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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811화


811화. 전후 처리 그리고 마지막 휴식 (2)

쏴아아아……

부드러운 바람이 나무 사이를 훑고 지나가자 싱그러운 풀내음이 코끝을 가득 찌르…기는 개뿔.

“으스스하네.”

진혁이 주위를 보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현재 모두가 있는 곳은 ‘블랙 캐슬.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의 거점이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장면 자체는 꽤나 장관이긴 했지만, 뱀파이어들이 좋아하는 장소답게 분위기 자체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차가웠다.

가로등이라도 몇 개 놔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엣헴. 역시 집이 최고니라. 아늑하고 고풍스럽고. 정확히 고귀한 짐과 딱 어울리는 곳이지.”

엘리스가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한껏 폈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고성의 주인답게 자부심 역시 하늘을 찔렀다.

“헥헥. 다 차려놨습니다.”

“하루종일 이걸 다 하느라 진짜 죽을 뻔했네.”

“우리는 대체 이곳에 왜 온 거야? 내가 식모도 아니고 젠장.”

“조용히 하게, 이유리 양. 내 누누이 목숨은 하나뿐이라고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일세.” 

마인 협회의 전 회원이었던 멜레나를 비롯해. 검은 까마귀 길드의 김희웅과 민정우 그리고 이유리까지 총동원되었다. 진혁이 49층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있는 동안, 이들은 이곳에 와서 성채의 보수작업에 뼈와 살을 갈아넣고 있었다.

“크르르.”

“크르.”

이유리의 자칼 병사들이 메이드 치마를 두르고 마무리 청소에 박차를 가했다.

일종의 파티.

그동안 고생했으니, 마지막으로 크게 대연회를 열어 피로도 풀고 기존 멤버들 간에 결속을 다지는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현대에서 이 정도 멤버들이 전부 모였다가는 그 자체로 아웃브레이크라 의심받을 테니까.’

진혁이 깨끗해진 성채 내부를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요리만 좀 준비하면 그럴 듯한 연회를 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퍼퍼퍼펑!

퍼어엉!

화려한 폭죽과 함께 대대적인 파티가 시작되었다.

“크하하하! 마셔라 마셔!”

“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마시겠나? 아주 죽어보자고!”

토르와 헤라클레스가 자기 몸집보다 큰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라 마셨다.

벌컥벌컥!

목젖을 열고 그대로 쏟아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무식한 원샷이다.

북유럽과 올림포스.

상남자를 대표하는 두 거물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대단하군. 부상이 심한 걸로 봤다만. 그새 전부 회복한 건가? 역시 자네는 내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전사야.”

“겨우 배에 구멍 몇 개 났던 걸 가지고 엄살을 떨 순 없지. 게다가 전투 후의 술이야말로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약 아니겠는가?”

“크하하! 맞는 말이야. 최전선에서 피와 땀을 흘리는 이들에게만 허용된 영역,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의 진정한 전사가 아니라면 누가 이 짐을 떠맡을 수 있겠나?”

테스테론이 넘쳐흐르는 수컷의 진한 향이 뿜어졌다.

터질 듯이 거대한 근육이 연신 꿈틀대는 건 덤이었다.

“호오. 그 발언은 가볍게 넘길 수가 없겠군. 고작 그 정도 양을 들이킨 걸로 그리 자랑을 해댄 건가?”

한쪽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던 우마왕이 가세했다.

“나 역시 술이라면 밀리지 않네만.”

얼음 호수의 주인, 서리칼날 부족의 카라칼 역시 2m가 넘는 나무잔을 들고 왔다.

그렇게.

연합에 속한, 근육 운동을 좀 했다는 자들은 죄다 이번 술 대결에 달라붙었다.

전투에서 지는 것은 용납해도. 남자의 자존심 대결에서 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다.

“무림을 대표해서는 본좌가 나서야겠군.”

“…아닙니다. 암황께서 나설 필요도 없이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음영대의 대주가 제일이라는 걸 알려… 히끅.. 주도록 하죠.” 

