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29화
829화. 검은 산양들의 주인 ‘슈브니라스’ (1)
그럴 수가.
니알라토텝의 표정이 무너졌다.
언제나 여유롭고 능글맞았던 태고의 신격이었으나, 이번만큼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얼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있던 동료였으니까.
노스이디크.
태고의 최상위 신격 중 하나가 릭 헤네시 곁으로 다가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당신이 어째서…?”
“너는 채찍만 써서 상처를 덧내기만 하지 않았던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왔을 뿐이다.”
“당신이 당근이라는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 실제로 릭 역시도 너보다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거든. 다른 차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로 이미 약조를 받아 두었다.”
“순순히 포기하겠다니. 글쎄요. 저로서는 상당히 믿기 어려운 말이로군요.”
지금까지 자신을 꽁꽁 숨기며 요리조리 도망만 치던 릭 헤네시였다.
그런데, 갑자기 백기를 들겠다고?
솔직히 말해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밖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지만, 단순히 네 기분에 따라 이 중요한 과업이 실패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알고 있겠지? 이번 일은 슈브니구라스 님뿐 아니라, 아자토스께서도 중요히 여긴다는 걸?”
니알라토텝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그 말대로다.
이건 성공 여부가 가장 핵심이었으니까.
굳이 릭이 노스이디크랑 협력하겠다고 하는 와중에 의심스럽다며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겠지.
무엇보다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노스 이디크가 함께 해준다면 릭이 도망갈 가능성은 더욱더 0에 수렴한다.
“하아. 무슨 말인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슈브니구라스께 직접 명령을 받은 몸. 이대로 당신에게 모든 걸 맡기고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대화 정도야 함께 나누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데리고 온 병력은 물려라.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차를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릭이 니알라토텝 뒤에 서 있는 거대한 몬스터들을 가리켰다.
‘심연 포식자’
태고의 신격들을 제외한다면 50층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가장 최상위에 위치한 괴물들.
압도적인 강함과 끈질긴 생명력. 거기에 지능까지 높은 터라 강자를 사냥하는 데 있어 최적화된 사냥꾼들이었다.
“정말이지 가지가지 하시는군요.”
“편안히 이야기를 하자는 것뿐이다. 아니면 뭐지? 고작 이 늙은이 하나 제압할 자신이 없다는 건가?”
“값싼 도발에 넘어가야만 하는 게 조금 열받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모른 척해드리죠.’
니알라토텝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크르르….”
“크륵.”
심연 포식자들이 몰려오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됐습니까?”
“그래. 이제 좀 편안해졌군.”
“그럼, 저희가 원하는 걸 말해보세요.”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제법 긴 이야기가 될 테니까.”
릭이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련의 탑을 벗어난 세계.
훨씬 더 거대하고 넓은 차원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모든 게 담겨 있는 하나의 ‘책’에 대해서도.
정보가 이어질수록 니알라토텝의 동공이 여러 번 흔들렸다. 꽤나 생소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에 모든 정신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니알라토텝이 입맛을 다셨다.
조금 전부터 커피 맛이… 무언가 이상하다.
모든 독과 저주로부터 면역이 된 몸이었건만, 어째서인지 입 안에 가득 맴도는 이질적인 향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휘청하고.
니알라토텝이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넘어졌다.
입을 연 건 노스이디크였다.
“과연 괴물은 괴물이야. 어지간한 그레이트 올드원은 골로 보낼 수 있는 양을 넣었는데, 약발이 받는 것도 이리 오래 걸리는 걸 보면 말이지.”
동시에.
화르륵!
검은 화염과 함께 숨어 있던 또 다른 이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내가 더 많이 넣어야 한다고 했잖아.”
크툰.
노스이디크의 배우자이자, 틴달로스의 사냥개들을 잉태하는 모체다.
아예 작정을 한 듯, 그녀의 뒤로 다수의 아이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미쳤…군요. 감히 적들과 손을 잡고 배신을 하겠단 말입니까?”
“그분들께는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다른 차원 따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또 다른 신세계를 알아내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곳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이며 아자토스의 전속 비서가 될 수 있는 건 니알라토텝이 될 게 뻔한데?
아무리 광대한 세계가 주어진다고 한들, 그걸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한다면 쓰레기에 불과하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니알라토텝.
