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03화
803화. 고인물이 유사(流)를 이용하는 법 (4)
쩌저저적.
끄그그극.
몰려오는 죽음.
화과산을 옥죄어 오는 과타노차의 몸이 보이는 모든 것을 검게 물들였다.
“이럴 수가.”
“마, 막을 수가 없습니다.”
결계, 진법, 술식.
거점의 이점까지 살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태고의 존재가 가진 격에 대항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미물들이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구나.”
산 전체를 따라 울려퍼지는 음성.
생기를 흡수하면서 시시각각 강해지는 과타노차가 킥킥거리며 조소를 내뱉었다.
어느새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고. 그 사이로 붉은 눈동자들이 도망치는 원숭이 한 마리 한 마리를 포착해둔 상태였다.
“빌어먹을. 이거 답이 아예 없는 거야? 언제까지고 안쪽으로 갈 수만은 없잖아?”
“누나. 나도 누나가 어떤 심정인지는 알겠는데, 답이 없어. 아무리 화력을 퍼부어도 내 수준에선 씨알도 안 먹힌다고!” 유연화와 이태민이 이를 갈았다.
분명,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고 성장했건만.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질 만큼의 위치에 오르고 또 많은 것을 이루어냈건만.
그 모든 자존감을 한 방에 붕괴시켜버릴 만한 벽을 만나버렸다.
도망갈 곳도.
빠져나갈 틈도 없다.
절망만이 가득한 바로 그 순간.
콰아앙!
수많은 입이 달린 지렁이 앞에 거대한 몽둥이가 작렬했다.
“크아아아!”
과타노차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여의봉이다.
그것도 완전히 개방된 형태의.
“오래 기다렸다.”
제천대성이 자세를 잡았다.
워낙에 강대한 힘을 지닌 탓에, 전력을 다해 싸우려면 몇 가지 제약을 풀어야만 했던 것.
대표적으로,
[한정해금 ‘긴고아’의 억제력이 사라집니다.]
[제한시간은 OH: 9M: 595입니다.]
긴고아.
제천대성을 억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금제 중 하나가 사라졌다.
“그까짓 걸로 감히 나에게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뭐, 방금 한 대 쳐보니까 그럭저럭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릭 헤네시도 그렇고 강진혁이란 인간 놈도 그렇고, 인내심을 시험하는 놈들이 많아졌구나. 그래. 좋다. 어째서 우리가 억겁의 세월 동안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지렁이들 주위로 훨씬 더 크기가 작은 지렁이들이 솟구쳤다.
“영혼까지 새겨주도록 하마.”
[과타노차가 스킬 ‘멸망의 빛’을 발동합니다!]
무수히 많은 빛이 점멸했다.
보라색 화염이 그대로 제천대성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콰콰콰콰쾅!
콰아아앙!
화과산의 심장에 까지 이를 정도의 화력.
방어 수단 자체를 증발시켜버리는 압도적인 폭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투쾅!
제천대성이 움직였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더 큰 여의봉을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쇄도하는 빛줄기들을 튕겨냈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창과 방패의 대결이다.
절망에 빠진 이들조차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장관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쿠웅!
[과타노차가 스킬 ‘예속의 구構)’를 발동합니다!]
보라색으로 만든 정육각형 형태의 장판들이 제천대성을 휘감았다.
1분도 안 되는 찰나에, 공격패턴과 이동패턴을 분석해서 다음에 움직일 곳을 예측한 결과였다.
“후웁!”
꾸구구국!
제천대성의 이마에 힘줄이 솟구쳤다.
근육이 터질 듯이 팽팽해질 정도로 힘을 주었지만, 완벽하게 맞물린 장판들을 부수기엔 역부족이었다.
과타노차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쉽게 풀기 힘들 거다.”
화르륵!
여러 마리의 지렁이들이 한 방향을 바라봤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화염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하나로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초를 거듭할수록 거세지는 온도와 크기.
길게 찢어진 아가리에서 흘러나오는 겁화가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커져라. 여의.”
