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710화
710화. 오만한 집합소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련의 탑이 현실이 되고 나서 탑의 정복을 위해 필요한 여러 개의 단서들을 찾아왔었다.
50층을 가기 위한 필수적인 성유물인 ‘왕관’과 50층의 존재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네크로노미콘’.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고 영위하는 힘의 원천인 ‘잃어버린 언어’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태고의 언어는 잃어버린 언어의 일부분일 뿐. 저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하게 된다면 태고의 존재들 그 이상의 힘을 손에 넣을 수도 있어.’
이미 엄청난 성장을 했다고 하나 아직까지 아자토스와 슈브니구라스 등 규격 외 괴물들에 비하면 멀고 멀었다.
그냥 맨몸으로 전투를 벌였다간 승리는커녕 1시간도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격차가 존재했다.
이건 만렙을 찍고 모든 아이템을 최종 스펙까지 맞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결과다.
아자토스는 처음부터 이길 수 없게 설계되어 있는 최종 보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변수와 변칙을 섞는 수밖에 없지.’
잃어버린 언어는 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히든 카드다.
진혁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벌어진 균열을 향해 걸어갔다.
여차하면 왕관을 비롯한 모든 능력들을 한꺼번에 사용할 준비를 마친 채.
우우우웅!
그리고 균열 속으로 들어간 순간, 새하얀 눈보라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오싹하고.
태초의 불꽃을 뚫고 냉기가 몰아쳤다.
공기마저 얼어붙는 극저온의 세계. 그 한가운덴 검은 기둥들이 연이어 늘어서 있는 반쯤 부서진 신전이 보였다.
묘하게 낯이 익은 신전이다.
진혁이 걸음을 옮기자 계단 중앙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두 눈에 들어왔다.
“이건 예상 밖이네요.”
진혁이 여러 감정이 섞인 인사를 건넸다.
이건 솔직한 심정이다.
설마, 이 자를 이곳에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상대 역시 같은 심정이라는 듯 눈보라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를 수가 없겠지.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흰색 로브를 입은 흑발의 남자.
‘벨토르 드 로안마스크’.
고대 왕국의 결계술을 전공한 괴짜.
첫 만남 당시엔 그의 사념체와 마주했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일반인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탑의 여러 이면들을 보게 된 지금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저 자 역시 서리혼령이나 사멸자 같은 고대의 등반자들 중 하나라는 것을.
“나도 여길 찾아내느라 엄청 고생하긴 했는데 말이야. 대체 무슨 수로 ‘오만한 집합소’를 찾아낸 거지?”
“우연이라고 하면 믿어주시겠습니까?”
“그렇기엔 내가 너무 개고생을 했거든. 아무리 자네가 재능이 넘친다고 해도 이토록 단기간에 결계술을 대성했다고 하기엔….”
말을 하던 벨토르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순간, 10성급에 이르는 결계들이 중첩되었다.
어떤 걸 사용했는지 채 파악도 하기 전에 진혁의 주위로 주사위 형태의 관이 만들어졌다.
실력이나 보자고 하기엔 너무 과하긴 한데.
진혁이 즉각 대응했다.
[고유능력 ‘고대 결계’가 발동됩니다!]
연산 속도는 이쪽 역시 그리 뒤지지 않을 거다.
태고의 존재들한테도 먹혔던 결계술이었으니까.
콰콰콰콰콰…!
파파파팟!
화려한 빛들이 한 공간에서 교차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상쇄와 충돌 그리고 해제와 융합이 반복되었다.
“캬아.”
마지막에 나온 건 벨토르의 탄성이었다.
사심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의미의 감탄사.
미래가 기대되는 루키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절대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다.
“실수 한 번 했으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그런 것치곤 꽤나 여유가 넘쳐 보이던데? 예상하긴 했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야. 홀로 이 외로운 곳을 탐험해야 하나 싶었는데 아주 든든한 동반자가 생겼어.”
결계술의 대가인 벨토르 역시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바로 이 오만한 집합소였다,
확실히 그럴 수밖에 없는 곳이긴 하다.
