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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697화


697화. 신경전 (1)

스윽.

이반코비치와 키요프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같은 생각이다.

늙고 고여버린 썩은 물을 갈아치우고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음을 증명하자는.

“이야~ 이게 누구야?”

“흐음. 한국에서는 또 당신이 대표인 겁니까? 복사 붙여넣기도 아니고. 지긋지긋하기까지 합니다.”

이죽이는 음성이 차분하게 걸어오고 있는 유천영에게 향했다.

우뚝하고.

일자로 곧게 향하던 유천영의 걸음이 멈췄다.

그 뒤를 따라오던 한국의 나머지 멤버들과 랭커들도 시비를 걸어온 방향을 바라봤다.

“건방진….”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단군과 발해 그리고 싸울아비를 이끄는 마스터들과 랭커들이었다.

대놓고 자신들의 대표인 유천영을 비웃어대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하지만.

도발에 응하는 건 오히려 두 사람이 원하던 바였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하룻강아지들이 짖어대다니.”

쿠쿠쿠쿠쿠!

이반코비치가 마력을 해방하자 암석이 짓누르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크읍!”

“컥! 쿨럭!”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압도적인 격차를 보여주는 듯. 아예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단순한 기세만으로도 이미 절반 이상이 꼬리를 말아버렸다.

“그래도 나름 각 길드의 랭커라는 것들이 고작 이 정도에 벌벌 떨다니.”

“이런 분들이 무슨 자격으로 이벤트에 참여한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하긴, 한국에서나 통하지 세계로 치면 랭킹에도 들지 못하겠지만요.”

이죽임이 한 층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요란스러운 소란에 어느새 구경꾼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머지 않아 기자들까지도 이 사실을 알게 될 게 틀림없었다.

“그만하지.”

유천영이 조용히 경고했다.

무시무시한 압박 속에서도 태연하게 서 있는 모습.

어느새 발에는 푸른 강기까지 맺혀 있었다.

더 이상 선을 넘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재밌군. 다 늙어도 호랑이는 호랑이라 이건가.”

한 때 한국은 G20 중에서도 1,2 위를 다투는 각성자 강국이었다. 탄탄한 대형길드들과 기존 시련의 탑을 플레이하던 고인물들을 토대로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한 세력을 구축했었다.

헌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기반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마치, 사막 속에서 아른거리는 오아시스처럼 말이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기억에 공백이 생긴 것처럼 세계의 역사에 거대한 먹물이 쏟아진 것만 같았다.

어찌 됐든 한국이라는 강국의 위세는 급격히 무너졌고. 이제는 다른 강국의 눈치를 보며 던전의 콩고물이나 주워먹는 3등 국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게 저 영감탱이랑 그 손녀를 포함한 몇몇 놈들 뿐이지.’

이반코비치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려고 할 때였다.

“아직 대회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초반부터 너무 힘 빼지 마시죠. 그 천박함에 말려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한국 대표 사이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럼에도 상위 랭커보다 더한 영향력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신흥 귀족 중 하나인 서정희였다.

그 옆에는 미국 각성자 협회에 소속된 간부도 함께 있었다.

“당신들은….”

“서정희 씨.”

두 명의 랭커가 처음으로 곤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유천영과 달리 서정희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

그녀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건 곧 미국에게 덤비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랭커들이 쩔쩔매는 모습에 미국 각성자 협회의 간부가 한 마디 덧붙였다.

“하하하. 같은 나라지만, 이처럼 다른 대우라니. 역시 시류를 잘 읽어야지만 도태되지 않을 수 있는 법입니다. 여기 서정희 이사님처럼 말이죠.”

“시류를 읽었다는 말씀은 좀 불쾌하네요. 제 조부모님들은 애초에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저 역시 예전부터 미국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고요.”

“흐음. 제가 실언을 했군요. 아무튼 두 분께서도 약한 분들을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십쇼. 나름 세계가 화합하는 장이니까요.”