한 잔만으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월영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월영아. 참아라.

딱 봐도 네가 낄 레벨이 아니니까.

“그래도 분위기가 너무 좋네요. 이런 평화는 오랜만이에요.”

테레사 역시 모처럼 맛 좋은 와인과 고기를 음미했다.

편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는 유대감은 서로 다른 층계의 종족을 하나로 묶었다.

뭐, 아주 완벽하게 하나는 아니긴 했지만.

“아하하! 쟤네는 사람이 아니니까 베어도 되는 거지?”

“응응! 요즘 손맛을 느껴본 지 너무 오래됐어!”

한쪽에서는 케이시와 주드로가 낫을 들고 정령수들의 뒤를 쫓고 있는 게 보였다.

“히이익!”

“뭐, 뭐야 쟤들은?”

“그 싸이코 쌍둥이들이잖아?”

선글라스를 끼고 성채 내 연못에서 피서를 즐기던 정령수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 90% 정도는 유대감을 느끼고 있는 걸로 하자.

“모기이이이!”

고구마 역시 숲에서 왕 노릇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후라이드와 하벨리안을 포함한 신수와 환수들과 기존 숲에서 살고 있는 각종 몬스터들까지. 위대한 고대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아둔 마정석을 갖다 바쳤다.

당연히 그 중에는 새롭게 포섭된 드래곤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위대하신 로드시여. 시키는 대로 귀중한 보물들을 가지고 왔긴 하오나, 지난 전쟁으로 인해 피해가 막심합니다. 부디 모든 걸 취하지 마시고 선정을 베풀어주십시오.”

“모기?”

고구마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나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모기이이!”

마정석 더미를 향해 폴짝 뛰어오른 고구마가 닥치는 대로 먹방을 찍기 시작했다.

새로운 로드의 시작은 폭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로 그때.

저벅.

진혁과 엘리스의 곁에 새로운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참 쌓인 이야기들이 많았지.

“드디어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군요. 강진혁 플레이어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이지 감탄이 나오는 전투였어요.”

탑의 상급 관리자며, 동시에 설계자이기도 한 릭 헤네시.

그리고 시련의 탑이 가상현실 게임이었을 때부터 방송 한 켠에서 응원해주던 수리부엉이었다.

“노스이디크를 상대해주셨던 게 많이 컸어요. 삼장법사를 치료해주신 것도 마찬가지고요. 만약 두 분이 없었더라면 패배한 쪽은 저였을 지도 모릅니다.”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다른 방법을 찾아냈을 거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운영자들 쪽은… 어떻게 된 거죠?”

“절 탈출시켜주기 위해 다들 뒤에 남았습니다. 어떻게 됐을지는….”

수리부엉이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생사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놈의 기분이 나쁘다면 모조리 죽였을 거고.

아니더라도 어딘지 모를 심연에 갇혀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을 게 고작이리라.

홀로만 탈출했다는 죄책감이 수리부엉이의 양심을 무겁게 짓눌렀다.

더욱더 50층을 공략해야 할 이유가 추가되었다.

“남자 쪽은 어떻게 된 거죠?”

“제일 큰 문제가 바로 그 부분입니다. 직접 마주해본 결과 예측이 불가능한 데다 정보력과 보유하고 있는 힘 또한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릭 헤네시가 대신 답했다.

탑의 주인이자 이 탑 자체를 설계한 당사자가 저리 말할 정도면 사기적이긴 한가 보다. 어쩌면 아자토스 쪽만큼이나 성가시게 될 수도 있겠는데…… 

“놈의 정체나 목적에 관한 단서는 찾지 못한 건가요?”

“정체는… 지금 당장으로서는 말씀드리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누군지는 알고 있는 눈치지만, 말을 아낀다.

‘일부러 숨기는 이유는 뭐지?

다시 한 번 물으려던 진혁이 질문을 그대로 속으로 삼켰다.

