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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828화


828화. 칼날의 끝 위에서 (2)

하스팅이 합류함에 따라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부분 회귀’를 반복하면서 쌓아온 경험과 노련미는 여러 방면에서 빛을 발휘했으니까.

“여기는 위치상 식물들로 인해 진형이 붕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식물들이요? 하지만, 주위엔 아무것도 없는데.”

“밤에만 이동하는 습성을 지녀서 지금 당장은 눈에 띄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막상 밤이 되면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죠. 진혁을 제외한다면 50층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존재.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은 진혁으로서는 커다란 짐을 덜게 된 셈이다.

혼자서 모든 지역을 커버할 수는 없었으니까.

‘덕분에 진행 속도도 훨씬 더 빨라졌어.’

며칠간 제자리걸음만 하던 교착상태가 끝나고, 2일 만에 던전 4개와 미궁 2개, 심지어 꽤나 까다로운 유적 1개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초입을 벗어나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게 된 순간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축배를 들기에는 전체적인 상황이 썩 좋진 않다.

이제야 겨우 50층의 전체 영역에서 2%가량을 밝혀낸 수준이었기 때문.

층계 공략을 성공시키려면 50일 남짓으로는 어림도 없어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곁에서 지켜보던 엘리스나 테레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흐음. 짐이 잘 아는 건 아니다만, 이 속도라면 시간이 너무 촉박해 보인다만?”

“아직 적의 주요 신격들도 등장하지 않고 있어요. 특히 상위 신격들의 경우엔 한 명 한 명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요?”

일리 있는 말이다.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한다고 한들 저 많은 숫자의 아우터갓들을 전부 쓸어버릴 순 없겠지.

막말로 니알라토텝의 거점을 공략하는 데만도 1달로도 부족한 수준이었으니까.

아자토스의 경우엔 글쎄.

1:1로 이긴다는 말 자체가 웃긴 일일 수밖에.

“염려하는 부분은 알고 있는데, 적어도 시간 부족으로 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역시 준비해둔 히든 카드가 몇 가지 있으니까요.”

50층 공략의 핵심은 정정당당한 정면 승부가 아니다.

편법과 기책을 이용해・・・ 공략 조건이 지닌 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게 관건이지.

“뭐, 계약자가 어련히 잘 하겠냐마는 이번만큼은 불안한 느낌이 드는구나.”

“워낙에 차원이 다른 적이니까요.”

어제나 승리를 쟁취해온 진혁이 하는 말이었으나, 마음속 깊이 스며든 불안감은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거나 먹으면서 마음 좀 가라앉혀요. 엘리스 너도.”

진혁이 피크닉 가방을 열었다.

“오오! 짐이 출출한지는 또 어떻게 알고 이런 걸 다 준비했느냐?”

“와아. 감사해요. 정말 잘 먹을게요!”

갓 만들어둔 주먹밥.

된장소스를 바른 다음 화롯불에 구워서 아주 먹음직스럽다.

안에는 참치마요네즈도 넣어뒀으니 요깃거리로서는 아주 훌륭하리라. 더불어 각종 과일로 만든 샐러드와 문어 모양의 소시지엔 케첩까지 예쁘게 뿌려줬다. 오물오물.

엘리스와 테레사가 토끼처럼 입을 바쁘게 움직이며 음식에 정신이 팔리자, 진혁이 아공간에서 여러 아이템들을 꺼냈다.

[‘녹색 화산의 염초’가 반응합니다!]

[‘보정의 반지’ – 염화의 보석이 추출됩니다!]

[쌍둥이 화산에서 나온 불꽃 가루를 첨가합니다!]

만들고 있는 것은 일종의 사료다.

정확히는 후라이드를 위한 전용 특식이었지.

“미요오오.”

후라이드가 진혁이 만들어준 먹이를 열심히 쪼아먹었다.

영양 만점의 간식으로 인해 후라이드의 깃털 색깔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좋아.

요 몇 주간 집중적으로 마력을 보급해주었더니 슬슬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게다가 후라이드의 변화로 인한 파급효과는 또 있었다.

[‘고대종의 알’들이 부화의 때를 기다립니다.]

