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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682화


682화. 세 개의 불꽃 ‘요마간토’ (1)

검게 물든 협곡의 하늘.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한 마경 한가운덴 종말의 서막을 고하는 존재가 서 있었다.

쿠쿠쿠쿠쿠쿠!

심해처럼 무거운 마력이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불에 타들어갈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졌으니까.

‘이런 느낌 간만이네.’

진혁이 빙하조형으로 몸을 보호한 채 손가락을 달싹였다.

그로스와 싸운 이후 모처럼 만난 태고의 존재.

불의 권역을 그대로 발현시킬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을 보유한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파츠츠…!

불길이 걷히며 그 안에 있던 붉은 머리카락을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보더라도 눈이 쏠릴 만큼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껍데기는 저런 걸 고른 건가.

본신으로 현현했지만, 인간의 껍데기에 의태를 한 걸 보니 확실히 기존에 알고 있던 태고의 존재들과는 결이 달랐다.

분노로 인해 적아를 가리지 않는 요마간토는 귀환자들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위협. 클레망스를 비롯한 몇몇 귀환자들이 자신들은 적이 아니라며 간곡히 어필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다려보세요. 우리는 당신들한테 의뢰를 받고 지금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란 말입니다.”

“임무를 수행한다고? 인간 한 놈에게 질질 끌려다니다가 가장 중요한 것마저 놓치게 생긴 놈들이 무슨 놈의 임무 타령이란 말이냐!”

“크아아아아!”

겁화에 휩싸인 클레망스의 몸이 산 채로 타들어갔다.

주인 없는 그림자 묘목이 자신의 숙주가 죽어가자 격하게 반항했지만, 식물 수준으로 요마간토의 권능에 맞설 순 없었다.

애초에 숙주를 흡수해서 반쪽짜리로 개화했기에 더더욱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타들어간 재들이 요마간토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불은 소멸과 탄생을 뜻한다.

단순히 없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를 위한 양분으로서 재활용된다는 뜻이다.

[요마간토의 겁화가 +2,050만큼 상승합니다.]

“쓸모없는 그 마력. 날 위해 바치기나 하거라. 하찮은 버러지들아.”

요마간토가 불꽃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아름다운 소녀의 입이 위아래로 찢어지는 광경은 이질적이다 못해 기괴스러웠다.

화르륵!

곧바로 요마간토의 그림자 아래서 불로 만들어진 기다란 뱀들이 튀어나왔다.

“주제도 모르고 우리들의 것을 탐하는 자들이 있다. 가서 죽여라.”

“쉿!”

“쉬이잇!”

혓바닥을 날름거린 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라색 화염이 일어나며 수십 마리의 뱀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2닭과 페시스가 있는 방향이다.

저대로 보내선 안 된다.

“구마야!”

“모기이이!”

진혁의 외침에 고구마가 날개를 활짝 폈다.

파츠츠!

입을 따라 모이는 빛.

고대룡의 브레스가 뱀들이 질주하는 방향에 맞춰 붉은 선을 그었다.

콰콰콰콰콰콰콰!

불과 불이 격돌하며 눈앞의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가뜩이나 수분이 사라져버린 전장에서 작은 불꽃만으로도 평소의 몇 배나 되는 화력을 창출했다.

“되도 않는 방해를….”

요마간토가 짜증 섞인 반응을 토해냈다.

“멀리 있는 애한테 바람피우지 말고. 나한테만 집중해. 그로스랑 똑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진혁이 그 분노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이죽였다.

“그대는… 정말 알면 알수록 놀랍군. 설마 저 심연의 존재들과 싸운 적이 있다니.”

메드레이가 정말로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역시도 태고의 존재들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식과 경험의 범주이지. 결코 전투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작해야 한 인간이….

……시련의 탑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최상위 신격들과 싸웠을 줄이야.

어디 그뿐이랴?

지금 요마간토의 말을 빌리자면 그중에 하나를 소멸시켜버리기까지 했다.

만약 태고의 존재가 직접 말한 게 아니라면 절대로 믿지 못했을 일이었다.

“여러 가지로 운이 좀 따랐거든요. 이번에도 메드레이 님을 만났으니 마찬가지로 운이 따르는 거였으면 좋겠네요.”

“부담이 하늘을 찌르긴 하다만, 그대가 날 믿어준다니 기분이 썩 나쁘진 않군.”

[메드레이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선함의 기준이 12%만큼 충족되었습니다.]

쳇.

아직도 12%밖에 안 되는 건가.

워낙에 대쪽 같은 양반이라 단순히 아부를 하는 것만으로는 기준치를 충족하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도 완벽하게 구워삶아지는 메드레이를 자유자재로 이용해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사용할 수 있는 패가 든든해진 건 사실이었다.

“실례지만, 주도권은 제가 가지고 싸움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메드레이 님은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서 서포트를 부탁드립니다.”

“합을 맞추는 건 오랜만이긴 하네만 너무 걱정 말게. 그 까다로운 얼음 마녀와도 완벽하게 협공을 했으니까.”

“얼음 마녀라면….”

“아마 그대는 모를 거야. 서리혼령이라는 자인데, 그대들이 탑에 오기 훨씬 오래 전부터 있던 거주자거든.”

쿠웅하고.

진혁의 머리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졌다.

서리혼령이라는 이름이 메드레이 입에서 나오다니.

아니, 그것보다, 그 고대의 등반자가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인가?

