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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709화


709화. 숨어 있는 뱀 (2)

십이지(十二支).

시련의 탑 최상층 부인 47층을 지배하는 제3 세력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탑에는 여러 개의 폐쇄적인 세력들이 존재했지만, 십이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되어 있는 예외 중의 예외였다.

만에 하나 움직이더라도 티가 나지 않는 소소한 이벤트에 모습을 보이는 게 전부였던 터.

그런데 그들이 수백 년간의 봉문을 풀고 외부의 일에 공식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네놈이 어째서…?”

베리엘이 흑창 키샨을 꺼내들었다.

“……이거 보기 어려운 친구가 왔군.”

“혼자인가 본데?”

“설마… 그 괴물도 없이?”

이집트의 신격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신중하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감지되는 마력은 단 하나뿐이었다.

십이지의 일원 ‘묘(卯)’족의 왕. ‘청하(淸河)’.

기다란 토끼의 귀를 가진 소녀가 다리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꽤나 강력한 각투술을 선보였으나, 어디까지나 제압을 위한 용도였을 뿐. 목숨까지 잃은 병사들은 없었다.

“싸우려고 온 건 아니에요. 제가 전투에 특화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다짜고짜 흉악한 무기부터 휘두르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요? 이렇게나 연약한 저한테.”

“개소리도 정도껏 하시지. 피를 보고 눈까지 빨갛게 충혈된 주제에 어디서 귀여운 척이야. 용건이나 말해라. 꼬치 구이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베리엘이 창을 던질 듯한 자세를 취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제3자에게 방해받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짜증 났다.

“흐응. 정말로 저에게 창을 던질 건가요? 고작 마계도 다 먹지 못해서 쩔쩔매는 실력으로?”

콰아아아앙!

흑창이 대기를 갈랐다.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청하의 측면이 흑염으로 물들었다.

“겁쟁이 토끼들의 왕이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툭 치면 떨어질 정도인 것 같은데 아예 용궁에서 거북이라도 불러줄까?”

베리엘이 으르렁댔다.

십이지가 탑의 최상층을 지배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십이지 전체의 전투력이 막강했기 때문이 아닌 두 개의 압도적인 왕이 존재한 덕분.

그 중에서도 제천대성 손오공은 어지간한 주신들마저 순식간에 쳐죽여버릴 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그들이 아니라 묘왕 청하가 혼자 왔다면 그녀 혼자서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역시, 잔뼈 굵은 마왕한텐 허세도 안 통하나 보네.”

청하가 귀를 쫑긋거렸다.

“인사는 이쯤 하면 됐고. 여기 온 목적이나 말해라. 지금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으니까.”

“요즘 탑이 이런저런 이유로 시끄럽잖아?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면 하는 태고의 존재들인지 뭔지도 그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렸고. 그래서 우리 십이지들 사이에서도 우리끼리 한 층계에 처박혀 있는 걸 그만두고 밖으로 나와 적당한 동맹을 찾으려 하고 있어.”

“……뭐?”

베리엘의 동공이 급속도로 커졌다.

청하가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단순히 심심풀이 삼아 밖에 기어나왔다고만 생각했다.

십이지의 특성상 절대로 다른 세력과 손을 잡을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상황은 일상적인 범주와는 완전히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청하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누구랑 손을 잡냐는 건데… 그 부분에서 다들 의견이 달라서 애를 먹고 있어. 덕분에 꽤 큰 다툼이 있었고. 서로 원수처럼 되어버린 왕들도 있지.”

47층이 쪼개졌다.

손오공이란 이름 아래 철통같이 단단하게 하나로 움직이던 놈들이.

청하가 지금 하는 말이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는 이후에 철저히 검증을 거쳐야 하겠지만,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탑 전체의 균형을 뒤바꿀 수 있는 커다란 변수가 생겼다고 봐야하리라.

“그래서… 위대하신 묘왕께서는 우리를 선택했단 말인가?”

“응. 당신들은 ‘강진혁’하고도 관련이 있으니까. 우리 묘족뿐 아니라 다른 몇몇 왕들도 같은 생각이야.”

