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나 혼자 만렙 뉴비 73화


73화. 거점 방어전 (2)

바닥에 생긴 커다란 상흔.

검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뿌연 먼지가 흩날렸다.

“뭐, 뭐야 이 미친놈은?”

“몰라. 웬 또라이 새끼가 갑자기 공격해 왔어!”

“죽으려고 환장했군. 이 인원을 상대로 시비를 건다고? 가뜩이나 밤도 새서 짜증났는데 잘됐어.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 주마.”

“헉! 머…… 멈춰! 저 녀석, 그놈이잖아. 검귀!”

“그 사이코패스라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꺼져라. 전부 베어 버리기 전에.”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는 건 다름 아닌 천유성이었다.

상당히 화가 많이 났는지 눈빛이 차갑다 못해 살벌할 지경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오늘 하루도 어김없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천유성은 이른 아침부터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1시간 안에 4층 입구로 튀어올 것.]

발신자는 강진혁.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자 자신이 탑에 남아 있는 목적이었다.

‘웃기는군.’

천유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녀석이 오란다고 해서 가야 할 이유 따윈 없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다.

그 망할 괴물을 넘어서기 위해선 검의 끝을 깨뜨려야만 했다.

그렇기에 천유성은 진혁이 보낸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또 하나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지금 오면 내가 왼팔이랑 오른쪽 다리 안 쓰고 상대해 줌.]

참자.

이건 도발이다.

아주 얄팍하고 유치한.

낚였다간 상대의 술수에 놀아나는 꼴밖엔 안 된다.

[오케이. 그럼, 우뇌만 쓰고 양쪽 눈도 감고 싸워 줌. 콜?]

참……자.

참아야 한다.

지금의 분노를 기억하고 승화시켜 나중을 위한 복수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기다린다면 반드시 기회는 온다.

[쫄? 아. 쫀 거 맞나 보네. 내가 꼬리말은 멍뭉이는 괴롭히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걸로 끝.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죽인다.

반드시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리겠다!

완벽하게 도발에 낚인 천유성은 모든 걸 내팽개친 채 4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저 멀리서 이 모든 원흉의 모습이 보였다.

* * *

“어? 왔어? 여기야.”

진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하여간, 약속 시간은 더럽게 안 지키는구나.

“네놈……!”

천유성이 검을 앞으로 뻗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철기검이 아닌, 음각으로 룬어가 새겨진 새로운 검이었다.

‘역시 저걸 손에 넣었군.’

속성검(屬性劍).

아직 완성형은 아니었으나, 무기에 원소 마법을 주입해 검사들의 약점인 원거리를 보완해 줄 수 있는 특수 아이템이었다.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천유성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하긴 했지만, 오롯이 정석만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그만큼 다음 행보를 예측하기 쉽다는 뜻이다.

“내가 겁을 먹었는지 아닌지 이 자리에서 증명해 주겠다.”

천유성이 양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쿠쿠쿠쿠쿠쿠!

날카롭게 갈무리된 마력으로 인해 지면을 따라 거친 선들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무식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검기다.

“증명하는 건 좋은데, 미완성인 검으로 싸우려고?”

진혁의 말에, 천유성이 멈칫했다.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야. 속성검이 확실히 나쁘진 않긴 한데, 완전하게 완성되어야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거든.”

“…….”

“마침, 이번 층에서 나오는 A등급 랜덤 박스에 그 속성검을 완성시켜 줄 수 있는 아이템도 포함되어 있어. 원하는 게 화(火) 속성. 맞나?”

“개소리! 랜덤 박스는 말 그대로 랜덤이다. 거기서 뭐가 나올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단 말이다!”

“그래. 정상적인 방법으론 랜덤 박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엿볼 수 없지.”

하지만.

“나는 비정상적인 편법을 더 선호한다는 거. 알고 있잖아?”

진혁이 싱긋 웃었다.

반면, 천유성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다면 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라며 넘겼지만.

눈앞에서 능글맞게 웃고 있는 고인물만큼은 거기서 예외였다.

저놈이라면 정말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커튼 뒤를 엿볼 수 있는 방법을.

“만약 네놈이 말이 맞다고 치고. 허면 그걸 미끼로 날 이용할 생각인가?”

“원래 삶이란 자신의 이해타산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는 거 아니었어? 게다가 네 입장에서도 손해 볼 건 없잖아?”

더 좋은 아이템이야 말로 강해지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다.

괜히 ‘템빨’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아이템만으로도 상위 티어에 있는 랭커들을 씹어 먹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결국.

“……빌어먹을. 반드시 그 랜덤박스 안에 속성검을 완성시킬 수 있는 재료가 있어야 할 거다.”

스릉!

천유성이 뽑았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좋아.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어찌 됐든 이걸로 5명이 모두 모였다.

그중에 하나는 같은 편인지 살짝 의심이 가는 놈이긴 했지만.

* * *

[5인 파티가 형성되었습니다.]

[거점 방어전을 위한 최소 인원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혁을 포함한 다섯 명은 곧장 경기장으로 향했다.

“…….”

“흠. 흠.”

이태민과 유연화가 연신 천유성을 힐끗거렸다.

과거 눈만 마주치면 칼부터 뽑아들었던 망나니 아니었던가?

그런 살벌한 녀석과 같은 팀이 됐으니 불안할 수밖에.

“진혁 씨. 정말로 괜찮을까요?”