네놈의 목이지.
“내 역할은 이쯤이면 충분한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맡기도록 할게. 아무리 계약을 맺었다곤 하지만, 어우야 너무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 같다니까?
내 연기력은 이런 데 쓰려고 갈고 닦은 게 아니라고.”
커피 잔을 내려놓은 릭이 자신의 얼굴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바로 그 순간.
[‘차원의 가면’이 벗겨집니다.]
파츠츠츠!
릭의 얼굴이 사라졌다.
“너, 너는.”
니알라토텝이 다시 한 번 기함했다.
상대는 바로 자신들과 계약을 맺은 자이기 때문.
통칭 ‘남자’라 불리는 베일에 싸인 인간이었다.
“어이가 없군. 내가 껍데기를 뒤집어 쓴 걸 구분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마. 이 능력은 탑에 있는 능력이 아니니까. 거기에 수리부엉이라는 놈을 통해서 얻은 릭의 체취와 마력을 묻혀뒀으니 제아무리 너라고 해도 알아차릴 수 없었을 거야.”
과거의 천유성이 피식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마무리는 우리가 하도록 하지.’
노스이디크가 마력을 해방했다.
쿠쿠쿠쿠쿠쿠쿠!
“사냥을 시작한다. 나의 아이들아.”
크툰 역시 틴달로스의 사냥개들을 소환하며, 자신이 가지고 온 성유물들의 능력을 개방했다.
***
창백한 피부에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한 소녀.
그녀의 등 뒤쪽으로는 뱀의 형상을 한 길쭉한 머리들이 수십 개가 넘게 솟구쳐 있었다.
슈브니구라스의 인간형 버전이었다.
“적당히 세력 몇 개 정도만 없애고 돌아가려 했느니라. 그러니 개전초부터 너무 힘을 빼지 말거라.”
폭심지에서 걸어나온 슈브니구라스가 태연하게 새로 가세한 지원을 바라봤다.
진혁을 포함한 엘리스와 테레사.
전부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핵심이 되는 인물들이었다.
“남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적당히 놀고 돌아가겠다고? 그딴 말도 안 되는 말이 통할 것 같아?”
“나는 그리할 수 있다. 내가 원한다면 ・・・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자 법칙이 되게 할 수 있다.”
우우우웅!
뱀들의 아가리가 벌어졌다.
순식간에 보라색 흑염구가 만들어지더니,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사되었다.
콰아아아앙!
퍼어어엉!
한 방에 군단 하나씩.
수천이 넘는 병사들이 지면과 함께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마, 막을 수가 없어요!”
“크윽!’
테레사의 ‘성호’나 엘리스의 ‘블러드 실드’마저 가볍게 박살내 버리는 위력.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난사하는 걸 보니 벌써부터 토가 나오려 한다.
그나마 엘리스와 테레사가 궤도를 조금씩이라도 틀어준 덕에, 전멸을 하는 사태는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진혁의 손가락이 움찔였다.
아직 미완성이긴 한데.
‘여기서 써야 하나.’
슈브니구라스 정도 되는 거물을 초반에 잡을 수 있다면 그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제대로 된 환경을 갖추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건데.
[슈브니구라스가 스킬 Lv1,451 ‘황혼의 구체’를 발사합니다!]
이런 미친.
천 단위의 스킬 레벨을 가진 주홍빛 구체가 날아왔다.
[고유성창 ‘개벽의 계시록’ – ‘달의 장막’이 발동됩니다!]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장막 주위로 붉은 혈화(花)가 피어났다.
아타락시아를 상징하는 문양과 고대 진조들의 언어가 장막을 완벽하게 둘러쌌다.
[고유성창 ‘세라핌’ ‘마지막 성소(聖所)’가 발동됩니다!]
열두 제자들이 묻힌 무덤과 각기 다른 성흔이 새겨진 십자가들.
그리고 12개의 무덤을 연결하는 황금빛 사슬에서 눈부신 신성력이 뿜어졌다.
마력을 갈아넣다시피 하여 꺼낸 대군형 방어스킬이다.
지이이이잉!
소리마저 압축해버리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이어진 것은 지평선까지 닿는 충격파였다.
“아아아악!”
“크으으으!”