‘이름 하난 잘 지었네.’
진혁이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시련의 탑의 온갖 지워진 장소들이 모이는 특수 공간.
최소한 주신급이나 상급 관리자 이상이 개입하여 구역 자체를 소멸시킨 구역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머무는 중간지 같은 개념이다.
당연히 탑의 온갖 기억들이 뒤섞여 있는 만큼 비밀과 고급 정보들도 넘쳐날 터.
‘감히 값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기연이지.’
진혁이 속으로 군침을 삼켰다.
“흥분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아는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우리 같은 침입자를 굉장히 거북한 이물질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기회만 보면 제거해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더라고.”
전신을 결계들로 보호하고 있지만, 아주 약간의 방심이나 실수를 한다면….
……그 즉시 갈기갈기 찢겨 한 줌의 핏물이 되어버린다는 소리다.
대신. 위험이 큰 만큼 장점도 있었다.
바깥에서의 1시간이 이곳에서의 1주일.
시간의 흐름이 다르기에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이곳을 구석구석 탐사할 수 있었다.
“각오는 충분히 해뒀습니다.”
진혁이 전직용 스킬들을 전부 개방했다.
황도십이궁을 필두로 수많은 결계들이 눈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가득 밝혔다.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특별히 맨 처음은 내가 직접 가이드해 주도록 할게.”
“그것참 감사한 말씀이네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첫 번째 목적지야 진즉에 정해두었다.
무너진 신전 옆 쪽에 위치한 나무로 만든 둥그런 집.
저곳은 과거 상급 관리자 중 하나인 ‘하스팅’의 거처였다.
태고의 신격들과 붙어 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하스팅은 몰락했고 결국엔 목숨을 포함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다.
태고의 존재들과의 접점이 되는 모든 정보들과 함께.
‘분명 녀석이 배신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을 거야.’
일전에 엘리스가 가브리엘과의 거리를 통해 얻은 ‘기억을 머금은 돌’에는 별 다른 정보가 없었다.
뻔한 눈물팔이 신파극이 넘쳐나는 과거에 태고의 신격들의 힘과 권위에 굴복하게 된 스토리.
너무나 전형적인 기억의 흐름은 개연성은 충분했지만, 호소력이 부족했다.
고작 그 정도로 하스팅이란 일그러진 캐릭터를 설명할 순 없었다.
“좋아. 안내하지. 하지만, 저기엔 별게 없을 거야. 워낙에 가까운 곳에 있어서 나도 몇 번이나 살펴봤던 곳이거든.”
“벨토르 님이 확인했다니 틀림없겠지만, 개인적인 호기심이라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찾지 못한 걸 자네가 찾는다면 그거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소식이지.”
벨토르가 콧노래를 부르며 움직였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 텅 빈 공간이 드러났다.
생전에 하스팅이 사용했던 집기들과 서류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난 더 안쪽을 살펴봐야 하니 편하게 둘러봐.”
“감사합니다.”
벨토르가 사라지자 진혁이 살라맨더를 소환했다.
화르륵!
“주인!”
작은 불을 뿜어내는 살라맨더가 뽈뽈 거리며 거실을 돌아다녔다.
“이 안을 샅샅이 뒤져. 평범한 곳은 말고 네 감각에 걸리는 부분들 위주로.”
다섯 원소의 정령수들 중 살라맨더를 선택한 이유는 이 얼어붙은 곳에서 가장 민감하게 온기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
따뜻한 곳을 선호하는 고블린 종족의 특성상 언제나 온기가 보존되어 있는 은둔처를 남겨둘 가능성이 높았다.
“헤헤. 조금 어려운 임무이긴 한데….”
살라맨더가 손바닥을 비비적댔다.
이 자식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채찍보다는 당근을 주는 편이 나으리라.
“정령특전대 대장 자리 1주일간 너한테 넘겨주고. 오룬 영감님에게 ‘꺼지지 않는 모닥불’도 빌려와 줄게. 이거면 됐어?”
“힘내볼게!”
살라맨더가 바닥에 코를 박고 킁킁대며 온기를 찾기 시작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여기도 아니야. 여기도.’