제천대성의 입에서 언령이 흘러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쿠웅!
여의봉이 늘어난다.
태산과 같은 구속의 끝에 부딪치면서도 주인의 부름에 응답했다.
“하? 쓸데없는 반항을….”
“더욱 커져라.. 쿠쿠콰아아앙!
장판이 조금 밀려났다.
균열이 가며, 무결점의 영역에 이변이 일어났다.
과타노차의 동공이 급속도로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엘더갓들마저도 잡아둘 수 있는 걸 고작 49층의 필멸자 따위가 부수려하다니.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당혹감은 곧 분노로 이어졌다.
화르르륵!
“녹여주마!”
노성과 함께 모여진 불줄기가 쏟아졌다.
청색의 마그마가 구름마저 태워버리며 제천대성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꿀렁이는 액체와 기체 사이로.
“몰아쳐라. 여의.”
파아앙!
원형의 구멍들이 생겼다.
쿠쿠쿠쿠쿠쿠… 콰콰콰콰콰쾅!
“크아아악!”
가장 큰 지렁이의 얼굴이 그대로 날아갔다.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여의봉은 하늘을 뚫고 층계의 끝까지 도달해 있었다.
5개의 눈 중에 하나인 ‘화안금정’, 그리고 제천대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여의봉.
이것이 긴고아의 금제가 해금된 제천대성이다.
“내・・・ 몸을. 감히 내 몸을 망가뜨려!? 이 찢어죽일 원숭이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렸구나.”
과타노차가 욕설을 내뱉었다.
상처는 크지 않다.
다만, 자존심에 난 상처는 꽤나 깊었다.
물론.
공격을 성공시킨 제천대성 역시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니었다.
워낙에 농축된 마그마를 뒤집어 썼기에, 몸 이곳저곳에 제법 심각해 보이는 화상을 입었다.
무리하게 여의봉을 다룬 탓에 호흡 역시 거칠어져 있는 상태였다.
“크하하하! 이제 보니 꼴이 말이 아니군. 하기야 이 몸의 권능에 맞서고도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게 대단한 거지.”
체증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다.
자신의 힘이 압도적이라는 걸 방금 전에 재확인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화과산의 정기가 그대로 제천대성의 몸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상처’가 치유됩니다!]
[‘내기’가 회복됩니다!]
[‘긴고아의 제약’에 대한 해금이 일부 늘어납니다!]
“이 일대는 나의 영역.”
태어나서 자란 세계.
지금까지 지켜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번성해나갈 모두의 영산(靈山)이다.
뺏어볼 테면 얼마든지 덤벼 보거라.”
다시 한 번 완전해진 제천대성이 전의를 불태웠다.
“오오오!”
“대왕 폐하를 따르라!”
“제천대성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사기가 다시 한 번 요동쳤다.
신(申)족은 십이지 중에서도 유일하게 구성원 개개인의 마력을 바칠 수 있는 특징을 가졌다.
의념이 합치되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긴 했으나, 일단 달성만 한다면 집단 전체의 무력을 한 명에게 실어줄 수 있을 터.
극한의 위기에 몰린 순간, 일족의 가호가 자신들의 왕에게 깃들었다.
쿠쿠쿠쿠쿠!
유형화된 마력으로 인해 검게 물든 구름의 색이 변했다.
황금색 스파크가 피어오르며 여명이 싸움의 새로운 시작을 고했다.
“좋았어!”
“헤헤. 반격할 수 있는 계기 정도는 만들 수 있겠는데?”
“결속력 하나는 제일이라고 하더니 결코 허언이 아니었군.”
유연화와 이태민 그리고 메드레이 역시 마음을 다잡았다. 딱.
오싹.
1초라는 시간이 흐르기 전까지는.
“이건….”
제천대성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다른 이들도 하나둘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곳엔.
과타노차와는 차원이 다른 절망의 전조가 보이고 있었다.
[‘그림자 뒤를 관조하는 자’가 현현합니다!]