만류하되 강제하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해 중재하는 척을 할 뿐.

그 노골적인 의도는 이 현장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서정희와 미국 각성자 협회 간부가 사라지자 2차전이 시작되었다.

웅성웅성!

소란이 커지자 자연스레 구경꾼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이제는 수백이 넘는 인파가 모인 곳이다.

“뭐야, 싸움이라도 난 건가?”

“러시아와 유럽과 한국이 한 판 붙을 것 같은데?”

“벌써부터 신경전이라… 흥미진진하네.”

“흥미롭기는. 고릴라랑 개미랑 싸우게 생겼는데, 보나마나 자존심 좀 세우려다가 개쪽이나 당하겠지.”

여론은 일방적이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알려진 업적과 개개인의 스팩도. 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최상위 랭커의 숫자도. 아예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저벅.

그 살얼음 판 위로 새로운 인물이 개입했다.

바로 옆에서 칼부림이 나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

천유성이었다.

⁕⁕⁕

군침이 도는 보상을 손에 넣는 것을 상상하며 기분 좋게 참석한 이벤트.

모처럼 LA공항을 통해 미국 땅에 발을 디딘 것까진 좋았다.

엘리스 덕에 전원이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하면서 온갖 서비스를 다 받았던 것도 완벽했고.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국에 닿자마자 강자들의 기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기강잡기.

그런 뉴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꼴이 꽤나 귀엽고 신선하다.

‘신흥 랭커인가 뭔가 하는 놈들인가.’

천유성과 대치하고 있는 이반코비치를 본 진혁이 피식 웃었다.

과거였다면 이런 반응은 상상도 못했을 테지만, ‘망각의 샘물’을 통해 인류의 기억이 지워진 지금은 사실상 모두의 타겟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엘리스가 양산을 휘저었다.

“멍청한 것들이 지금 감히 누구 앞을 가로 막느냐. 계약자. 전부 쓸어버려도 괜찮겠느냐?”

“아서라. 피범벅 된 걸 청소하려면 한 세월일 텐데. 무엇보다 내가 약한 애들 함부로 괴롭히고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

“응? 약한 애들 괴롭히는 걸 계약자가 제일 좋아하지 않았느냐?”

“오랜만에 원심 분리기 한 번 해줘?”

“미, 미안하다. 짐이 잘못했느니라.”

진혁과 나머지 멤버들이 일상적인 대화를 늘어놨다.

당연히.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하, 이젠 하다하다 웬 듣도보도 못한 코딱지만한 나라의 벌레들까지 까부는군. 피를 봐야 정신을 좀 차릴 테냐?”

스릉!

이반코비치의 검이 예기를 발했다.

그런데 검이 뽑히기 직전. 천유성의 손이 움찔였다.

녹색 빛이 서린 검이 엇박자로 움직였다.

오싹!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주마등.

……방금 검을 휘둘렀으면.

아니, 검이 완전히 뽑혔더라면….

‘죽었다.’

한 점의 과장이나 가정이 섞여 있지 않은 순수한 진실.

일정한 경지에 오른 이반코비치였기에 검과 검이 맞부딪쳤을 때의 결과가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예 바보는 아니군.”

천유성이 그런 이반코비치의 옆을 천천히 지나쳤다.

“왜, 쟤 좀 쳐? 어? 말 좀 해봐 바보 검성.”

“너도 베어버리기 전에 제발 그 입 좀 다물어라.”

“쌀쌀하기는. 그래도. 나는 네 그런 점이 싫진 않더라.”

진혁과 엘리스를 비롯한 나머지도 유유히 빠져나갔다.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야 자리에 있던 이들이 현실을 파악했다.

“뭐, 뭐야? 지금?”

“왜 보내준 거지? 봐준 건가?”

“그러기엔 뭔가 이상했는데… 내가 볼 땐 의도적으로 싸움을 피하려고 한 것 같았어.”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 새끼들이….”

