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08화
808화. 땅거미 술식의 근원지 (2)
“모기이이이!”
모습을 드러낸 건 고대종 ‘고구마’였다.
쩌렁쩌렁 울려퍼진 포효소리가 무진룡과 진족이 사용한 ‘용들의 운무회’를 거둬냈다.
“너는….”
무진룡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저릿저릿.
용린 속까지 파고드는 심상치 않은 마력.
고대룡들을 몇 번인가 직접 마주한 적이 있긴 했으나, 이건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귀엽고 작은 외모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
저 속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격이 느껴졌으니까.
“왕이시여.”
“저 녀석이 바로 그분들께서 경고했던 서쪽의 용입니다.”
에테리온.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라고 했었지.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군.”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용’을 사냥하는 것에 관해서 만큼은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하물며 상대는 단 하나.
아무리 강력한 고대룡이라고 하더라도 49층의 동쪽을 지배해온 자신들의 적수가 될 순 없었다.
“운명의 차륜(輪)을 사용한다.”
하나의 강자를 상대하는 최적화된 사냥법.
하늘과 땅의 진기를 모아서 영격시키는 진을 구축한다.
“호오.”
진혁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진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로드’의 자리에 오른 고구마의 피어에 어느 정도 겁을 먹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49층에 있는 놈들답게 쉽게 물러서는 법이 없다.
그런데 놈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다.
바로.
[‘용맹의 왕관’이 새로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고구마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지.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한정 스킬 ‘콜 오브 크라운(Call of Crown)’이 발동됩니다!]
[게이트가 오픈 됩니다!]
우우우웅!
좌우로 길게 갈라지는 공간.
그 안에서부터.
“크오오오!”
“그오오오!”
거대한 드래곤들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로드를 지켜라!”
“크하하하! 저 멍청한 것들이 우리 고구마・・・ 아니, 공허룡 에테리온께서 얼마나 강력하신지 모르나보군!”
블랙, 레드, 실버, 블루, 그린, 골드.
동쪽에 무진룡을 비롯한 진족이 버티고 있다면.
서쪽에는 드래곤 로드의 위명 아래 모인 드래곤들이 존재한다.
“왕이시여. 다수의 적들이…!”
“나도 보고 있다!”
무진룡이 새롭게 펼쳐지는 전선을 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 했다.
에테리온 하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인데.
거기에 저 많은 수의 드래곤들까지 신경써야 하다니.
・・・・・・ 그것도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기(氣)를 가진 놈들이었다.
확실히 험난한 싸움이 예상되지만.
괜찮다.
‘광역 섬멸’이 가능한 ‘운명의 차륜’을 발동한다면 아직까지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파츠츠!
파치칙!
사방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무진룡이 직접 검붉은 형태의 돌을 들고 서서히 천공을 부유했다.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옥색 바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차륜으로부터 푸른색 불길이 뿜어졌다.
용신의 여의주와 공명하는 특징을 지닌 운명의 차륜은 공명치가 최대에 이를 경우, 기상개변의 상위 능력이 개화될 수 있었다.
‘기상지배’.
하늘을 지배할 수 있는 용족 특유의 압도적인 권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당연히 공중전이 주무대인 용들의 전쟁에서 기상여건은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될 터. 그런데 바로 그때.
[운명의 차륜이 그 속도를 잃어버립니다!]
[외부의 힘에 의해 약 30%에 해당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순조롭게 돌아가던 바퀴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
무진룡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 운명의 차륜을 다룰 수 있는 건 오롯이 ‘여의주’를 다루는 진족의 수장 뿐.
다른 이들은 그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개입하거나 방해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 이유는 곧바로 밝혀졌다.
“다행히 늦지 않았군.
“진혁 씨!”
말랑흑두루미와 등 위에 올라탄 테레사였다.
여러 군데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건지. 둘 모두 아주 꼬질꼬질하다.
특히나 테레사의 경우에는 원래의 인격과 타락한 인격이 혼재되어 있었다.
“여의주는?”
“충전해왔어요!”