[‘특수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태고의 권역’이 형성됩니다!]
띠링! 띠링! 띠링!
연이어 울려퍼지는 알람음과 함께.
보랏빛의 장발을 한 두꺼운 털 외투를 걸친 이가 나타났다.
철그럭. 철그럭.
“크르르,”
“커엉! 컹!”
쇠사슬 끝에 묶여 있는 거대한 사냥개들이 미친 듯이 짖어댔다. 노스이디크.
49층에 현현한 가장 강력한 태고의 신격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실망이로군. 과타노차, 고작 여기에 발이 묶여 있던 거였나?”
“노, 노스이디크 님.”
과타노차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50층이라는 성역이 뚫려버릴 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
때문에 노스이디크는 아자토스로부터 직접 전권을 위임받아 이곳에 왔다.
그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자토스의 진언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당연히, 생사여탈권 역시 완벽하게 쥐고 있을 터.
“원숭이 한 마리도 해결하지 못해서야 어떻게 강진혁을 처리할 수 있단 말이냐?”
“그게… 그 영감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과타노차의 변명에, 노스이디크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그러고보니. 원래 그대의 임무는 릭 헤네시를 생포하는 거였지. 그런데, 그 한 가지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해놓고 뭐가 잘났다고 혀를 놀리는 건지 모르겠군.”
임무의 실패에 대한 처벌은 죽음 뿐.
하지만.
“너무 떨지 말거라.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테니.”
노스이디크의 눈동자가 과타노차의 영혼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태고의 존재에 걸맞는 자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라.”
“알겠나이다.”
최후의 동아줄을 붙잡은 과타노차가 고개를 조아렸다.
콰콰콰콰콰콰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숫자의 지렁이들이 지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마력을 아낄 때가 아니다.
상대를 조롱하고 가지고 놀 때는 더더욱 아니고.
전력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 과업을 달성해야만 한다.
미칠 듯이 날뛰기 시작한 과타노차를 막기 위해 제천대성이 다시 한 번 여의봉을 움켜쥐었다.
투콰아앙!
휘두르는 거대한 몽둥이가 과타노차의 머리들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너무 많다.
바닷물을 퍼내는 것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듯.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머리들을 처리하는 것에 의미 따윈 없었다.
무엇보다.
째깍째깍!
긴고아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
만에 하나 과타노차와 동귀어진을 하더라도 그 뒤에 있는 훨씬 더 끔찍한 괴물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
제천대성의 눈에 절망감이 맴돌았다.
***
용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소금 유사.
원래는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들을 지층 아래 가둬서 죽이거나, 먼 곳으로 보내버리기 위한 천연의 함정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조건만 충족한다면 이걸 완전히 역이용할 수 있지.’
그것도 훨씬 더 까다로운 부분까지 컨트롤할 수 있는. 간단히 말해, 49층과 50층을 아우르는 전용 엘리베이터로 만들 수 있었다.
‘2~3회 사용하는 게 고작이긴 하지만, 그걸로 충분해.’
진혁이 지금까지 차곡차곡 준비해둔 것의 결과물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더.
지반을 조금만 더 부드럽게 해주면 효과는 2배가 될 것이다.
[고유능력 ‘어스 퀘이크’가 발동됩니다!]
지면을 구르는 것을 기점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어났다. 쿠쿠쿠쿠쿠쿠쿠!
이어진 것은 거대한 모래의 움직임이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기존의 하이브와 만들고 있던 새로운 하이브는 물론, 갑옷 꿀벌들의 영역 전체가 한꺼번에 빨려들어갔다.
“우와아아!”
“뭐, 뭐야?”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동한다.
자신들이 예측할 수 없는 장소로.
‘가볼까.’
진혁의 머릿속에 승리를 위한 단 하나의 공식이 그려졌다.
그리고 1초 남짓이 흘렀을 무렵.
[유사가 첫 번째 목적지로 인도합니다.]
꽤나 재미난 장소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