후라이드 곁에 있는 알들이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특유의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로 인해 부화 시기가 대폭 단축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 쪽에서 애써 가져와준 것이니만큼 잘 써야지.’

고구마 같은 최상위 고대종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고대종은 고대종. 엄청난 전력이 될 거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콰아아앙!

전선의 가장 우측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거대한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거의 몇십 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져 있건만, 육안으로 훤히 보일 정도의 겁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

“적습?”

엘리스와 테레사가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염의 크기와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심상치 않았던 탓이다.

“설마.”

진혁의 표정 역시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이 특유의 위화감은…

슈브니구라스.

그것도 일전에 몇 번 상대했던 수준이 아닌, 본신의 힘과 무장을 100% 전부 끌어올린 상태였다.

“지금 우측을 맡고 있는 게 누구죠?”

“올림포스・・・ 쪽이에요.”

크로노스와 타이탄 병단이 주둔하고 있는 요충지.

헤라클레스와 아폴론 그리고 아르테미스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적어도 지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버티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서두르죠.”

진혁이 즉시 자리를 박찼다.

***

화르륵!

“쿨…럭!”

크로노스가 잿가루를 토했다.

사라진 하반신에서는 피마저 흘러나오지 않았다.

일방적인 학살.

‘시간축’을 뒤트는 고유성창을 사용했음에도 슈브니구라스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 오라버니!”

바로 옆에서는 아르테미스가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아르테미스를 지키려다가 죽은 아폴론.

그 외에도 올림포스에 언급된 수많은 신들과 영웅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렸다.

“연약하구나. 나름대로 신격이라 하는 것들이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슈브니구라스가 손에 든 크로노스를 집어던졌다.

콰콰콰콰콰콰아아앙!

반대쪽 산까지 날아가 버린 상체가 수백 그루의 나무들을 박살내 버렸다.

“으으으…”

“히… 히익. 끄륵. 으읍.”

겁에 질린 병사들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하늘처럼 떠받치는 신들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가는 판국에 자신들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천재지변이 지나가길 바라며.

저 괴물의 관심이 자신들에게까지 향하지 않길 기도하며,

처분을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바로 그때.

[성유물 ‘검은 산양의 뿔나팔’이 발동됩니다!]

까그그그그극!

웅장한 나팔소리가 아닌, 고막을 찢어버릴 것 같은 불협화음이 파고들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다.

세포 구석구석에 새겨진 공포라는 본능이 전신을 집어삼켰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끄아아악!”

“으아아악!”

고통에 찬 절규.

병사들이 무기와 방패를 집어던진 채 얼굴을 감싸쥐었다.

눈과 입 그리고 귀에서는 검은색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오오오!”

“크에에에에!”

검은 산양들이 병사들의 생기를 빨아들이며 맹렬하게 포효했다.

그 외에도 슈브니구라스의 직속 쇼거스들이 꿀렁이는 웅덩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층계를 쓸어버릴 수 있는 전력.

“영광으로 여기거라. 태고의 신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사실에.”

슈브니구라스가 쓰러져가는 병사들 사이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바로 그 순간.

콰앙! 

“우와아아아!”

헤라클레스가 몽둥이를 든 채 달려들었다.

12개의 과업을 발동한 최강의 반신이 이성을 잃은 채 구슬픈 포효를 내질렀다.

소중한 동료들이 죽어 있는 걸 보며,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몽둥이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움직였다.

투콰아앙!

“케에엑!”

가로막던 쇼거스의 머리가 으깨지고.

퍼퍼퍼퍽!

검은 산양의 가슴팍이 움푹 파였다.

단순히 무력에 있어서만큼은 손에 꼽힐 정도의 강자답게 마력을 해방한 헤라클레스의 질주는 태풍과도 같았다.

하지만.

거침없던 질주는 어느 한 기점을 끝으로 멈췄다.

콰아아앙!

몽둥이에 직격을 허용했지만, 슈브니구라스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것은…

…..넘어설 수 없는 태산이었다.

애초에 한 생명체 따위가 범접할 수 없기에 태고의 정점에 위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라져라.”

짧은 언령.

헤라클레스의 오른팔이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더니.

퍼어엉!

그대로 한 줌의 핏물이 되어버렸다.

“··· · · ·|!”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피부조차도 이때만큼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죽는다.

