 특유의 혼재된 마력을 감지한 것이다.
“2번째와 6, 7, 11은 위험하고 3, 4, 10번 길은 알람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가장 안전한 건 5번째 길이고요.”
노움이 대략적인 방향을 잡자 페시스가 세밀한 부분을 보완해주었다.
“좋아.”
천유성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모처럼 만에 자신이 진혁보다 뛰어다니는 걸 입증할 수 있는 기회!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강함이 고인물 코퍼레이션에서 으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려주고야 말겠다.
콰앙!
자리를 박찬 천유성이 단숨에 앞으로 질주했다.
“가, 같이 가!”
“뭐 저리 빨라?”
“미요오오오!”
정령수들이 헐레벌떡 천유성의 뒤를 쫓았다.
“제법이네. 그 악마랑 같이 다녀서 그런가. 인간치고 굉장해.”
베헤모스도 잘 갈무리된 천유성의 마력을 보며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고귀한 이 몸이 조금 도와주지.”
“나도 나도!”
[말랑흑두루미가 ‘기상개변’을 발동합니다!]
[실피드가 ‘바람의 비호’를 발동합니다!]
두 개의 바람이 부드럽게 등을 떠밀었다.
내딛는 걸음이 가벼워지며 가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페시스와 노움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곳에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천유성의 발걸음이 어느 한 지점을 끝으로 멈췄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한다.
“나와라.”
스릉.
뽑힌 검에서 살벌한 강기가 맺혔다.
“호오. 그걸 간파한 건가.”
“킥킥! 제법이네. 한 걸음만 더 들어오면 바로 베어버리려 했는데.”
어둠 속에서 두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왜소한 체구의 검은 머리 동양인 남성. 대조적으로 백색 머리카락을 가진 근육질의 남성이다.
사무라이와 닌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귀환한 암살자 ‘타다요시 겐스케’.
뱀파이어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귀환한 인간 사냥꾼 ‘이안 그레고리’
모두 클레망스와 동급의 힘을 가진 괴물들이다.
두 명은 조금 전까지 무언가를 찾는 데 집중했는지 여기저기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한 놈은 내가 상대하겠다.”
천유성이 검을 비스듬히 숙였다.
처음부터 저 둘이 함께 다니는 걸로 보아 개인전보다 함께 했을 때 시너지를 내는 타입일 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적의 장점을 없애버리는 일이다.
“그럼, 우리야 편하지.”
우두둑!
베헤모스가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후라이드도 날개를 활짝 편 채 불꽃 깃털을 끌어모았다.
[천유성이 ‘전장선택’을 발동합니다!]
[일기토의 효과로 인해 모든 스탯이 20%만큼 상승합니다!]
파츠츠츠….
투명한 장막이 펼쳐졌다.
한 대상과의 1:1 승부를 강제하는 천유성의 특수 스킬.
그런데.
삐비빅!
붉은 상태창과 함께 단절되어가던 세계가 부서졌다.
[일기토의 효과에 제약이 걸립니다.]
“얕은수를 쓰는군. 안 됐지만, 결계나 술식을 파훼하는 게 주특기라서 말이지.”
그레고리가 적십자가가 그려진 장갑을 착용했다.
뱀파이어를 사냥하다 피 맛에 중독되어 뱀파이어와 인간 모두를 포식하게 된 포식자. 반인반조의 그레고리가 중지와 엄지를 튕겼다.
따악!
콰콰콰쾅!
핏방울이 폭발하면서 일대에 자욱한 피 안개가 일어났다.
시야가 안 보인다.
단순히 시야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마력의 기척까지 왜곡시키는 스킬이었다.
철컹! 철컹!
그걸 기점으로 계곡 안 여기저기서 격철이 맞물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촤르르르… 콰콰콰콰콱!
사슬낫과 독침을 비롯한 암기들이 쏟아졌다.
이쪽이 기습할 수 있다는 걸 예측했는지 함정의 숫자가 하나둘이 아니다.
콰앙!
암기를 쳐낸 천유성의 손바닥이 미미하게 떨렸다.
무겁다.
표창 하나 하나에서 말로 안 되는 질량이 느껴졌다.
[겐스케가 ‘어둠으로의 초대’를 발동합니다!]
스르륵….
붉은 핏방울 사이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너처럼 일대일에 강하진 않지만, 깜깜한 곳에서 하는 암습은 꽤나 자신 있는 편이야. 킥킥.”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소리, 냄새, 혹은 온기나 마력까지. 작은 단서라도 있어야 적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건만.
모든 것을 차단시켜 버린 어둠은 모든 기감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우측 후면!
콰앙!
일부러 살짝 보인 빈틈을 노릴 거라 예측한 게 통했다.
공격을 빗겨내면서 거리감을 찾은 천유성이 급격히 거리를 벌렸다.
잃어버렸던 시야가 돌아왔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
거리를 좁힌다면 또다시 감각을 잃은 채 싸워야만 할 것이다.
‘상성이 나쁘군.’
검술은 저 둘에게 최적화된 해법이 아니다.
저런 식으로 어둠과 피를 이용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데 가장 알맞은 방법은….
‘신성력.’
상극의 능력을 가진 이가 필요하리라.
“빌어먹을.”
천유성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머릿속에서 킬킬대는 진혁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럴 때를 위해서 그 아이템을 준 거겠지.
저 두 명의 귀환자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텐데도, 이 사태를 예견이라도 하듯 정확히 필요한 걸 건넸다.
꼭두각시 인형이 된 것 같은 상황이 미치도록 열이 받았지만 어쩔 수 없다.
천유성이 품에서 어떤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사자의 형상을 한 배지였다.
[특수 아이템 ‘열혈용사’가 발동됩니다!]
우우웅!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배지에서 촌스럽고 웅장한 90년대 음악이 재생되었다.
“…….”
천유성이 모든 걸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이것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신념을 잇는 끈’이 저층부에서 동료들을 자유롭게 소환할 수 있는 희귀 아이템이었다면, 열혈 용사는 특수조건을 충족할 경우 상층부로 동료를 소환할 수 있게 하는 아이템이다.
단, 여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하는데. 콘셉트질에 환장한 이세계의 신격은 이 아이템을 사용하려면 그에 맞는 대사와 복장을 갖추길 요구했다.
[아이템 사용자의 옷이 새롭게 커스터마이징 됩니다!]
전대물에 나올 것 같은 푸른색 쫄쫄이 레깅스.
손에 쥔 검은 어느새 광선검으로 변해 있었다.
“뭐… 하는 짓거리지?”
“킥킥킥킥킥킥! 와 이거 정보에선 나름 진중한 성격이라고 했는데, 완전히 개그 캐릭터였잖아? 카하하하!”
그레고리와 겐스케의 말이 심장을 후벼팠다.
같이 온 동료들마저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보였다.
……죽고 싶다.
하지만, 임무에 실패에 진혁에게 얕보이는 것은 죽음보다 더 싫었다.
천유성이 쪽지에 적힌 사용설명서를 보며 다시 한 번 어금니를 깨물었다. 쇳물을 삼키는 듯한 목소리가 1초 뒤에 흘러나왔다.
“…고인물… 코퍼레이션 블루.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용사를 구해줄 동료를 불러오겠다!”
천유성이 하늘을 향해 포즈를 취했다.
[빠라라… 빠라바바밤!]
음악의 템포가 장엄하게 변했다.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
하늘에서 내리꽂힌 별의 섬광.
“고,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피, 피,… 핑크! 부름에 응해 전투에 가세합니다!”
황금빛 신성력과 함께 핑크빛 성녀가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