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20화
820화. 모멸의 사원 (1)
[‘모멸의 사원’에 진입하셨습니다!]
[정보 확인 불가.]
[‘탐식의 눈’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계곡이 끝나는 부분에 위치한 불길한 사원.
진혁이 한쪽 눈을 어루만졌다.
대략적인 정보라도 파악을 좀 하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쉽게 가는 건 틀린 모양이다.
‘이 사원은 나도 70%는 모르는 곳이니까.’
하지만, 괜찮다.
괜히 든든한 길잡이를 데리고 온 게 아니거든.
“믿겠습니다. 페시스 씨.”
“예. 후우.”
페시스가 한숨을 내쉬며, 사원의 입구 쪽을 살폈다.
얼핏 봐도 보통 사원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다.
계단 하나의 높이만 해도 2m가 가뿐하게 넘었으니.
마치, 수십 미터 크기의 체구를 가진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건・・・ 피인가요?”
테레사가 계단에 스며 들어 있는 오래된 얼룩들을 가리켰다.
말라비틀어져 있긴 했으나, 저 탁한 색은 피가 틀림없었다.
그것도 태고의 생명체가 아닌… 인간의 것이다.
“제물들을 갖다 바친 흔적입니다.”
진혁이 짧게 답했다.
모멸의 사원.
이곳은 중계지인 동시에, 태고의 존재 중 하나인 ‘슈브니구라스’를 경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
다양한 피와 살점을 탐하는 슈브니구라스긴 했으나,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인간.
공포에 질려 생명을 구걸하는 이들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걸 즐겼다.
그러니 당연히 익숙한 피의 흔적이 많이 보일 수밖에.
“저 안쪽에서 수십 종류의 마력이 모이고 흩어지는 게 느껴집니다. 꽤 깊숙이 있는 것 같은데…. 제 ‘층계부유’도 이 안에서는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더군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진혁과 엘리스 그리고 테레사와 페시스,
그 외에 아트리사를 비롯한 10마리 남짓한 친위대급 갑옷 꿀벌들이 모였다.
대부분은 아직까지 계곡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긴 했지만, 핵심 전력은 고스란히 사원 입구까지 데리고 온 셈이었다.
“들어가 볼까요.’
툭.
진혁이 대검을 꺼냈다.
‘긍휼의 검’.
카알루트로부터 얻은 대검이 뽑히자, 사원 입구에 펼쳐져 있던 음산한 안개들이 모조리 빨려들어갔다.
마치, 포식을 하는 것처럼.
검에 달린 이빨들이 연신 갉작이며 연기를 뜯어먹었다.
[‘증오의 표식’이 해제됩니다.]
[‘상태 이상’에 걸릴 확률이 80%만큼 감소합니다]
역시나.
동족이 펼쳐둔 저주를 걷어내는 덴 태고의 성유물만 한 게 없다.
‘요긴하게 쓸 거라곤 알았지만, 기대 이상이네.’
조금 큰 것만 빼면 아주 완벽하다.
손에 감기는 감각도 마음에 들고,
폴짝.
진혁이 단숨에 계단 3개를 뛰어올랐다.
“뭐 하세요? 다들 따라오세요.”
피로 물든 계단을 따라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마침내 안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모습을 보였다.
각종 룬어들이 새겨진 정사각형 형태의 출입문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사원인데. 문 하나 없이 뻥 뚫려있는 게 조금 의뭉스럽다.
하기야,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곳에 쳐들어올 수 있는 자도 없긴 할 테지만 말이다.
“잠깐!”
움찔하고.
페시스가 황급히 손을 뻗었다.
모두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감이 안 좋다는 건가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통로 안에서 구조 자체가 변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보통 미궁이나 유적의 특성상… 별로 좋지 않은 징조예요.”
다른 이가 했다면 어깨나 몇 번 토닥여줬을 일이었으나, 상대는 다름 아닌 최고의 길잡이 페시스.
그가 감이 안 좋다는 건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훌륭하구나.”
목소리가 울려퍼진 건 바로 그때였다.
공기가 얼어붙고, 시간이 멈춘다.
1초가 1,000년이라도 되는 듯. 늘어지며 호흡을 하는 것마저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
“…..!!”
불길하고 흉흉함의 척도가 존재한다면…
아마 이 목소리의 주인은 가장 끝에 위치한 자들 중 하나일 것이다.
모를 리가 없겠지.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슈브니구라스.”
진혁이 천천히 그 이름을 곱씹었다.
차가운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한 슈브니구라스가 입구 부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예전부터 우리가 하는 일이라면 득달같이 달려와 방해하더니 결국엔 이곳까지 왔구나. 내 사원마저 망칠 생각이더냐?”
“관리가 제대로 안 돼서 청소라도 좀 해줄까 하고 온 것뿐이야.”
이곳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위한 사원.
따라서 본신이 아닌 분신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저릿저릿.
팔다리의 감각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진짜 적응이 되질 않네. 최고위급 신격들은.’
예전에 탑을 올랐을 때였으면, 50층에서 슈브니구라스의 분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게임이 오버되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만 했겠지.
그러나.
‘해볼 만해.’
쿠쿠쿠쿠쿠쿠쿠!
온갖 기연을 독식하며 올라온 지금은 다르다. 등반 기간 자체는 훨씬 더 짧았지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격을 갖추어 놨으니까.
자신의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진혁을 보며, 슈브니구라스가 피식 웃었다.
“다른 층계들은 제법 잘 막고 있더군. 솔직히 말해 조금은 놀랐다. 1시간 안에 모든 전쟁이 끝날 거라 생각했으니까.”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그럴 만한 전력 차이기도 했고.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이 꽤나 묘하게 흘러갔다.
엄청난 준비를 해뒀는지. 어느 곳 하나 쉽게 뚫리지가 않는다.