테레사와 엘리스의 입에서 고통에 가득 찬 신음이 터져나왔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버릴 것만 같은 격통.
[‘순혈의 왕관’이 아타락시아의 가주를 보좌합니다!]
[‘신성의 왕관’이 구국의 성녀를 보호합니다!]
파츠츠츠!
두 개의 왕관 사이에 공명이 일어나며, ‘달의 장막’과 ‘마지막 성소’에서 새로운 빛이 솟구쳤다. 반쯤 무너지던 장막과 성소가 재건되며, 이와 반대로 황혼의 구체가 급속도로 작아졌다.
“호오.”
슈브니구라스가 흥미롭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리 가벼운 스킬 하나를 던졌다곤 하나, 거의 모든 존재들은 저 구체 하나면 소멸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거기서 살아남다니.
“툴챠나 노스이디크가 한 방 먹은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구나. 이 층계에서 나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다.”
역대 등반자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실력자들이다.
물론, 그래봤자 거기까지가 한계였지만,
바로 그때.
[오시리스가 고유능력 ‘태양의 성역’을 발동합니다!]
[아누비스가 성유물 ‘죽음의 쟈칼 군대’를 불러일으킵니다!]
[세트가 ‘죽은 자들의 표식을 남깁니다!]
새로운 마력이 끼어들었다.
“도우러 왔다!”
“젠장. 직접 보니 훨씬 더 괴물 같은 놈이네. 저게 주의하라고 했던 태고의 신격 중 하나인가?”
“한 명한테 올림포스가 다 쓸려버린 것도 이해가 되는군.”
이집트의 신격들이 잔뜩 긴장한 채 한마디씩 던졌다.
적이 왔다는 걸 감지하고 급하게 오긴 왔는데.
솔직히 말해 지원을 온 건지, 아니면 희생자의 숫자만 늘리러 온 건지 구분이 안 갔다.
하지만.
물러설 순 없다.
상대가 터무니없은 존재라는 건 이미 다들 인지하고 있을 터.
그렇다면.
‘기존에 계획했던 대로 틈을 만들어주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진혁이라는 거대한 칼날이 놈들의 심장에 닿게 하기 위해서!
[신수 ‘스핑크스’가 사막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크오오오!”
거대한 피라미드의 수호자가 슈브니구라스를 향해 돌진했다.
서걱!
수십 미터가 넘는 몸뚱어리가 반으로 잘렸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 속에서 슈브니구라스의 팔이 횡으로 가로질렀다.
쩌저저적!
측면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던 쟈칼들의 발밑으로 검은 손아귀들이 나타났다.
“크아아악!”
“깨애앵!”
머리와 몸을 잡고 그대로 지면 아래로 끌어당긴다.
반대쪽에서 미이라로 이루어진 군단이 뱀들이 쏜 구체에 맞고 송두리째 사라졌다.
“계속해서 밀어붙여라!”
“겁먹지 말고 싸워라! 사막의 긍지를 보여줘야 한다!”
이집트의 신격들이 병사들을 독려했다.
악어와 하마로 이루어진 중갑병들이 정면에서 육탄전을 감행했다. 하늘에서는 매와 독수리들이 독이 묻은 작살을 집어던지며 공격했다.
‘죽을 각오를 다졌군.’
슈브니구라스의 눈동자에 덧없이 사라질 생명들이 보였다.
게다가.
이놈들뿐만이 아니라 교묘하게 움직이고 있는 다른 이들도 있었다.
고대의 등반자들이라고 했던가.
결계를 주로 다루는 벨토르라는 애송이와 냉기를 뿜어내는 서리혼령의 기척도 느껴졌다.
그 외에도 여러 벌레들이 무언가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잠깐 시선 정도만 끌면 충분하거늘, 이래서야 관심이 너무 과하질 않느냐.”
슈브니구라스가 여전히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굳이 알아서 죽으러 와주겠다는데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여기서 숫자를 적당히 줄여놓으면 앞으로의 전쟁이 훨씬 더 손쉬워질 것이다.
“오거라.”
슈브니구라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걸 기점으로…
“예. 어머니.”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위대하신 분의 명령에 따라….”
검은 산양들이 그림자 속에서 일어났다.
‘자아’를 가진 개체와 그들을 따르는 슈브니구라스의 직속 쇼거스 군단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