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27화
827화. 칼날의 끝 위에서 (1)
[척후 300명 연락 두절, 우측을 맡은 헤라클레스 쪽에서도 고전 중이라고 합니다!]
[‘안개숲’에 들어갔던 발키리들이 방금 귀환했는데, 절반이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듣기로는 알 수 없는 소리에 이끌려서 뿔뿔이 흩어졌다고.]
[보급을 맡은 제13 부대가 그레이트 올드 원과 조우했습니다! 정신 붕괴로 광인이 되어버려 전멸. 생존자는 없습니다.]
[쇼거스 군단이 움직입니다! 지시를……!]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급보.
공격대의 전투에서는 개개인의 역량이 중요하다면. 이런 식으로 수십만 대군이 펼치는 전쟁은 모든 것을 아울러 보는 ‘시야’가 중요했다. 단순히 한 명의 전투 능력을 넘어서 유기적으로 집단을 관리하고 지시하는 게 핵심이라는 뜻이다.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엘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름 아타락시아를 이끌며 여러 전쟁에서 승리해온 그녀였으나, 전 층계의 연합군을 이끄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하물며 이곳은 50층.
지금까지 싸웠던 장소와는 궤를 달리하는 극한의 험지다.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 초입을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아요.”
테레사 역시 한 마디 거들었다.
적들은 전체 전력의 1%도 채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이쪽은 전력을 다 부딪치고 있음에도 던전 하나 미궁 하나를 정복하는 게 고작이다. 아우터 갓들은커녕 네임드급 보스를 사냥하는 것도 벅찬 게 현실이란 말이다.
“팽창하는 고원으로 가는 길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가는 길 자체를 찾는 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팽창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전부 죽을 거예요.”
진혁의 질문에, 페시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빌어먹을. 하여간 쉽게 풀리는 일이 없다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오긴 했지만, 막상 들어오니 변수가 너무나 많이 발생했다.
‘이상하긴 해.’
분명, 예전보다 강해지고 더 많은 준비를 하고 왔는데.
난이도가 훨씬 더 올라갔다.
그것도 가려고 하는 곳만 귀신같이 골라서.
・・・・・ 간파당하고 있어.
이쪽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하듯 적들의 대응이 완벽에 가까웠다.
역시….
필요하다.
최후의 왕관인 ‘봉인의 왕관’이
대체품이 아닌 제대로 된 왕관들의 결속이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이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봉인의 왕관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 선수를 쳐서 봉인의 왕관의 흔적 자체를 없애버렸다.
‘어쩔 수 없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진혁이 모멸의 사원에서 플레이어들에게 얻은 아이템들을 꺼냈다.
후두둑.
[‘검은 산양의 뿔’을 소모합니다.]
[‘공허의 아균체’를 소모합니다.]
[‘기어가는 혼돈의 파편’을 소모합니다.]
[・・・・・・소모합니다.]
[고유성창 ‘엔터렌스 투 더 발할라’-‘죽은 자의 강제 소생’이 발동됩니다!]
이 고유성창은 부활하기 까다로울수록 더 많은 대가가 요구된다.
‘그 녀석을 불러오려면 단순히 마력 외에도 그 이상의 것을 바쳐야겠지.’ 조금 아깝긴 한데.
봉인의 왕관을 찾기 위해서는 이 이상 적합한 인물은 없으리라.
[‘대상’이 소환됩니다!]
진혁의 앞에 빛무리가 쏟아졌다.
***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났다.
강진혁이라면 반드시 시련의 탑을 구원하고 이 세계의 균형을 수호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영원한 안식.
그래. 마침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안히 쉴 수 있게 된 것이…
“응?”
하스팅의 입에서 이상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강제로 단잠에서 자신을 깨워버린 것이다.
“이야,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아니. 죽은 애한테 잘 지냈었냐는 말은 조금 실례이려나.”
“이건… 설마, 날 다시 되살린 겁니까?”
“맞아.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부탁도 좀 해야 하고 해서. 계약을 좀 맺어줬으면 좋겠어.”
