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26화
826화. 7개의 왕관 그리고 개문(開門).
흠칫하고.
진혁과 눈을 마주친 이들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상대는 감히 자신들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괴물. 전원이 덤비더라도 손끝 하나 다치게 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다. 더군다나 여기는 50층에 위치한 미궁 아닌가?
만에 하나 전원을 죽여 살인멸구 하더라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왜, 왜 그런 눈을 하시는 거죠? 대가를 원하시는 건가요? 우리를 구해줬으니까?”
“이미 우리는 가지고 있는 걸 다 드렸어요. 더 이상은 드릴 게 없습니다.”
“혹시나 정보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뇨.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인류를 배신한 극악무도한 놈이 한 명이 아니라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배신자가 또 있다는 말입니까?”
“우, 우린 매버릭과 관련되지 않았습니다!”
“저도요!”
“나도 아니오!”
결백함을 호소하는 얼굴들.
그래 뭐, 자진해서 ‘내가 범인이다’라며 나서는 놈은 없겠지.
실제 인류를 배신했었다고 하더라도 매버릭이 개박살나는 꼴을 보고 슬며시 다시 편을 바꾸려는 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떡하냐?
‘순순히 놔줄 생각이 1도 없는데.’
준비 기간 동안 여러 미궁과 유적들을 다니면서 잃어버린 언어에 대한 단서들을 모았다. 실제로 일부 복원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고.
하지만, 아직까지 만족할 만큼의 수준에 도달하진 못 했다.
애초에 49층까지 존재하는 정보들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50층에 올라와 구석구석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 생각했는데.
이런 꿀 같은 기회가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퀘스트를 완벽하게 성공시켜야만 한다.
– 그들을 골라서 처리할 경우 기존 보상 외에 추가적인 보상을 획득할 수 있게 됩니다. 단,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참신할수록 얻을 수 있는 보상의 정도가 달라집니다.(서브).
시스템이 제정신이 아닌 건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 거기에 어울려주려면 같은 광인(人)이 되어줘야겠지.
진혁이 코인거래소에서 산 외눈 안대를 꼈다.
무기는 긍휼의 검과 발뭉 대신, 케이시와 주드로에게서 빌려온 전투용 망치가 쥐어져 있었다.
“마구니가 보이는군.”
“예?”
“그대는 마구니인가?”
근엄하고 진중하게.
목소리를 잔뜩 까는 게 포인트다.
예전이었으면 손발이 오그라들긴 했겠지만, 이 짓도 하도 반복하다 보니 슬슬 즐기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처음 천수천안관음과 겨울왕국 ost 틀어놓고 금발의 여주인공 연기를 했을 때를 비교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다.
“그대는 마구니냐고 물었다!”
“그, 그게 뭔지 모르지만, 저는 아닙니다.”
백인 남자가 목이 부러져라 격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탐식의 눈’이 대상의 말이 ‘진실’임을 간파합니다.]
쳇.
마구니가 아니다.
바로 그때.
“코, 콜록.”
뒤쪽에서 누군가 기척을 내었다.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콰앙!
진혁이 자리를 박차고 움직였다.
그곳엔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한 라틴계 여자가 서 있었다.
“히끅?”
“그대가 마구니인가?”
“아, 아니에요. 전・・・ 전부 사람들을 살리고자 이곳에 왔어요.”
타이탄 길드에 소속된 텔라루시아였다.
흐음.
배심원단이 있다면 전부 같은 판결을 내릴 것 같은 순수하고 티끌 없는 목소리다.
거기에 사슴 같은 눈망울에 가녀린 어깨가 떨리는 걸 보니 확실히……
[‘탐식의 눈’이 대상의 말이 ‘거짓’임을 간파합니다.]
…………마구니가 틀림없구나!
콰아앙!
여자의 머리가 뒤로 돌아갔다.
손속에 사정을 둬서 죽이지는 않았지만, 옥수수가 모조리 나오는 걸 보니 평생 고기 뜯는 것은 포기해야할 듯싶었다.
“자, 다음.”
마구니냐 아니냐.
소명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 일방적인 재판 시간이 찾아왔다.
진혁의 미륵안이 번쩍였다.
그렇게 매버릭과 함께 했던 배신자의 색출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서브’ 조건을 완벽하게 달성했습니다!]
[‘태고의 강화석 10개’와 ‘잃어버린 언어’에 대한 추가 단서를 습득합니다!]
후두둑.
기묘한 광택을 내는 광석들이 진혁의 손에 떨어졌다.
거기에 네크로노미콘에서 은은한 녹색 빛이 뿜어지며, 해석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다.
