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715화
715화. 제약회귀(制約回歸)의 굴레 (2)
[하스팅이 히든 고유성창 ‘회귀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쿠쿠쿠쿠쿠쿠!
검붉은 스파크가 솟구쳤다.
동시에.
꿀렁! 꿀렁!
단단했던 지면이 물렁해졌다. 마치 진흙처럼.
꿈틀거리며 솟구친 건 태고의 존재들이 즐겨 사용하는 촉수들이었다.
각각의 촉수에는 저마다 하나의 외눈이 달려 있었는데, 전혀 다른 속성의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일전의 하스팅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
수많은 회귀를 반복하며 쌓아올렸던 업(業)이 모조리 해방되려는 것이다.
오싹!
진혁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과연….’
고블린의 몸으로도 회귀에 회귀를 거듭하면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세포들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우우우웅!
각각의 촉수 끝에 맺힌 빛이 일제히 쏟아졌다.
콰앙!
진혁이 자리를 박찼다.
‘천마군림보’와 ‘검마천령보’가 동시에 발동되며 잔상에 잔상을 남기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콰콰콰콰콰쾅!
퍼어어엉!
조금 전까지 발을 딛고 있던 모든 곳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엄청난 융단 폭격이다.
한 개인이 사용한다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 형형색색 쏘아지는 빛줄기들은 그 수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위력 역시 터무니없긴 마찬가지였다.
탓…! 탓!
기괴하고 변칙적인 움직임 덕분에 요리조리 빠져나가곤 있으나, 단순히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하스팅의 간격까지 파고들 순 없었다.
그렇다면….
[고유성창 ‘레인보우 브릿지’가 발동됩니다!]
파츠츠…!
진혁의 검에 남색과 녹색의 기운이 덧씌워졌다.
서걱!
날아오던 빛줄기가 그대로 쪼개졌다.
단순히 상위 색으로만 쳐내면 방어 자체는 가능하지만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진다. 각각의 빛줄기의 특성에 맞는 색을 사용해야 비로소 최적의 공략법이 완성되는 것이다.
“굉장하군요. 능력을 복사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메드레이의 능력까지 손에 넣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능력에 이해도 또한 역시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고요.”
하스팅이 꽤나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보로 전해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 사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격차가 존재했다.
“너만 놀란 게 아니야. 그런 힘과 능력을 가지고서도 태고의 존재들에게 붙는 쪽을 택했다니. 정말 그 녀석들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아자토스가 깨어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제가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당신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아니.”
진혁이 날아오는 빛줄기를 또 다시 반으로 갈랐다.
잘린 빛줄기가 지면을 새카맣게 태웠다.
진혁의 눈이 하스팅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아자토스가 깨어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최강의 존재.
그런 절대자를 눈앞에 둔 미물은 정신을 붕괴시키는 경외감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그 대상이 절망스럽다고 해서 회피하기만 하려는 건 진정으로 시련의 탑을 지키고자 하는 자가 아니다.
목적이 다르다.
열망이 다르다.
무엇보다.
얼마나 시련의 탑을 이해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무게가 다르다.
후두두둑.
부서진 빛줄기가 무수히 많은 파편이 되어 쏟아졌다.
“나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다.”
“맞서… 싸웠을 거란 말입니까?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련의 탑에 절대라는 건 없어. 그 누구나 탑을 등반할 자격이 주어지고. 그 누구라도 탑의 정상에 오를 수 있거든.”
“이상론이군요. 규칙이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해서 그걸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건 아닙니다.”
하스팅의 한숨에 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유하는 돌들과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 다섯 개의 달이 떠 있는 은하수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지.”
그저 담백하게 자신이 봐온 장면을 독백한다.
“……!?”
하스팅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탑의 정상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 그리고. 그 어떤 존재도 영원히 탑의 마지막을 독점할 순 없는 법이야.”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다.
분명, 새영언환은 그리 말했었다.
이 고여버린 세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길 고대하면서.
“이만 끝내자 하스팅.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돌아가봐야 하거든.”
[‘무한의 서고’가 개방됩니다!]
수많은 책들 가운데서 두 권의 책이 뽑혀졌다.
책장이 넘어가자 진혁의 무장과 마력이 완전히 바뀌었다.
[고유성창 ‘황야의 무법자’가 발동됩니다!]
[고유성창 ‘크로노 스피어’가 발동됩니다!]
파츠츠!
빌리 더 키드의 총 끝에 붉은 빛이 점멸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없어서 전성기를 완전히 재연하진 못했으나. 퍼스트 블레이드를 사용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 퍼져나갔다.
“……확실히 할 말을 잃게 만드시는 면이 있군요. 하지만. 당신도 전부를 다 알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 당신은 결코 저를 상대로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잠시 진혁을 바라보던 하스팅이 무언가 결심한 듯, 장보경에게 받은 성유물을 꺼내들었다,
정확히는 시벅컬이 준 아이템이었다.
[‘이오브의 불안정 주사위’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엘더 갓의 마력이 추출됩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유성창 ‘회귀자의 시간’ – 무한의 제약회귀가 발동됩니다!]
고유성창이 아이템에 반응해 이질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순간.
기묘한 파장이 퍼져나갔다.
진혁이 반사적으로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의 별자리들을 불러왔다.
그러나.
[별자리들의 운항이 멈춥니다.]
[열두 개의 별자리가 그 빛을 잃어버립니다.]
결계가 먹히지 않는다?
‘잃어버린 언어’를 사용하자. 수많은 언어들이 하스팅의 권역으로 빨려들어갔다.
일종의 고유 결계.