오랜 세월 상급 관리자로서 살아온 경험.
거기에 ‘부분 회귀’를 거듭하며 수많은 전략과 전술을 습득한 하스팅이라면….
왕관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주요 참모로서 충분한 활약을 해줄 것이다.
‘쉬는 거야 알 바 아니고.’
지금 집안이 활활 불타고 있는데, 혼자서 꿀 빠는 게 말이 된다는 소리냐?
죽을 땐 죽더라도 와서 급한 불은 끄고 죽는 게 상급 관리자로서의 상도덕이다.
“아, 계약 조건을 말해줘야 하는데 어디 보자. 이야. 마침 당신의 소망이 탑의 평화네. 그거야 날 도우면 자연스레 이뤄질 테니, 무보수로 일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당신은 하나도 변하질 않았군요. 아니, 그때보다 더 능청스럽고 뻔뻔하게 변했습니다. 낯짝에 칼을 찔러도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다고 해야 하나요.”
하스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칭찬 고마워. 그래서 도와줄 거야?”
이미, 고유성창의 효과로 인해 하스팅에게 진혁이 원하는 것이 주입된 상태였다.
그리고 하스팅은…
“태고의 존재들로부터 탑을 수호할 수 있는, 그런 위대한 등반자를 돕는 것이야말로 제가 바라던 것. ‘봉인의 왕관’을 찾는 데 협력하겠습니다.”
정식으로 진혁과의 계약을 받아들였다.
혹시라도 자신은 이미 마음이 떠버렸다느니, 플레이어의 일은 플레이어가 알아서 해야한다느니 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 하스팅이 탑을 아끼는 마음은 생각 이상으로 무거웠다.
“이 정도 전력을 모아서 50층에 왔다는 건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 짧은 기간 내에 준비하려면 여간 힘들었던 게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맞아. 하지만, 봉인의 왕관을 확보하는 건 실패했어. 나름대로 찾아보려고 했는데, 어디 있는지 통 모르겠더라고.”
40층 대에 있는 유적에 ‘봉인’되어 있거나, 혹은 신격이나 고대의 등반자 중 하나가 가지고 있거나.
봉인의 왕관은 크게 보아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에서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찾아본 바로는 두 개 모두 꽝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겨둔 것처럼.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페시스에게 부탁해도 마찬가지였지. 손을 써도 아주 제대로 써놨어.’
왠지 모르게 하스팅이라면 마지막 왕관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목적을 이루겠다는 집념 하나만큼은 천유성에게도 밀리지 않았으니까.
“왕관⋯⋯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릴 순 있습니다.”
“역시!”
“너무 좋아하지만은 마세요. 봉인의 왕관을 가지려면 당신은 아주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할 테니까요.’
순간, 하스팅의 표정에 약간의 그늘이 드리웠다.
“그게 무슨 뜻이지?”
진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기에.
하스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봉인의 왕관은 당신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거의 처음부터 계속해서 함께하고 있었다.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타락한 회랑에 갇혀 있던 진조의 몸속에.
그리고.
“당신의 ‘피’가 그 왕관을 꺼낼 열쇠입니다. 물론, 당신의 피는 달콤한 극독과도 같은 것이기에, 뱀파이어가 과하게 흡혈하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겠죠.”
충격적인 발언.
누군가의 장난질에 의해서. 왕관과 열쇠라는 굴레에 얽매였다.
‘엘리스나 뱀파이어들이 계속해서 내 피를 원했던 것도 그와 관련되었던 건가. 봉인의 왕관을 손에 넣으려면 뱀파이어들이 무너지게끔 하게 하려고.’
남자…라는 놈이 설마 여기까지 내다보고 판을 짰다니.
대체 언제부터 무슨 짓을 해서 이런 일을 설계하는 게 가능했다는 거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탑의 정복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그 필요를 위해서는 한쪽이 희생을 해야 하는 잔혹한 운명적 선택을 해야만 했으니까.
***
50층의 공략 조건은 다른 층계와는 차원이 달랐다.
