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686화
686화. 엔드리스 웨이포트 (1)
순간.
오싹하고.
심장에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이변을 깨달은 건 모든 공격이 요마간토의 전신을 집어삼키기 바로 직전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지금 서 있는 이 땅과 폐를 통해 들이마시는 공기. 그리고 피부로 전해지는 마력까지.
모든 것에서 위화감이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0.1초 전까지 느낀 불길함은 0.1초 이후에는 확신이 되어 머리를 강타했다.
[요마간토가 121번째 귀환자 ‘이츠야’의 능력을 사용합니다.]
[‘구천구검’의 세계에서 이츠야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7개의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흡성혈법’이 발동됩니다!]
조건부 충족.
광범위를 아우르는 결계와는 달리 동방의 ‘주술’들은 복잡한 조건들을 모두 충족할 경우 대법이 발동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로스와 배교자의 황금사과를 통해 불러온 그리스 신격들의 힘이 모조리 요마간토에게 흡수되었다.
파츠츠츠!
태고의 빛이 훨씬 더 진한 보랏빛을 띠었다.
[두 번째 불꽃 ‘태화(泰和)의 빛’이 발동됩니다!]
엄청난 마력의 폭풍우가 빨려들어가며 요마간토의 겁화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졌다.
고열로 인해 시야조차 보이지 않는다.
감각마저 사라지는 영역.
“아무렴 그로스의 능력을 주축으로 반격 할 게 뻔히 보이는데, 그걸 가만히 당해주고만 있겠느냐.”
총공격을 퍼부을 타이밍만을 기다렸다.
모든 것을 투자한 힘을 전부 흡수해버린다면 그걸로 승부가 결정되는 것일 테니까.
콰콰콰콰콰콰콰콰!
붉은 화염이 그대로 진혁을 휘감았다.
화르르륵!
콰콰콰르르륵!
‘빙하조형’과 각종 결계로 만든 방벽들이 증발해버렸다.
“크아아아!”
진혁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세라핌’과 ‘페이즈2’ 상태가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진 못할 것이다.
이미 방어할 수 있는 허용치를 훨씬 더 초과해버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방금 전 일격을 위해 대부분의 마력을 소모해버렸기에, 대응할 수 있는 카드 자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계약자!”
엘리스가 날개를 활짝 편 채 진혁을 끌어안았다.
한 쌍의 날개가 진혁을 완전히 감쌌다.
곧바로 뇌수까지 타버릴 듯한 작열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태고의 빛이 개벽의 계시록을 무너뜨리며 점점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뭐 하는 거야! 이렇다가 둘 다 당해!”
“가…만히 있거라! 계약자는… 내가 지킬 거다.”
엘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이 불길에 그슬리고 있었지만, 절대로 진혁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개벽의 계시록 ‘순혈의 의지’를 발동합니다!]
수많은 핏방울들 중 가장 순수한 최초의 핏방울들이 모였다.
엘리스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방어 스킬 중 하나.
자존심 강하고 고고한 진조는 언제나 다른 이들을 멸시했기에 모든 능력들이 공격에 특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적을 찍어누르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화르르륵!
화염이 피를 불태운다.
그러나, 붉은 눈동자에 서려있는 의지까지 태울 수는 없었다.
설령 이 자리에서 재가 되어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지킨다.
[‘순혈의 의지’가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상황이 달라졌다.
재가 되어 흩어지던 핏방울들에서 영롱한 생기가 일어나며 태고의 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
이렇게 되자 곤란해진 건 오히려 요마간토 쪽이었다.
‘……상상 이상이구나.’
전신에 가해지는 압력이 상정했던 수치를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이미 사전에 준비해둔 여러 술식들이 진조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발동되고 있었으나, 엘리스의 힘은 보이지 않는 족쇄로도 막아설 수 없을 경지였다.
요마간토의 눈썹이 씰룩였다.
이쪽 또한 힘의 여유는 충분히 남아 있다.
단지. 더 이상 무리해서 밀어붙인다면 엘리스가 죽을 위험이 있었다. 설령 이 교착 상태를 유지하더라도 엘리스의 생명력은 빠르게 소진될 게 틀림없었다.