신중한 성격으로 유명한 릭이 회피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

굳이 더 캐물어봐야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진 못할 것이다.

“그럼, 목적은요?”

“아자토스와 함께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아냈습니다. 바로 시련의 탑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 정확히는 ‘금서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 그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에 손을 잡은 것 같더군요.”

금서의 차원?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긴데.

시련의 탑에 관한 정보들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단언코 처음 알았다.

“강진혁 플레이어님도 모르실 만한 이야깁니다. 이건… 사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장막 뒤의 이야기니까요. 확실한 건 절대 놈들이 그곳에 닿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복잡한 진실이 숨어 있나 보네요. 뭐가 됐든, 놈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예. 어떻게든 막아야죠. 그래서 말인데, 사실 굳이 여기에서 보자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라면?”

“혈옥.”

릭 헤네시의 입에서 또 다른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번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엘리스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거기를… 어떻게 알고 있지? 외부자가 알 수 있는 장소가 아닌데?”

“제가 알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건 그 안에 들어가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거죠.”

릭이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루비가 가득 차 있는 모래시계가 나타났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90일이란 소중한 시간이 들어있는.

“여러분도 강해지셔야 합니다.”

타임리미트는 정해져 있고,

그 안에 승률을 올리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놔야 한다.

당연히 그 중에는 개개인의 스펙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

혈옥(血獄).

역대 진조들 사이에서 가장 위험하고 은밀한 것들만 모아둔 장소다.

아자토스의 개인 보물 창고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49층 아래에서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저주받고 위험한 성유물들이 즐비했다. 설령, 엘리스조차도 접근하기를 꺼려할 만큼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것도 존재했다.

철컹!

복잡한 미로를 지나 여러 개의 보안장치를 통과하고.

또옥!

엘리스 본인의 피를 흘려넣고 나서야 비로소 혈옥 내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오….”

“과연, 굉장하네요.”

“와아. 엘리스 씨. 성 안에 이런 곳이 다 있었군요?”

선대 가주들이 그토록 꽁꽁 감춰두고자 했던 곳이건만,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옹기종기 다 들어왔다.

“…선조들을 뵐 낯이 없구나.”

엘리스가 애꿎은 포도주를 연신 들이켰다.

아타락시아의 필수 관광지도 아니고.

이래서야 ‘비밀스러운 성지’라는 이명에 완전히 똥칠을 하게 된 셈이다.

“아아, 저기 보이시는 왕관이 바로 아타락시아의 가주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왕관으로, 덤벙쟁이 엘리스 님께서 잃어버린 걸로 알았는데… 여기

있었네요. 다음은… 어디 보자. 저건 모르겠고, 저것도 처음 보고. 아! 저건 그 피일 거예요! 초대 아타락시아 가주님의!”

심지어 그 와중에 오필리아는 뱀파이어의 역사가 담긴 팸플릿을 판매까지 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진혁 역시 모처럼 소년스러운 감정에 가득 심취한 채 혈옥 내부를 구석구석 살폈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것들 중에는 흥미를 자극할 만한 것들이 가득했다.

어째서 릭 헤네시가 이곳에 꼭 와야 한다는 건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릭 헤네시가 고유성창 설계자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시스템의 제약을 상당 부분 해소하는 권능으로 인해 보유하고 있던 격이 대폭 훼손됩니다!]

[성유물이 간직하고 있는 능력에 변화가 발생합니다!]

[1인당 소유할 수 있는 성유물은 1개로 제한됩니다!]

황금색 이슬비가 쏟아졌다.

우우우웅!

핏빛으로 물든 내부에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분명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는데. 그 저주가 대폭 완화되거나 변질되었다.

“다른 분들에게 필요한 성유물들은 제가 골라드리겠습니다만, 강진혁 플레이어님께서는 본인의 직감을 믿고 직접 골라보시는 걸 추천드리죠. 저 역시도 이곳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 선택을 가능하면 빠르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릭이 꽤나 초췌해진 얼굴로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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