그것도 엘더 갓들이 사용하는… 아니, 어쩌면 그걸 뛰어넘는 종류의 대결계였다.
“지금부터 제가 겪은 고통의 일부를 맛보여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이 싸움의 승패 따위는… 당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아무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을 끝내기 무섭게 하스팅이 달려들었다.
계속해서 거리를 두고 중거리나 원거리 전을 선호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저돌적인 전진이었다.
‘뭐지?’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다. 달려드는 폼이 너무나 어색했으니까.
허점이 너무 많아서 어디를 노려도 통할 것 같았다.
약간 미심쩍긴 했으나 대응하는 게 우선이다.
촤르르르…!
칼날이 늘어나며 달려오던 하스팅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사복검이 하스팅을 꿰뚫으려는 찰나, 하스팅의 움직임이 예측할 수 없게 변했다.
종이 한 장 차이.
피부 한 꺼풀을 벗긴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무슨…!”
거기서 그런 자세가 가능하다니. 그것보다 아주 약간이라도 실수한다면 즉사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저런 과감성을 보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진혁이 속도를 3단계 올렸다.
이번에야말로 끝장낼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푹! 푸푸푸푹!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아예 ‘마혼검’과 ‘천마신공’의 초식까지 섞었지만 하스팅은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너무나 어리숙하면서 초보적인 동작이었으나 진혁은 하스팅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서걱!
하스팅의 칼날이 진혁의 팔을 스쳤다.
상처 부위에서 붉은 피가 맺혔다.
[고유능력 ‘별의 가호’가….]
황금색 빛이 일렁이려는 찰나.
쿠쿵!
“…컥?”
진혁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상처가 회복되질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의식이 흐려진다.
‘만다라’는 물론 ‘시스템 조작’까지 사용해봤으나 빠져나가는 생명력을 되돌릴 순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1분 전으로 회귀합니다.]
[기억이 보존됩니다.]
세계의 시간이 되돌아갔다.
⁕⁕⁕
“허억….”
진혁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설마….
회귀를 했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만?
“생소한 느낌이죠? 하지만, 곧 익숙해질 겁니다.”
하스팅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너 역시 회귀를 한 거냐? 기억을 가지고?”
“저와 당신 중 죽는 자가 회귀를 하는 구조입니다. 참고로 저는 당신의 첫 번째 공격을 피하는데 128번. 그리고 그 다음 공격까지 피하는 데 535번. 마지막 공격을 피하고 제가 공격을 성공시키기까진 2,538번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일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스팅이 진혁에게 일격을 꽂아넣을 수 있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확실히 저렇게 하면 어설픈 움직임으로도 내 공격을 전부 피할 수 있던 게 말이 되네. 하지만. 이런 구조라면 둘 다 승리를 하는 게 불가능한 거 아니야?”
“맞습니다. 이곳에선 ‘이긴다’라는 개념이 희석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당신과 저에겐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저는 이 제약회귀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지만, 처음 겪는 당신이 과연 이 회귀가 갖는 압박감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얼마나 화려한 스킬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천부적인 재능이나 센스의 보유 여부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 잡아먹히지 않고 버텨내는 것.
이성을 잃지 않은 채 견디는 것이 진정한 강자다.
둘의 전투가 다시 한 번 이어졌다.
⁕⁕⁕
시벅컬의 성유물과 하스팅의 고유성창을 통해 극히 제한적인 조건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능.
그것은 제약 회귀의 정수(精髓)였다.
한 번. 두 번….
열 번… 백 번.
그리고 숫자를 세기 힘들 만큼 아득히.
짧은 회귀와 회귀가 반복되며 하스팅과 진혁의 전투가 이어졌다. 한쪽이 한쪽을 죽여도 끝나지 않는다.
무한한 굴레에 갇힌 두 필멸자는 끝이 없는 싸움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공격과 방어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상대가 어떤 식으로 패턴을 사용하는지 모두 파악하게 되었다.
더 이상 공격과 방어의 의미가 없어지는 시점이 와버린 것이다.
‘어째서… 포기하지 않는 거지?’
푸욱!
진혁의 심장에 칼날을 박은 하스팅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귀합니다.]
퍼퍼퍼퍽!
이번엔 하스팅이 당했다.
박살 난 심장이 허공 높이 솟구쳤다.
[…회귀합니다.]
바뀌는 건 없다.
그저 조금 전으로 돌아갈 뿐.
‘포기해야 정상이다. 단념해야 정상이란 말이다.’
푹! 푸욱! 푹!
칼날이 살 속을 헤집고.
온갖 마법과 스킬들이 상대의 급소를 난자한다.
[회귀합니다.]
[회귀합니다.]
[회귀합니다.]
[회귀….]
[……합니다.]
정신이 붕괴되어야 당연한 상황.
어둠 속에 빠진 조난자는 살려달라고 이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애걸해야 정상이었다. 바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에게 빌붙는 게 당연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
진혁은 계속해서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1,983,050회차에서 안 된다면 1,983,051번째 회차에서는 새로운 걸 시도해보는 것으로.
‘꺾이지 않는다는 건가.’
하스팅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 눈에서는 아무리 거대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타오르는 빛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툭.
[‘빙하조형’이 발동됩니다!]
쩌저적!
얼어붙은 창들이 그대로 하스팅에게 향했다.
이미 알고 있는 패턴이다.
각도와 타이밍 역시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하스팅의 손 끝에 새로운 마력이 맺혔다.
[…됩니다.]
짧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퍼퍼퍼퍽!
얼어붙은 창이 그대로 하스팅의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당연히 반복될 줄만 알았던 회귀 완료의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띠링!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상태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