허나.
그리 모든 전력을 투입해 각 층계를 지키는 데 사용해버렸다면.
“모두의 고향을 지키느라 고생하고 있는 그대에겐 돌아가야 할 땅이 없어질 것이다.”
우우우웅!
[차원 거울이 연결됩니다!]
슈브니구라스의 손짓과 함께 거대한 거울이 나타났다.
외부의 공간을 보여주는 아이템.
정확히는, 너무나 익숙한 ‘현대’를 실시간으로 비추고 있는 중이었다.
“메에에에!”
“크에에에!”
검은 염소와 양들이 열린 게이트를 통해 꾸역꾸역 쏟아졌다.
급속도로 성장시키고 강화시킨 각 층계의 정예들도 박살이 나고 있는데.
주력 멤버들이 전부 사려져버린 지금의 7대 길드가 태고의 습격을 막는다?
명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문장이다.
농담도 이 정도면 질이 너무 낮은 수준.
그래.
만약, 슈브니구라스가 예측한 대로 현대의 전력만 있었다면 현대는 돌아갈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역시 서울 쪽을 노리는군.”
“놈들 입장에서는 여기가 가장 성가실 테니까요.”
“누나! 방어 타워 배치 전부 끝났어!”
유천영과 유연화 그리고 이태민이 전투를 준비했다.
“인형 놀이를 시작할게 응.”
프레이가 두 개의 단창을 높게 들어올리며 불사의 인형들에 대한 지휘를 맡았고.
“달그락! 한강 남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티본을 비롯한 데스나이트들은 올림픽 대로를 타고 빠르게 움직였다.
“모기이이!”
“미요오오!”
하늘에서는 고구마와 후라이드가 비행을 하며 브레스를 끌어모았다.
“우리도 있다구!”
“염소 고기는 못 참지.”
“으음 저건 먹으면 배탈날걸?”
“그래그래 차라리 나중에 주인한테 맛있는 마정석이나 실컷 달라고 하자!”
“다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정령수들 역시 적재적소에 포진한 채 첫 번째로 나타나는 게이트에 화력을 집중했다.
“과연, 이쪽까지도 대비해뒀다는 건가.”
슈브니구라스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전원이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소속된 핵심 전력들.
꽤나 선별한 병력들을 보냈다곤 하지만, 저 정도의 구성이라면 서울을 함락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될 거다.
“허면, 이 다음에 벌어질 일은 어떻게 대응할 셈인지 궁금하구나. 아무리 너라도 동족들을 버려두고 네 목적만을 달성할 수 있을까? 뭐, 그건 그것대로 재밌긴 하겠다만.”
“무슨 말이지?”
의미심장한 말에, 진혁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잠시만 기다려보거라. 곧 알게 될 테니.”
슈브니구라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
시련의 탑 밖에 있는 현대에서는 몇 주째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50층 공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메시지가 담고 있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빌어먹게 답답하군.”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말이에요.”
“시간도 마냥 많이 남아있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저희 쪽에서는 50층에 갈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없으니까요.”
회의장 안에서는 새롭게 대형 길드의 주축이 된 남녀가 모여 있었다.
과거 랭크로 따지면 기껏해야 AA급.
가장 강한 이조차도 S급에 간신히 걸쳐 있는 수준이었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이라는 집단이 50층에 진입한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 이상 어떠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마냥 기다리는 것뿐.
그게 남아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바로 그때.
“…..제가 제안한 것에 대해서는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긴 머리카락이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금발의 외국인 ‘바실리사.
신생 길드인 ‘레티나 블레이즈’를 이끄는 랭커로 3년 차이긴 하지만, AAA급에 오른 강자였다.
“그것・・・ 말씀인가요?”
“흐음….”
“ …….”
바실리사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두둑.
바실리사가 아공간에서 보따리를 꺼냈다.
마법 주문을 외우자, 보따리가 벌어지며 안에 있던 황금색 보석들이 쏟아졌다.
[태양의 신석(神石)]
입수난이도: 측정불가
내용: 최후의 전장으로 이동하게 만들어주는 공간 이동형 아이템으로 사용 시 사용자에게 각자 랜덤한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력과 특수 스탯 ‘용사의 의지’가 추가로 부여되며, 이를 사용한 자들의 업적은 영원히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만, 50층에 관한 정보는 전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걸 통해 그곳에 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요.”
당연한 말이지만, 결과는 허탕. 시련의 탑이 후반부에 접어듦에 따라, 세계 각지의 정보부와 첩보부에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탑의 마지막 층계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다.
‘태고의 신격’들이 지배한다는 것과 몇몇 거점의 이름 정도만 알아냈을 뿐.
공략 조건이 무엇인지. 지형은 어떤지. 어떤 생태계로 이루어져 있는지. 미궁이나 유적 던전의 개수는 몇 개나 되는지.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지금 전력만으로는 어지간한 상층부의 유적 하나를 공략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하물며 마지막 층계에 도전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리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실리사가 또 다른 아이템을 꺼냈다.
“그걸 위해서 제가 상단의 ‘매버릭’ 씨를 통해 안전책을 추가로 가져왔어요.’
[‘아파치 토템]
입수난이도: 측정불가
하나를 랜덤으로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내용: 한 층계의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이동이 가능합니다. 또한 행운 스탯을 일시적으로 +80포인트 올려주어 50층 공략에 필요한 핵심 아이템 중
행운을 끌어올려주는 특수 아이템.
즉, 이 토템만 있다면 50층으로는 가되, 가장 안전한 안전지대로 이동해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걸 사용한다면 ‘태양의 신석’이 보장하는 성유물과 아이템들 중 가장 좋은 걸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결국엔 인류가 멸망합니다.”
이 이상의 조건은 없다.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