“충전이 뭔가 충전이! 진족의 거점에 있던 영험한 기운을 채워 왔다. 고귀한 이 몸에게 딱 어울리는 것으로 말이지.”
말랑흑두루미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하여간, 여의주를 날름해서 도망친 주제에 끝까지 저놈의 고귀함인지 뭔지는 포기하질 않네.
“청룡! 네놈!”
무진룡이 구름 속에서 등장한 말랑흑두루미와 테레사를 보며 기함했다.
감옥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는데.
설마, 멀리 도망간 것이 아닌 자신들의 거점에 있었을 줄이야.
아니, 어디 그뿐이랴?
진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여의주에 조상들의 정수를 강제로 욱여넣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에이 너무 그리 인상 쓰지 마. 쟤는 그냥 내가 부탁한 걸 했을 뿐이니까.”
진혁이 싱긋 웃었다.
열이 받는 건 이해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당한 놈 쪽 잘못이다.
“고구마를 도와서 저 녀석들을 정리해줘. 절대 뒤를 따라오게 해서는 안 돼.”
“죽이진 않고 제압만 해도 되겠는가?”
말랑흑두루미가 조금 진중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도 한때 몸을 담았던 일족.
해치기 보다는 손속에 사정을 두고 싶은 거겠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둘 사이에 있던 오해를 풀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결정이긴 하지만.
“마음대로 해.”
그 정도 들어줄 수 있다.
잘만 하면 50층 공략에서 겸사겸사 진족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고맙군.”
말랑흑두루미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감사함을 표했다.
콰콰콰콰콰쾅!
콰아아앙!
곧바로 서쪽과 동쪽의 용들 사이에서 거대한 전투가 벌어졌다.
브레스와 브레스가 충돌했고,
각종 용언마법과 진법으로 이루어진 술식들이 격돌했다.
종국에는 거리를 좁힌 용들 사이에 육탄전까지 벌어졌다.
일진일퇴.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치열한 접전 속에서 또 다른 길이 만들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해.’
각자가 맡은 역할을 잘해주고 있는 덕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엘리스와 서리혼령이 고대의 등반자들을 상대해주는 게 가장 컸다. 저 녀석들 하나하나가 일개 거대 세력에 버금가는 힘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서두르자.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근두운이 새로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거리는 문제 되지 않는다.
49층에서 가장 든든한 스포츠카를 손에 넣어뒀으니까.
“가자.”
진혁이 황금빛 구름 위에 몸을 맡겼다.
***
콰앙!
공간을 꿰뚫고 질주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술식의 안쪽까지 파고든 진혁이 최후의 수문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꽤나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바르어비스가 있었다.
“어느 틈에 드래곤들을 전부 부릴 수 있게 된 거지? 분명, 긍지 높은 놈들의 성격상 네놈 같은 자에게 고개를 숙일 리 없을 텐데.”
만약 그게 가능하게 되더라도 훨씬 더 시간이 걸릴 거라 봤다.
일전에 입은 상처를 핑계대거나, 아니면 마력 부족을 이유로 피하거나.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이번 전쟁에 소극적으로 임할 거라 확신했으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저 고집불통들이 내 말은 잘 안 들어도 우리 고구마 말은 잘 듣거든.
그리고 알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철두철미하게 주입식 교육을 받은 고구마는……”
음. 간단히 말해 보고 배운 걸 그대로 실천하는데 재능이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철혈과 같은 위계질서를 확립해버린 것이다.
“이제 방해하는 애들도 다 없어졌는데, 나랑 찐뜩하게 놀아보자고.”
“아니, 미안하지만,”
진혁의 말에 바르어비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 그러자.
츄르르르!
지면을 따라 흩어져 있던 검은 연기들이 모여 하나의 형체를 이뤘다.
“그륵. 그르륵.
“끼루르르르…”
기괴한 음성을 내뱉은 몬스터들이 대량으로 튀어나왔다.
틴달로스의 사냥개들.
정확히는 사냥개 후보군에 올랐으나 탈락해 전투용으로 개조해버린 놈들이었다.