이걸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고마워요.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게 해주셔서.”
바실리사가 공격대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 누구보다 매버릭의 배신으로 인해 상처가 깊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희생과 고통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별말씀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예. 철저하게 함구하도록 할게요.”
정체를 숨기려 하는 영웅.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바실리사는 묻고 싶었으나, 이내 입술을 꼭 다물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어 보이는 진혁의 얼굴을 보며, 질문해봤자 돌아올 답변이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바실리사가 공격대에게 돌아갔다.
“이 녀석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엘리스가 투영화 된 이들을 가리켰다.
어찌 보면 시한 폭탄 같은 존재들이다.
막강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그걸 절제하거나 대의를 위해 사용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오롯이 본인의 원초적인 욕망과 본능을 위해서 움직이기에 그만큼 많은 변수가 생겨날 것이다.
“걱정 마. 매버릭의 능력으로 불러낸 거라 쉽게 이 사원 밖으로 나가진 못할 거거든.”
그러니 오히려 좋다.
애써 확보한 이 거점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냥개들을 확보한 셈이었으니까.
진혁이 세 명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이건 무엇이냐?”
투영된 엘리스가 물었다.
“계약서야. 50층 공략 시점까지 날 돕는다면, 너희가 이 사원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줄게.”
“호오. 그런 게 가능하다고? 타인이 한 고유성창의 계약을 깨뜨리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아까 내가 한 거 못 봤어? 그거야말로 내 특기야.”
“하긴, 그대라면 충분히 가능해 보이긴 하구나.”
“저 역시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만・・・ 얻을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동의! 자유! 좋아!”
나머지 녀석들도 계약에 응했다.
그것으로,
사원 공략이 완전히 끝을 고했다.
***
‘응징자의 신벌’이 무효가 됨에 따라 각 계층에 현현했던 태고의 존재들이 그대로 고립되었다.
마력의 공급이 끊겼기에 전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상태.
고지를 눈앞에 두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
결국. 피해를 감수한 채 자력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크하하하! 다들 고생이 많았어. 제법이구만.”
“태고의 존재들을 막다니! 이건 우리 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일세.”
“그래도 피해가 적진 않아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사상자의 숫자가 얼마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도 벅차니까요.”
“만약, 진혁 님께서 빠르게 움직여주지 않으셨다면 정말로 전멸할 뻔했습니다.”
기쁨과 안도 그리고 염려와 걱정이 뒤섞인 반응이 이어졌다.
태고의 존재들과의 첫 번째 전쟁을 치른 소감은 각양각색일 수밖에.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도 존재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다.
압도적인 존재들 앞에서 느낀 절망과 공포는 수많은 병사들에게 뼛속까지 각인되어 버린 탓이다.
‘죽은 사람보다 미쳐버린 사람이 몇 배는 많다고 할 정도니까.’
진혁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태고의 존재들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했어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제대로 어필한 셈이리라. 그나저나.
이제 본격적으로 50층으로 병력을 보내야 한다.
‘나야 틈새 유적이라는 샛길을 통해 가긴 했지만, 거긴 정식 루트가 아니야.’
일종의 편법.
당연히, 그에 따른 페널티가 존재했다.
태고의 존재들과 조우했을 경우 정신적인 충격을 평소보다 30%가량 더 크게 받게 되는 것이다. 가뜩이나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굳이 그런 악조건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 이유는 없겠지. 최대한 빨리 왕관들을 통해 정식 문을 개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벅.
진혁의 곁으로 이질적이면서 뜨거운 겁화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 녀석도 여기에 와 있던 건가.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동시에, 본격적으로 탑의 마지막 층계에 다 왔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엘더갓 ‘오즈탈룬’
아름다운 남성의 모습을 한 황금 화염의 군주였다.
“슈브니구라스가 아끼는 사원을 점령했다고 들었다. 그토록 호전적인 갑옷 꿀벌들과도 동맹을 맺었다지?”
“타이밍이 운 좋게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죠. 저보다는 엘더갓 분들의 지원이 이 싸움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저층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엘더갓들의 지원 덕분.
이 녀석들 역시 속이 시커먼 건 똑같았으나,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하하호호 해줘야 할 상대라는 뜻이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거대한 악을 몰아내는 데 힘을 하나로 모아야만 하니까.”
웃기네.
이쪽에서 보면 너희나 걔네나 도긴개긴이다.
그보다 이렇게 밑밥을 잔뜩 까는 걸 보니 뭔가 바라는 게 있나 본데.
“사실… 나 역시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만. 괜찮겠는가?”