“나쁘진 않은 제안이군. 대등한 입장에서 힘을 합치는 거라면.”

“풋. 대등한 입장?”

청하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어림도 없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동맹이라도 엄연히 상하관계는 있어. 너희가 우리 밑으로 들어오는 거야. 같은 위치에서 겸상을 하는 게 아니라.”

“거절한다면?”

“거절하면 우리는 너희의 적대 세력에 붙을 수도 있지. 여차하면 이 전쟁을 송두리째 박살내버릴 수도 있고.”

자신감을 넘어 확신에 가까운 말투.

베리엘의 머리가 온갖 경우의 수로 뒤섞였다.

청하가 말하는 몇몇 왕들이 그저 그런 놈들만 모여 있다면 상관없으나. 만약 그 중에 제천대성이나 우마왕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건 감당하기 힘든 일이 되어버릴 수 있어.’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자신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연합에 커다란 짐을 짊어지게 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결정을 하기에 앞서 강진혁과 상의를 좀 해도 될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녀석이 우리 연합의 리더 역할을 맡고 있거든.”

“그 정도야 배려해줄 수 있지. 대신 시간은 딱 3일만 줄 거야.”

루시퍼와의 전쟁은 아무리 빨라도 3일 안에 매듭지을 수 없을 터. 시간만 질질 끄는 걸 사전에 막아버리는 한 수였다.

“…알겠다.”

베리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레이가 진혁이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발도술을… 배웠다라….”

“그래. 우리가 목숨을 살려주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마이어 씨도 우리 목숨을 살려줬다고 볼 수 있어. 짧은 시간 동안 동료애도 좀 생겼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직접 들어봐.”

진혁이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어차피 네크로노미콘을 읽어서 영원히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할 텐데, 무슨 상관이냐?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도 그레이로서는 진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군. 일단은 알겠다.”

팽팽했던 공기는 그레이가 마력을 회수하는 것으로 누그러졌다.

만약 그레이가 진혁의 등 뒤에서 환멸과 경멸에 가득 차 있는 일행들의 눈을 봤더라면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진혁과 발도술에 정신이 팔린 그레이로서는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캐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고유능력이 혓바닥일 수도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이네. 그레이 씨가 쩔쩔 매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확실히 예상보다 전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적당히 힘 조절을 했다곤 하지만, EX급의 일격을 막았으니까요.”

“서정희 이사가 굳이 우리까지 부른 이유가 있었군. 다른 의미에서 골치 아픈 적이다.”

그레이의 반대 쪽으로 새로운 인물들이 끼어들었다.

장보경을 비롯해 서정희에게 의뢰를 받은 하이 랭커들이다.

“후후. 저 분이 테레사로군요.”

그 중에는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바티칸의 사냥개들 역시 함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의 관심사는 테레사에게 쏠려 있었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이라 알려진 소수 세력에서 그나마 네임 벨류가 가장 높은 게 테레사였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을 구원한 로렌시아 가문의 기둥.

유일하게 걸림돌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금발의 성녀를 꼽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서정희냐.”

진혁이 치가 떨린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무슨 3류 악당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를 치우면 하나가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뿌리를 갈아치우지 않는다면 시즌 10까지도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보경이 진혁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레이 씨. 저 자는 당신을 물론, 타이탄 길드와 서정희 이사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을 협박한 범죄자이자 사기꾼입니다.”

초면에 말이 좀 심하네.

근데 구구절절 맞는 말들이라 딱히 정정할 부분이 떠오르진 않는다.

“마이어가 깨어난 후 직접 듣고 결정하겠다.”

“깨어난 뒤라고요? 지금 저 사람 상태를 보면 모르시겠어요? 영원히 제정신을 차릴 가능성이….”

“닥쳐라! 내가 직접 듣고 결정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레이가 마력을 해방했다.

쿠쿠쿠쿠쿠!

EX급 플레이어가 내뿜는 살기.

그레이의 고유능력이 발동되자 그림자를 따라 여러 짐승들이 솟아 올랐다. 전부 신수들과 환수들로 구성된 그레이의 수족들이다.