“쳇! 정말 하나 같이 마음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구나.”
요마간토가 마력을 갈무리했다.
불길의 온도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그러나 그건 진혁을 살려주겠다는 뜻이 아닌 지금 당장 엘리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어하는 진혁을 마무리 짓는 거야 닭 모가지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어설픈 방심은 심각한 결과로 이어졌다.
“지금…!”
“젖 먹던 힘까지 다해라. 마지막 기회다!”
“우와아아아!”
콰콰콰콰쾅!
귀환자들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창을 쏟아부었다.
형형색색의 능력들이 요마간토가 있는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신의 성수로 만든 쇠뇌와 저주받은 창을 비롯해 각자의 세계에서 가지고 온 최강의 성유물들 역시 버린다는 각오로 사용했다.
“큭! 날벌레들이….”
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요마간토가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큰 피해를 입은 건 아니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한 방을 준비하고 있던 메드레이가 남아 있는 모든 걸 쥐어짜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실이 엘리스가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파츠츠…!
[레인보우 브릿지 ‘은백색’과 ‘연주홍의’ 색(色)이 덧씌워집니다!]
날개의 색과. 피의 색이 바뀌었다.
쿠콰콰콰콰콰콰!
활짝 펴진 한 쌍의 날개.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핏방울이 만들어졌다.
“무슨…?”
요마간토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동시에.
쿠쿠쿠쿠쿠쿠!
나름대로 팽팽하게 이뤄졌던 균형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채 마력을 재배열하기도 전에 순백의 파도가 범람했다.
공간 자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는 힘.
그 위력은 일시적이지만 보라색을 뛰어넘는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크윽!”
요마간토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적은 단언컨대 처음이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파도는 마력이 뭉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뿐더러 부리고 있는 소환수들과 위성들을 조종하는 것마저 막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마력을 감지하는 기능을 파훼해버린 것이다.
전투에 있어 적이 다음에 어떻게 움직일지 읽어내는 게 필수적인 만큼, 이 기능에 혼란이 온 건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퍼퍼퍽!
콰드득!
전신을 두드리는 핏방울.
불길로 이루어진 옷에 하나둘 상처가 늘어났다.
하나하나는 별게 아니지만, 데미지가 누적되면 위험하다.
‘안 되겠군.’
엘리스의 생포하려다가 자신이 부상을 입는다면 그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으리라.
요마간토의 검에 살기가 실렸다.
니알라토텝이 뭐라고 했든 간에 그 명령을 끝까지 지킬 생각은 없었다.
화르르륵!
검 끝에 모인 보라색 화염이 목표물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감각이 마비되었다고 해도 시야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 터. 그렇다면 압도적인 동체시력으로 엘리스가 다가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아무리 이질적인 색을 덧씌웠다고 한들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면 거리를 좁혀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자존심을 꺾지 않는 아타락시아의 진조는 스스로의 손으로 이 싸움을 매듭지고 싶어 할 테니까.
툭…!
그 말대로 원거리 공격을 퍼붓던 엘리스가 다가왔다.
어리석을 만치 정면으로 고집하면서.
“그래. 그래야 탑의 절대자란 소리를 들을 만하지.”
요마간토가 그대로 검을 찔러넣었다.
일점을 향해 번개처럼 뿜어진 불줄기.
기교는 없지만, 속도와 위력은 태고의 격에 걸맞았다.
검과 검이 마주쳤다.
카각…!
아주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걸 기점으로.
[추혼검무.]
레이피어가 작게 노래를 불렀다.
그 검술은 분명 어설펐다.
원류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고. 완성도도 떨어지는 검.
하지만.
[제5식.]
그 부족함 속에 새겨져 있는 진심만큼은 원류의 이해도를 뛰어넘고 있었다.
진혁이 사용했던 검.
언제나 곁에서 지켜봤기에 흉내 낼 수 있는 검.
[추혼멸천]
“받아라.”
엘리스가 차갑게 읊조렸다.