역시나 세상에 공짜라는 게 없는 법이다.
“말씀하시죠.”
“자네가 가지고 있는 네크로노미콘을 통해 장소 하나만 알려주게.”
・・・장소라고?
당연히 더 까다롭고 엄청난 걸 요구할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의외네.
그렇기에 궁금했다.
저 자존심 강한 엘더갓께서 대체 어디를 알아내고 싶길래 저자세로 나오는지에 대해서.
“어딥니까, 거기가?”
“흐음. 우리들 사이에선 ‘공허의 안식처’라 불리는 곳이네. 정확히는 그곳에서 마력이 빨려나가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거길 찾아줬으면 해.”
공허의 안식처라면…….
알고 있는 이름이다.
7개의 성단이 교차하는 곳에 있는 황무지.
하지만, 거긴 특별한 게 없을 텐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은 지형이라는 것 외엔 밝혀진 게 많이 없었다. 영양가가 없다는 이유로 아우터 갓들 역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런데.
거길 원하다니.
여러 가정들로 인해 진혁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도록 하죠.”
50층에서 가야 할 곳이 하나 정도 더 는 것 같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시점.
엄청난 숫자의 연합군이 집결해 있는 장소 앞에 진혁이 섰다.
각 계층에서 온 수십만의 전사들과 대영웅 그리고 신격들이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개문(開門)의 의식이 시작됩니다!]
쿠쿠쿠쿠쿠쿠쿠!
시련의 탑을 뒤흔들 단 한 번뿐인 이벤트가 발생했다.
[‘용맹스러운 자’를 위한 나팔이 첫 번째 위대한 시작을 알릴지니.]
우우웅!
고구마의 머리에 있는 용맹의 왕관이 빛났다.
“위대한 로드. 단 하나뿐인 고대룡들의 왕이시다!”
“공허룡 에테리온을 위하여!”
드래곤들이 길게 포효성을 내질렀다.
탑의 절대자를 상징하는 일곱 개의 왕관.
그중에 하나를 차지한 당당한 주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고결하고 신성한 자’가 다른 모든 이들을 굽어살피며 그 뒤를 따를 것이다.]
화르륵!
새하얀 깃털들이 밝게 쏟아지는 별빛 아래 흐드러졌다.
“에덴과… 가장 아름다운 성녀의 행보를 축원하겠나이다.”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신념과 굴하지 않는 믿음을 주소서.”
천사들이 테레사의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신성의 왕관을 쓴 테레사가 검과 방패를 당당하게 들어올렸다.
[‘붉고 고귀한 밤의 주인’은 해가 없는 시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요.]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순혈의 여제를 따르겠나이다!”
또옥. 또옥.
“훗.”
붉은 핏방울들이 모이며 ‘개벽의 계시록’을 발동한 엘리스가 모두의 앞에 나섰다.
완전히 전성기에 접어든 위풍당당한 진조의 걸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모두를 압도했다.
[‘타협하지 않는 패왕’은 몰아치는 폭풍으로부터 길을 만들어내리라.]
“천마재림. 만마앙복!”
“모든 신도들은 지존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오!”
무림의 절대자이며,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늘.
천마가 패도의 왕관을 쓴 채,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연합의 사기를 올리고 왕관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내린 결정으로 진혁은 7개의 왕관을 7명에게 나눠서 배정했다. 패도의 왕관은 기존에 주인이었던 천마에게 돌아갔다.
[‘가장 빠른 질풍’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동료들을 구할지니.]
본래라면 천유성이 맡아줬어야 할 왕관.
괜히 그 자리가 유독 커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화과산의 주인께서 함께 하신다!”
“출병이다! 전사들은 하늘이 떠나갈 때까지 북을 쳐라!”
제천대성의 금고아 위로 ‘신속의 왕관’이 빛났다.
[가장 큰 절망을 짊어졌사오니 모두 두려워 말라.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게 된다면……]
“달그락!”
‘절망의 왕관’을 쓴 티본이 휘하의 데스나이트들을 이끌며 움직였다.
“뼈의 군주시여!”
“피와 저주와 시체를!”
베이로둠과 펜다리엘을 비롯한 저주받은 언데드들이 티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포기하지 않는 명예로운 자는 모든 이들을 탑의 정상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명예의 월계수’를 쓴 진혁이 가장 중앙에 섰다.
왕관들의 주인들이 진혁의 곁을 보필하며, 일그러지는 허공을 바라봤다.
[50층의 정식 입구 ‘도전자들의 길’이 개방됩니다!]
남은 시간은 약 50일.
최후의 싸움을 알리는 주사위가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