“하여간 사내 놈들이란 고집만 세서는….”

장보경이 입술을 쌜쭉 내밀면서 물방울 무늬가 새겨진 장침(長針)을 꺼내들었다.

그녀를 따르는 나머지 하이 랭커들 역시 물러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급 괴물들 간에 전투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들 날카로워진 것 같은데, 일단은 이쯤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 친구 말마따나 살아야지 각자의 이해관계를 청산할 기회도 있을 텐데요? 게다가 밖에서 저희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내분을 일으키는 건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슈자 길드의 은크루마가 한껏 달아오른 불길을 진정시켰다.

특히, 외부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이미지야말로 모든 길드에서 최우선적으로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래. 일단은 나가는 게 먼저긴 하지.”

“동감이다.”

“필요한 것들은 모두 모았으니까.”

탐험가들이 요구하던 빛의 책과 어둠의 책은 확보해뒀다.

이 두 개의 아이템을 통해 마지막 관문으로 향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조금씩 활기를 띠었다.

생존에 대한 희망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단 한 명.

‘흐음. 여기 구조상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텐데. 어떻게 되려나?’

진혁만은 다른 의미로 흥미진진하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 문자는….”

“아니에요.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아요.”

“무슨 소리야. 내가 해석 등급이 5성이라고.”

“겨우 5성 가지고 큰 소리는. 여기 그 정도 레벨까지 못 올린 사람이 어디 있다고.”

탐험가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두 개의 책을 두고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저마다 자기 말이 맞다고 우겨대는 통에 각 길드의 공대장들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 미궁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가 고민을 하는 동안, 진혁은 대신전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잘 만들어두긴 했네.’

공격대로부터 제법 떨어진 지점.

진혁이 기둥의 한 쪽 면을 만졌다.

미궁 전체를 아웃브레이크 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완성도다. 시스템이 개입한 게 아니라면 믿기 힘든 수준이었다.

무식하게 파괴하는 게 특기인 아우터 갓들의 소행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치밀하고 예상 밖의 허를 찌르는 ‘그 남자’의 스타일도 아니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단 하나.

엘더갓.

그들 역시 본격적으로 움직인 게 틀림없었다.

‘일단 대비를 확실하게 해두긴 해야겠어.’

이번 이벤트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는 게. 미래를 위한 몇 가지 포석을 깔아두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아누비스의 가호’가 활성화됩니다!]

기둥을 따라 넓은 파장이 퍼져나갔다.

파장이 피아노의 악보처럼 어지럽게 공명하며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쿠쿠쿠쿵!

흙더미 사이에서 주황색 빛이 나는 아이템이 솟구쳐 올랐다.

[‘붉은 군단 개미의 페로몬’을 획득하셨습니다.]

진혁이 종이 꾸러미를 뒤적였다.

‘어둠의 책’.

중요한 내용만 따로 적은 일종의 요약집이었지만, ‘천칭의 문양’을 선택했던 덕분에 핵심 내용을 적어둔 것만으로도 신전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아이템들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다음은….

[황도십이궁 ‘물병자리의 끝자리’가 펼쳐집니다.]

아름다운 별의 파편이 흙 속에 녹아들었다.

탑 전체에 걸쳐 조금씩.

별들의 기운을 나눠서 새겨넣고 있었다.

아자토스를 상대하기 위한 수십 가지 준비 중에 일환으로서.

그런데 바로 그때.

퍼져나가던 파장 중에 일부가 어느 시점에서 사라졌다.

“……음?”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7개의 술식을 섞어서 만들어낸 특수한 결계의 파장이 소멸하는 건 통상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감춰져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9성급 ‘그림자의 저편’, 9성급 ‘다차원의 장막’, 9성급 ‘바람이 속삭이는 곳’.

3개의 고위 결계가 중첩되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2M에 이르는 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틈 주위로는 고대 룬어와는 차원이 다른 언어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본 적 있는 언어다.

아직까지 그 끝을 전부 다 알지 못한 미지의 영역.

바로 ‘잃어버린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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