통칭 ‘검은 파리’라 불리며, 50층에서도 성가신 군집체를 이뤘었는데.
상대하기 더럽게 까다로웠던 기억들이 난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알을 까며 증식해대는 특성이 정신 나갈 수준이었다.
여러 개의 눈알을 데굴거리는 털복숭이들을 보자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솟구쳐 올랐다.
‘대체 몇 겹의 대비를 해둔 거냐.’
아자토스의 궁전을 뚫는 것도 아니고.
49층에서 이 정도로 겹겹이 둘러쌓인 방어진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크하하하! 이제야 좀 실감이 나는 것이냐? 네놈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한 건지?”
“그래. 아직 50층에 가기 전이긴 하지만, 다시 한 번 실감이 나긴 하네.”
시련의 탑을 오르면서 쉬운 층계는 없었지만, 50층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극한의 장소였다.
그 당시 뼛속까지 새겨진 감각과 기억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긴장되고 두려웠지.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만전을 기해줬다.
단 한 번 뿐인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
그 누구도 잃지 않고 탑의 정상을 보기 위해서.
부우웅!
날개소리와 함께 다수의 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트리사와 갑옷 꿀벌들이었다.
“보아하니 이 녀석들은 우리가 맡아야 하는 것 같구나.”
“태고의 벌레들…. 그것도 노스이디크로부터 직접 마력을 공급받아 태어난 놈들입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요.”
친위대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늘어놨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49층에서는 최상위에 위치한 포식자들이었으나, 50층에 서식하는 벌레들과의 싸움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물러설 생각은 없어보였다.
자신들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노스이디크의 술책에 당해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아머’ – ‘결전의 시간’이 발동됩니다!]
하이브가 뚫리고 여왕의 알현실에 적이 들어왔을 때만 보이는 형태.
체내의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낸 버서커 모드가 발동되었다.
아트리사 역시 피부 위로 하얀색 외피가 자라나며 거대한 형태로 변했다.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원래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자꾸나. 나의 아이들아!”
[특수 스킬 ‘꿀벌 분진’이 뿌려집니다!]
쏴아아아.
황금빛 가루가 갑옷 꿀벌들 위로 쏟아졌다.
[갑옷 꿀벌들의 모든 능력치가 25%만큼 상승합니다!]
[여왕의 지휘하에 있는 모든 이들의 사기가 100%만큼 상승합니다!]
“우오오오!”
“돌격해라!”
“파리 떼 따위에게 밀려서는 안 된다!”
지휘관급들의 명령하에 새카만 벌떼들이 몰려들었다.
이건 이것대로 꽤나 장관이다.
“다시 한 번 말해볼까? 이제 방해하는 애들도 다 없어졌는데, 단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겨보자고.”
스릉.
진혁이 두 자루의 단검을 꺼냈다.
[고유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칼날을 타고 검붉은 강기가 치솟았다.
능숙하다못해 자연스러운 경지.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퍼스트 블레이드 위로 유려한 곡선이 그려졌다.
“그래봤자. 앞으로 몇 분이다!”
바르어비스가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강한 놈이라고 하더라도 3분 남짓 버티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확실히 여러 태고의 존재들을 쓰러뜨린 진혁이라면 결코 바르어비스 혼자서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싸움에는 시간 제한이 걸려 있는 상황.
특히나.
노스이디크의 그림자를 일부나마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이라면 더욱더.
[‘거점 군주’의 권능이 발현됩니다!]
[‘땅거미의 가호’가 깃듭니다!]
쿠쿠쿠쿠쿠!
검은 손아귀들이 진혁이 있던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지면에 수십 개가 넘는 구멍이 만들어졌다.
바르어비스가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손아귀들이 얽히고설킨 사이에서 진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곳까지 도달해 있었다.
“내 차례야.”
일격에 꿰뚫는다.
그런 생각을 한 진혁이 어깨를 뒤로 젖혔다.
꽈드득!
극한까지 압축된 근육과 최대치로 팽창된 마력이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