벌써 12시간이 넘게 수색을 이어갔지만, 기존의 정보 외에 추가적인 단서를 얻을 순 없었다. 벨토르가 말했던 대로 맛있는 게 하나도 없는 폐허일 뿐이다.
그러나.
‘그 교활한 놈이 그럴 리 없어.’
진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3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게 아니다. 하스팅의 입장에서 놈이라면 어떻게 자신이 가진 비밀을 숨겼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진혁이 다시 한 번 저택을 훑었다.
서류뭉치와 책들 그리고 잡동사니.
역시나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다. 하스팅이 주로 사용하던 유품들은 워낙에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저건 하스팅이 한 번도 빼놓은 적 없는 건데….’
본심을 감추기 위해서인진 모르겠지만, 하스팅은 언제나 안경을 착용했다. 언제나.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설마.
진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안경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 위에 안경을 걸쳤다.
느껴진 건 아주 옅은 위화감. 너무나 희미했기에 얼핏 보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이번에야말로 진혁은 제대로 된 단서를 찾았다는 확신을 했다.
“투크샤.”
해방, 혹은 시동을 뜻하는 고블린의 언어.
……반응이 없다.
“사말룩.”
같은 의미를 지닌 고대 룬어.
이것 역시 반응이 없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스린느.”
짧은 시동어가 흘러나왔다.
태고의 언어였다.
그러자.
파츠츠…!
안경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기억이 재생됩니다.]
[이 영상은 단 한 번만 재생된 뒤에 영구히 파괴됩니다.]
주마등처럼 하스팅이 꽁꽁 감춰왔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이것 봐라?”
……전혀 다른 의미에서 진혁의 허를 찔러버렸다.
***
안에서의 일주일이 흘렀다.
“이제 가려고?”
짐을 다시 싸는 진혁을 보며 벨토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예전에도 한 번 진혁을 붙잡은 적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때보다 100배는 더 헤어짐이 아쉬운 듯 보였다.
“주어진 시간이 딱 여기까지라서요.”
아쉽지만, 이젠 나가봐야할 시간이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람세스 대신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이 이상하게 여길 테니까. 무엇보다 빠르게 저쪽 상황을 정리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제가 고이 기르고 있던 소중한 메두사를 잘도 빼돌렸군요.
자신의 컬렉션 창고가 털렸다는 걸 릭이 인지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살면서 손해라는 걸 본 적이 없는 대상단의 주인께서 아주 제대로 자존심에 먹칠을 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릭이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개인회선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베리엘 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직접 들어보셔야 할 것 같더군요.
릭이 마계에서 있던 일들을 전달했다.
그 말대로 하나같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사안들이었다.
‘엘더갓들뿐 아니라 십이지신 측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점점 더 상층부의 흐름이 심각해져만 간다.
피할 수 없는 결전이 다가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뭐, 이번에도 말려봤자 소용없을 것 같긴 하네. 그래도 같이 있는 시간 동안 여러 가지로 유익했어.”
벨토르가 손을 뻗었다.
“저야말로 벨토르 님 덕분에 감당하기 힘든 기연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하스팅의 기억을 엿봤고. ‘잃어버린 언어’의 일부를 습득했다.
만약 벨토르를 만나지 않았다면 고작 일주일로는 턱도 없었을 일이었다.
게다가.
나머지 잃어버린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단서들 또한 손에 넣게 되었다.
“다시 보게 될 날을 기대하지. 우리 쪽 친구들도 자네에 대해서 꽤나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야.”
호오.
고대의 등반자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어쩌면 서리혼령을 직접 만나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혁이 아공간에 넣어둔 서리혼령의 창을 떠올리며 새로운 기대를 품었다.
“꼭. 그런 날이 오길 고대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진혁이 처음에 왔던 균열로 몸을 던졌다.
***
[람세스 대신전에 복귀합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땐 공격대들이 전부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오! 왔느냐 계약자.”
“어디 갔어 얘네들?”
진혁이 모래성을 만들며 놀고 있는 엘리스를 향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