불길이 한꺼번에 사라지며 요마간토의 육체가 그대로 외부에 노출되었다.
콰콰콰콰콰콰!
레이피어에서 폭풍이 만들어지며 만화의 검을 꿰뚫어버렸다.
“크아아악!”
요마간토의 반신이 그대로 쓸려나갔다.
*
후두둑….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엔 몸의 절반을 잃은 요마간토가 서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치명상이다.
엘리스의 일검이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하아… 하아….”
[‘개벽의 계시록’이 해제됩니다.]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지 않는 게 기적이라고 봐야겠지. 레이피어마저 놓아버릴 만큼 엘리스에게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마침내 태산 같은 적을 해치웠으니까.
그런데.
타닥…타닥.
상처 분위에서 사그라들던 잔불이 묘한 빛을 띠었다.
[세 번째 불꽃 ‘재생의 불씨’가 발동됩니다!]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던 상태창이 점멸했다.
소멸을 자행하던 불길은 어느새 부활을 상징하는 희망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화르륵!
반쯤 날아갔던 몸이 서서히 재생되었다.
불길이 사그락거리며 사라진 부분이 원래의 형을 갖췄다.
“솔직히 말해서 방금 전의 한 방은 꽤나 놀랐다.”
어느새 최상의 컨디션으로 돌아온 요마간토가 팔다리를 움직였다.
처음 본신으로 현현했을 때와 똑같은 마력과 힘을 보유한 채로.
“이럴 수가….”
“저런 걸 무슨 수로 죽이라는 거야?”
“그냥 도망쳐야 했었어.”
“하하하…. 틀렸어. 다 틀렸다고.”
귀환자들의 전의가 눈 녹듯 사라졌다.
정령왕들과 정령수들도 할 말을 잃어버린 듯 굳었다.
모든 걸 내던졌음에도 멀쩡하게 돌아오는 적을 상대로….
……자신들이 대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남은 방법도 혹은 희망도 없었다.
끝장이다.
그런데 모두가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
우우우웅!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
제법 이름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진조가 되진 못한 운명.
그렇기에 소년은 생각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면 주인공이 될 만큼 강한 자를 따르겠노라고.
10년 20년… 30년 그리고 100년.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가주들과 고위 혈족들을 찾아 헤맸건만 소년의 마음에 들 만한 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처음의 목적과 열망마저 퇴색될 무렵, 마침내 소년이 원하고 원하던 이를 찾아냈다.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역대 최강의 가주를.
동경했다.
누구보다 빛나고 아름다웠기에 그녀라면 언젠간 모든 뱀파이어들의 염원이라 할 수 있는 50층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엘리스는 묵묵히 그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언제나 감정 없이 묵묵히 자신의 신념을 이어나가는 아타락시아의 가주는 그 고고한 빛을 잃지 않았다.
철혈(鐵血).
순혈의 진조에게 사사로운 감정 따윈 섞여 있지 않았다.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듯.
그건 하나의 법칙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럴진대.
그런 엘리스가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그리고 진심을 다해 행복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 명의 가주가 아닌 하나의 인격으로서.
미하엘이 레이피어를 스스로의 심장에 갖다댔다.
-소원이 있느냐고 물었었지.
있었다.
한 번 죽고 다시 살아난 몸이지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 하나쯤은 있었다. 그렇기에 함께 하기로 한 것이었고.
비록 그 여정이 너무나 짧게 끝나 그녀의 곁에서 다음 장을 보진 못하게 됐지만….
저 표정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또 증오하고 원망했습니다.”
완성되지 못한 술식의 마지막은 이것으로 채운다.
“그러니… 이제는 행복하십시오.”
푸욱!
심장을 뚫는 파열음과 함께.
[제약이 해소됩니다.]
새로운 술식이 발동되었다.
[‘엔드리스 웨이포트’가 발동됩니다!]
쿠쿠쿠쿠쿠쿠쿠쿠!
하늘까지 닿은 빛.
[‘휴프노스’로부터 이계의 신격이 부름에 응답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던 새로운 세력의 개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