헤라클레스의 뇌리에 마지막 장면이 맺혔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고유성창 ‘세라핌’ – ‘신성 심판’이 발동됩니다!]

[고유성창 ‘개벽의 계시록’ – ‘블러드 블레이드’가 발동됩니다!]

[고유성창 ‘아랑흑아’ – ‘늑대의 습격’이 발동됩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세 개의 고유성창이 슈브니구라스에게 쏟아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마력이 하나의 목표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괜찮습니까?”

몸을 날려 헤라클레스를 낚아챈 진혁이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마지막 말을 목구멍 속으로 집어삼켰다.

수많은 동료들을 잃었다.

이걸 보면서 어찌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만이 가슴을 무겁게 짓누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빌어먹을.’

아직 전쟁의 초입에 불과한 시점에서 저 녀석이 벌써 움직일 줄이야. 대체 무슨 계획이길래 이런 승부수를 띄운 건지 모르겠다. 가지고 있는 성유물을 전부 해방했다는 건 이번 싸움에 꽤나 큰 무게를 두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나저나 반응은 좀 있으려나? 피부 몇 꺼풀이라도 벗겨냈으면 좋겠는데.’

메에에에… 기습을 하는 타이밍은 완벽하긴 했는데, 단순히 그것만으로 방금 전에 공격이 먹혔을 거라곤…

저벅.

슈브니구라스가 이글거리는 크레이터 속에서 올라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

같은 시각.

숫자는 많지 않다. 슈브니구라스가 연합 측의 진형을 쑥대밭으로 유린하는 사이. 니알라토텝이 이끄는 병사들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애초에 양보다는 질로 구성된 데다, 한 명을 납치하는 게 주요 임무였기 때문이다.

“흐음. 꽤나 장난을 많이 쳐줬군요.”

니알라토텝이 허공을 보며 혀를 찼다.

이 앞에는 상당히 복잡한 결계와 술식이 펼쳐져 있었다.

평범한 신격이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안으로 들어갔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그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탑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니알라토텝이란 말이다.

[성유물 ‘허상을 메우는 샘물’이 쏟아집니다.]

연분홍빛을 띤 액체가 범람하자, 허공을 따라 각종 룬어들이 빛을 뿜어냈다.

“결계라니. 쯧.”

니알라토텝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복잡한 술식들이 맞물리며 룬어들로 이루어진 결계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12성급 ‘차원단절’이 파훼됩니다!]

[1]성급 ‘공간왜곡’이 파훼됩니다!]

[12성급 ‘어긋난 시야’가 파훼됩니다!]

고위 결계들이 박살나면서 조작해둔 시야가 제 모습을 되찾았다.

“꼭꼭 숨어 있었군요. 그리 오래는 못 갔지만.”

니알라토텝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꽤나 긴 술래잡기를 할 각오로 왔건만, 의외로 놀이는 금방 끝나버렸다.

“편하게 티타임을 즐기며 책을 읽을 시간도 주지 않는군.”

타악.

릭이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중절모를 쓴 채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선 짙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갓 우려낸 커피의 첫 모금을 하기 전이라는 것도 크게 한몫했다.

“이 와중에 다과회라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아니면 자포자기의 심정인 건지 모르겠지만, 뭐 좋습니다. 마지막 여유 정도는 즐기게 해드리죠.”

완벽한 외통수.

함께 온 그레이트 올드원들이 겹겹이 방벽을 쳐두었기에,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벅.

니알라토텝이 릭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또 다른 과자와 커피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니알라토텝의 말에, 릭이 중절모를 날렸다. 

“친절하기도 하셔라. 이건 절 위해서 준비해둔 건가요?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군요. 당신이란 남자는 후후.”

탁!

손을 뻗으려던 니알라토텝의 손에 모자가 부딪쳤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 손님을 위한 차다. 향이 좋아지도록 우려내고 있는 중이니 더러운 손은 갖다 대지 않았으면 좋겠군.”

니알라토텝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손님? 손님이라고요?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아니면 제가 오니 겁을 먹고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이라도 친 거랍니까?”

커피 하나 내어주기 싫은 패배자의 넋두리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 손님이다. 니알라토텝.”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허를 찔렀다.

“……!!??”

니알라토텝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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