아공간에 잘 보관해둔 창이 떠오름과 동시에 뜻밖의 정보로 인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 이후 메드레이와 할 이야깃거리가 한 가지 더 늘은 것 같다.

***

팽팽한 둘의 대치 속.

귀환자들 사이에서도 거대한 동요가 일어났다.

클레망스라는 중심축이 사라진 데다, 자신들의 목숨마저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싸울 건가요?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졌을 텐데요.”

테레사가 앞에 있는 성기사를 향해 물었다.

“……아직 시스템이 건 현상금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현상금도 살아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거죠.”

현실을 상기시키는 말에 성기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요.”

태고의 존재가 판을 엎어버린 이상 니알라토텝과 한 계약을 이행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자신들의 뒤통수를 친 놈들에게 깊은 복수심을 갖게 되었지.

그리고 그것은 나머지 귀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흐음. 아쉽게 됐네요. 꼭 승부를 내고 싶었는데.”

백발의 소년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저기 생긴 검상으로 인해 입고 있는 옷이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통증보다는 흥분과 쾌감이 더욱 커 보였다.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으니까 꺼져라.”

천유성이 이마에 난 피를 훔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리끼리 싸워서 손해만 볼 확률이 100%야. 응.”

“흥. 목숨을 건지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기거라.”

프레이와 엘리스도 마력을 거둬들였다.

이제는 새롭게 나타난 더욱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귀환자들이야 요마간토에게 흡수당하지 않으려면 1분1초라도 빨리 몸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진혁이 그 모든 상황을 살피며 허공을 힐끗였다.

이쯤 난리를 쳤으면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바로 그때.

우우웅!

허공에 균열이 일어났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가 찾아온 것이다.

[상급 관리자 ‘릭 헤네시’가 개입합니다.]

“이런, 한창 바쁘신 타이밍에 방해를 해버린 꼴이 되었군요.”

중절모를 쓴 중년의 신사가 반투명한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네놈이 어째서 여기에 나타난 거지?”

요마간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급 관리자들 중에서도 유독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게 릭 헤네시와 벤디비아였기 때문. 특히 릭은 상급관리자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명령에 불복종하며 고집을 부려왔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또 다시 개입하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저도 이런 지옥 같은 곳에 오는 건 취미가 아닙니다만, 사실….”

“내가 불렀어!”

진혁이 정답을 알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재빨리 손을 번쩍 들었다.

“예. 강진혁 플레이어님께서 이번 층계 간섭에 대해 강하게 항의를 표명하셨습니다. 언약이 끝났는데도 본신으로 자유롭게 현현할뿐더러… 어디 보자. 시스템 103조 22항에 -c에 따르면 태고의 존재는 탑 외에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고 말씀하셨더군요. 이런 조항이 있는 건 또 어떻게 아신 건지… 거 참.”

릭이 외눈 안경알을 만지작거리며 기다란 책을 연신 뒤적였다.

상급 관리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시스템에 관한 각종 법률과 조항 등이 적힌 법전이었다.

“……어이가 없구나. 그래서. 상급 관리자 따위가 감히 내게 페널티라도 주겠다는 것이냐?”

“물론, 제 주제에 그럴 만한 힘과 권한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릭이 너스레를 떨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지나치게 과장된 자기비하가 오히려 거슬릴 정도다.

“그러나 제가 보유한 상단의 아이템 하나 정도는 심심한 위로의 선물로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릭이 아공간에서 황금색 깃털로 만들어진 깃팬을 꺼냈다.

사삭….

깃펜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곳은 진혁의 손 위였다.

[‘율법을 쓰는 깃펜’이 발동됩니다!]

내용: 시스템이 정한 규칙의 일정 부분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릭 헤네시가 주는 특별 보상.

남자가 잭 이든에게 장난질을 침으로써 한 번의 변수를 추가했다면, 릭은 요마간토가 움직인 것을 계기로 진혁에게 변수 한 가지를 선사해줄 생각이었다.

거기에.

[고유능력 ‘시스템 조작’이 발동됩니다!]

진혁이 ‘세계의 기억’에서 운영자 전용 능력을 불러왔다.

파츠츠!

두 개의 기연이 만나자 서로 다른 색의 스파크가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새로운 종류의 마력이 새로운 지평선을 열었다.

[현상금 이벤트]

내용: 플레이어 강진혁을….

치지직!

황금색으로 쓰여진 상태창이 버벅이듯 점멸했다. 오래된 TV 속 한 장면을 연출하는 것처럼.

그것도 잠시 진혁이 깃펜을 움직이자 기존에 써 있던 글자들이 사라지며 전혀 다른 문장이 완성되었다.

[현상금 이벤트]

내용: 태고의 신 ‘요마간토’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할 경우 귀환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 한 가지씩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이 퀘스트는 단체 퀘스트로 경쟁이 아닌 협동을 인정합니다. (추가로 고인물 코퍼레이션과 동맹을 맺을 경우 각 귀환자들에게 가해져 있는 금제 중 하나를 풀 수 있게 됩니다.)

“너….”

요마간토가 자신의 몸에 새겨지는 낙인을 보며 어금니를 드러냈다.

이걸로 싸움의 국면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느 유명한 분이 그러더라고.”

진혁의 입 꼬리가 초승달을 그렸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조금 전까지 귀환자들과 목숨을 걸고 싸웠다면, 이제는 더 큰 소망을 위해 하나가 되어 싸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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