회랑에서 천유성을 만났던 테레사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괜찮습니다. 저 녀석이 겉으론 저래도 의외로 순딩한 구석이 있거든요. 아마, 웨이브가 오는 동안만큼은 저희 뒤통수를 치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절 믿으세요.”

누구보다 많이 티격태격하다 보니 싫어도 알게 되더라.

그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그리고 내가 아는 천유성이라면, 적어도 비겁한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 말이지.

그때였다.

“아 맞다, 오빠. 깜빡할 뻔했네. 이거 받아.”

무언가 생각났는지 유연화가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었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한 쌍의 칼.

쌍룡검(雙龍劍)이었다.

“오오!”

과연.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지만, 탑 내부에 있는 성유물에 필적한다고 하더니.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손끝을 따라 전해지는 묵직한 느낌으로 인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으니까.

“할아버지가 전해 달라고 했어. 근데, 진짜로 이거 할아버지가 엄청나게 아끼던 건데, 무슨 수로 받아낸 거야?”

“그냥. 개인적으로 좋게 봐 주신 것 같아.”

진혁이 적당히 얼버무렸다.

지금 당장은 거주자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당장 눈앞에 있는 방어전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소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

“다 왔어. 저기가 우리 거점이야.”

어느덧 일행은 경기장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 이 커다란 거점을 5명이서 막아야 한다 이거지?”

“암스테르담에서 아웃브레이크 막았을 때 생각나겠네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는데.”

유연화와 테레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하의 불광동 핵주먹이랑 암스테르담의 성녀도 긴장이 되긴 하나 봐?”

“사, 살짝? 그래도 오빠랑 함께 있으니 안심은 되네.”

“저도요. 뭐랄까, 진혁 씨랑 함께 있으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라도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띄워 줘 봐야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에이. 띄워 주긴.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회랑도 혼자 공략하셨던 거. 저도 직접 봤는데요 뭘.”

이 사람들이 갑자기 왜 이래?

설마, 뭔가 바라는 거라도 있는 건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적어도 신뢰를 받고 있다는 거였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된 마당에서 누군가를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찌릿! 찌릿!

끼고 있던 브라함의 반지가 격하게 움찔거렸다.

‘그래. 너도 믿을 수 있는 거 맞아.’

엘리스의 토라짐을 느낀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 녀석도 겉보기와 다르게 은근히 질투심이 많다.

차갑고 고고했던 첫인상이랑은 완전히 180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 맛에 더 놀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흠. 누가 경기장을 선점했나 했더니. 한국인들이었나?”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동시에, 빡빡 민 민머리에 문신을 전신 가득 뒤덮은 남자들이 건물 사이에서 나타났다.

“오빠!”

“형, 저 녀석들 기척을 지우고 접근했어요!”

“……진혁 씨!”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그래, 알고 있다.

몇 분 전부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오길래 언제 머리를 드러내나 했는데,

거점까지 오고 나서야 면상을 볼 수 있게 됐구나.

기척을 숨기는 솜씨가 그럭저럭 괜찮을 걸 보니 실력은 나름대로 있는 모양이다.

“중국 쪽 플레이어인가.”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대형 길드 중 하나인 삼합회(三合會).

꽤나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는 놈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맨 앞의 미청년은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네놈이 강진혁이라는 놈이냐?”

하얀 얼굴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동양인이 입을 열었다.

길거리에서 만난다면 한 번쯤 다시 보게 될 외모다.

하지만, 수려한 외모보다 눈이 가는 건 녀석의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의 문양이었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문양은…….

틀림없다.

‘남궁세가’.

시련의 탑 25층에 있는 ‘무림’의 일원 중 하나다.

‘중국 측과 거주자가 접촉했다는 게 사실이었군.’

유천영이 했던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네놈이 강진혁이냐고 묻고 있질 않느냐?”

“맞아. 내가 강진혁이다.”

“역시, 그랬군. 내 이름은 남궁현이라고 한다. 너희 같은 미천한 소국과 달리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중화에 소속되어 있는…….”

자신을 소개한 남궁현이 말을 이으려다가 멈칫했다.

상대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아 미안, 그쪽 나라는 미세먼지에 찌들어 있잖아. 혹시라도 말할 때마다 입에서 먼지가 나올까 봐 불안했거든.”

피부가 하얀 게 이해가 된다.

365일 24시간 하늘이 뿌옇게 가려져 있으니, 태양 빛이 통과될 리가 있나.

“이……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남궁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화났네.

먼저 빡치는 쪽이 지는 게 국룰인데.

“너 이 새끼. 지금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남궁세가를 우습게봤다간 삼족을 멸해 주겠다! 라는 개소리는 내가 대신 해 줄 테니, 생략 부탁할게. 지겨워. 그딴 3류 악당 같은 대사.”

진혁이 상대가 할 대사를 미리 읊어 줬다.

토씨 하나까지 정확하진 않아도 대충 이런 뜻으로 지껄였을 거다.

“근데 남궁세가 주제에 지킬 자존심이라는 게 있긴 하냐?”

탑에서 천마 한 번 뜨면 벌벌 기는 게 니들 수준이잖아.

게다가 남궁세가 소공자가 출두해서 이름을 날리는 건 20년 전에나 먹히는 거 아니었어?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딴 식으로 행동하는 건지 모르겠네.

혼자서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게 아니라면 말이지.

“너…… 너!”

“쉿. 입 크게 벌리지 말고. 바이러스 가득 들어 있는 침이라도 튀었다간 전 세계 플레이어들한테 민폐야.”

“으아아악!”

결국, 남궁현이 폭발했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