이반코비치가 수치심과 분노에 다시 한 번 검을 움켜잡았다.

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랭커도 아닌 평범한 플레이어의 기세에 눌렸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으려던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발 역시 지면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것 마냥 말을 듣지 않았다.

“뭘 하는 겁니까? 저들을 저대 로 보낼 거예요?”

키요프가 역정을 냈다.

“빌어먹을. 나도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알면은 움직이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젠장. 이래서 러시아 곰탱이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키요프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혼자서라도 전부 쓸어버릴 생각에서다.

탓…. 탓! 콰앙!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향한다.

이미 목표한 건방진 놈들은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래봤자 저 코너만 돌면 바로 보일 터.

지켜보는 눈이 없다는 게 아쉽긴 했지만, 당장은 땅에 떨어진 자존심을 세우는 게 급선무였다.

“당신은 왜 말리지 않는 거지?”

이반코비치가 유천영에게 물었다.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난 순간, 태산 같았던 유천영의 기세는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뭐? 그건 무슨 뜻이냐?”

“보면 알게 될 걸세. 자네들이 자랑하던 힘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고 하찮은 것이라는 걸.”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유천영 역시 자리를 떴다.

바로 그 순간.

쿠쿠쿠쿠쿠쿠!

키요프의 마력이 개방되는 게 느껴졌다.

드디어 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콰콰콰콰콰콰…. 콰콰콰콰쾅!

한 차례 요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건물 전체가 요란하게 흔들린다.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모든 게 송두리째 뽑혀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서 뿜어진 연기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세, 세상에나.”

“저 정도면 죽었겠는데?”

“그래도 그렇지. 키요프 씨.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약속국가라 해도 이러면 국제 문제가 생길 텐데.”

걱정스러운 반응이 이어졌다.

⁕⁕⁕

철썩!

“정신 차려라.”

철썩!

“일어나라! 키요프!”

“으으…윽?”

누군가 볼을 세차게 때리는 느낌에 키요프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욱씬! 욱씬!

엄청난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 앞에는 유럽 최대 연맹 길드인 ‘드레드로어’의 랭커인 ‘샘 마이어’가 있었다. 얄쌍한 외모에 얼굴에 있는 긴 흉터.

현실판 킬러가 있다면 정확히 이런 분위기일 것이다.

서열은 9위.

유럽 전체에서 아홉 번째로 강한 남자였다.

“마이어… 님.”

“설명해라. 어떻게 된 건지.”

“그, 그게….”

키요프가 말끝을 흐렸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천유성이라는 놈에게 접근했던 것.

단숨에 박살을 내버릴 각오로 검을 뽑았다.

그런데. 천유성에게 도달하기 직전.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의 어깨를 친 시점에서 모든 게 암흑으로 변했다.

“…….”

키요프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자 마이어의 이맛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콰아앙!

한 쪽 벽에 거대한 금이 쩍쩍 갈라졌다.

“듣자하니 유천영이 움직인 게 아니라 웬 뜨내기들이라고 하던데. 진짜냐? 그 놈들에게 당한 게?”

“아, 아닙니다!”

키요프가 황급히 외쳤다.

여기에서 진실을 말했다가는 정말로 모든 게 끝장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게 정말로 한 순간에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소리다.

정확히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는 와중에 그런 덤터기를 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렇다면.

최선책은 모든 걸 그럴 듯한 놈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미국.

“미국의 타이탄 길드 쪽에서 방해했습니다.”

살 길은 이것 하나 뿐.

“놈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있는 게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서정희와 그 미국 간부가 유천영 쪽에 함께 있는 걸 똑똑히 봤습니다. “

안 그래도 드레드로어 길드에서는 눈엣가시인 미국 쪽에 꼬투리 하나 잡으려고 눈에 불을 키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그 빌미를 제대로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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