슈브니구라스, 요그소토스, 니알라토텝, 노스이디크, 우보 사틀라. 디엔드라 등.
최상위 아우터갓들이 가진 ‘근원의 성유물들을 전부 손에 넣거나.
혹은.
아자토스의 궁전 안. 그것도 가장 깊숙한 내실 안에 있는 ‘최초의 혼돈’을 손에 넣거나.
대표적으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다시 말해. 물론, 아자토스를 쓰러뜨린다거나 봉인시키는 것도 공략 조건 중 하나긴 했으나 워낙에 현실성이 없었기에 논외로 쳤다.
연합이 노릴 수 있는 건 2가지 중 하나를 취하는 것뿐.
“당연히 그에 맞춰서 움직이겠지.”
슈브니구라스가 옥좌에 앉은 채 연신 손가락을 튕겼다.
“메에에.”
“크르르….
검은 산양을 비롯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그림자들이 으르렁거렸다.
“천년에 한 번 꼴이긴 합니다만, 간혹 등반자들이 이곳에 올 때면 비슷한 방식으로 도전을 하곤 했죠.”
툴챠가 과거를 곱씹었다.
애초에 50층에 도전하는 멍청한 놈들은 전무하다시피 하긴 했으나, 예외란 존재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래. 미물들 나름대로는 최선이라는 길을 골라서 왔다. 한결같이 매번 같은 루트로 말이다.”
읽기 쉽고. 그렇기에 대처하기도 쉽다.
고인물 코퍼레이션과 각 계층의 연합 역시도 전력 자체는 더 거대하긴 했으나 큰 틀에서 벗어나진 못 했으니까.
하지만.
변했다.
정확히는 강진혁이라는 지휘관 외에 또 다른 유능한 지휘관이 합류하여 전체적인 군세의 흐름을 읽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꽤나 성가시구나.”
50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면서. 수많은 경험과 정보들을 가지고 있는 자가 틀림없었다.
“찾아내서 제거하겠습니다.”
툴챠가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몸을 독무로 바꾸어 사라졌다.
슈브니구라스가 옥좌에 몸을 푹 묻었다.
“그럼, 이제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볼까.”
겁대가리 없이 50층에 온 놈들을 전멸시키는 건 어차피 시간 문제. 어디까지나 ‘유희’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보다 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릭 헤네시.
탑의 설계자를 통해 다른 차원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단순히 시련의 탑이라는 국한된 장소가 아닌, 무궁무진한 영역에 자신들의 힘을 퍼뜨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단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염원을 이뤄야만 한다.
“니알라토.”
“예.”
“지난번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릭헤네시를 잡아올 수 있겠느냐?”
“맡겨만 주십시오. 반드시 산채로 데려와 무릎을 꿇리겠습니다.”
“실수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번만큼은, 아자토스께서 각별히 신경 쓰고 있는 일이니까.”
슈브니구라스가 특히 마지막을 힘주어 말했다.
따라서 이건 경고다.
실패했다간….
단순히 문책 정도로 끝나게 되지 않을 거라는.
“…릭 헤네시는 현재 연합과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놈도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을 터. 모종의 대책을 세워뒀을 게 틀림없겠죠.”
“필요한 건 뭐든지 제공하지. 병력이든, 신격이든, 성유물이든 말만 하거라.”
“감사합니다.”
“아, 혹시 또 그 성가신 인간 놈이 방해할 수도 있겠구나.”
방해꾼이 끼어들게 내버려둬서도 안 된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거.
50층의 전력 차가 어느 정도인지 한 번 맛보여 줄 필요가 있겠지.
이번에는 사원을 공략해서 태고의 군세를 멈추게 할 생각 따윈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슈브니구라스가 특수 스킬 ‘검은 산양들의 영역’을 발동합니다!]
[고유무장 10개의 성유물’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저장되어 있던 제물 365,286,452마리의 마력이 흡수됩니다.]
“놈들이 있는 곳에는 내가 직접 가겠다.”
검은 산양들의 주인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