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59화
859화. 최강의 등반자를 가리는 장소. ‘별의 탄생지’ (1)
쿠쿠쿠쿠쿠!
공허의 틈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온 기운들이 점점 더 거세졌다.
[‘광기의 저택’이 대상을 바라봅니다!]
[‘한 방향뿐인 초대장’이 3인의 제물을 강제로 불러들입니다!]
버티기가 쉽지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해 당장이라도 이 지옥 같은 고통을 끝내고 싶다.
차라리 광기의 저택으로 들어가서 차후를 도모하고 싶다는 열망이 턱 끝까지 솟구쳤으니까.
콰콱!
진혁이 마력으로 만든 끈으로 엘리스와 테레사를 동여맸다.
이미 둘의 몸은 절반 이상의 저 너머로 넘어간 상태였다.
“그냥… 짐을 포기하거라! 멍청하게 다 살리려 하지 말고 계약자만이라도 살란 말이다!”
“이러다간 다 같이 끌려 들어가요!”
웃기지 마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여기서 팔이 끊어질지언정 끈을 놓치진 않을 거다.
-단념해라.
-광기의 저택에서 다시 만나자꾸나.
-위대한 존재에게 귀의할지어니.
목소리가 귓가를 넘어 몸속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기분이었다.
뚜둑.
뚜두둑!
힘줄이 끊어지고 인대가 늘어난다.
임계점을 넘어선 고통에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한계인 것은 아자토스 역시 마찬가지.
“끄으…으.”
몰려오는 졸음으로 인해 새하얗던 몸에 검은색 얼룩들이 여기저기서 번져나가고 있었다.
1분.
딱 1분 정도만 더 버티면 놈의 분신체는 우주의 파괴를 막기 위해 고안된 노랫소리에 굴복할 것이다.
이건 아자토스 스스로가 자신의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건 제약이었기에, 결코 뒤틀거나 변칙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문제는.
푸슉! 푸슈슉!
진혁의 핏줄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모래시계 속 알갱이가 먼저 다 떨어지는 건 이쪽이 된 듯싶었다.
과거 시련의 탑을 오르며 수없이 마주했던 문장.
그리고 현실이 된 지금은 단 한 번도 마주했던 적이 없는 문장.
[실패했습니다.]
그 붉은빛 문구가 눈앞에서 일렁이려 했다.
그런데 가능성이 모두 사라져버린 바로 그 순간.
수면의 종에서 나오는 노랫소리가 달라졌다.
“……!?”
“이건…?”
릭 헤네시 쪽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새로운 마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슈브니구라스의 고유무장 ‘이면으로 가는 길’이 발동됩니다!]
[성유물 ‘해질녘의 야래화’와 특수 아이템 ‘단절의 가시풀’, ‘바깥 경계에서 자라는 피안화’가 뒤섞입니다!]
수면제가 비교적 부드럽게 잠들게 해주는 보조제라면.
지금 사용되는 것은 난폭하고 무자비하게 의식의 흐름을 끊는 마취제에 가깝다.
“네놈이… 어째서?”
아자토스의 시선이 새로운 적을 향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듯, 설마 이 타이밍에 자신을 배신할 거라곤 생각도 못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곳엔 과거의 천유성이 서 있었다.
“계속해서 말했었잖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강진혁’이라는 먹잇감은 오직 자신이 먹어치울 거라고.
그걸 이런 식으로 무시했으니 당연히 그에 걸맞은 벌을 받을 차례다.
[‘수면의 종’이 위대한 궁전의 주인을 잠의 안식으로 인도합니다!]
거짓말처럼.
아자토스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불과 0.1초 전만 하더라도 미친 듯이 날뛰던 마력의 폭풍도 전부 사라져버렸다.
‘광기의 저택’으로 이어지는 통로 역시 완전히 닫혀버렸고.
“000…”
“하아아….”
엘리스와 테레사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미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저항했던 터라, 당장 탈진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한계를 넘어선 뇌가 지금 당장 잠들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광기의 저택에 반쯤 몸을 담갔던 탓에, 전신에서는 끓어오르는 태고의 마기가 요동치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진혁 역시 달콤한 잠의 유혹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어쩌면 아자토스보다 더 위험하고 성가신 놈을 앞에 두고서 쉴 수는 없었으니까.
“이야, 역시 위대한 탑의 고인물은 다르긴 다르네. 양들의 요람을 최대거점으로 만드는 것에 실패한 순간에서 게임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방법을 생각하다니 정말로 훌륭해.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공략이었어!”
오바스럽게 잔뜩 큰 목소리와 과장된 몸짓을 한다.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며 환하게 웃는 모습.
그래.
인정하기 싫지만, 저 녀석은 천유성이 맞다.
그것도 잔뜩 뒤틀리고 어긋나버린.
“과거의 망령이… 우리 애를 참 오랫동안 데리고 있었다 들었는데 이제 그만 슬슬 돌려받아야겠어. 너같이 정신 나간 놈이랑 함께 두면 정말로 맛이 가버릴 것 같거든.’”
진혁이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을 붙잡으며 일어섰다.
최후의 흑막.
모든 것의 뒤에서 암약하던 당사자만 쓰러뜨린다면 그토록 바라던 탑의 정상에 올라갈 수 있으리라.
혼자가 아닌, 모두와 함께.
“흐음. 그 몸으로 싸우겠다고?”
“너 정도는 충분해.”
“여전히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은데,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 고작 다 쓰러져가는 놈을 이기려고 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기다린 게 아니거든.” 과거의 천유성이 품 안에서 별빛이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만병통치약이라 불리는 ‘제비꽃 엘릭서’다.
그것도 50층에서만 존재하는 것들로 만들어 최상품의 효능을 가진.
“3시간을 주지. 완전히 회복한 후에 내 마력의 잔향이 있는 곳을 찾아. 거기서 우리 둘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툭.
엘릭서를 받은 진혁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주억거렸다.
“3시간 따위도 필요 없고. 네놈이 원하는 장소로 갈 이유도 없어. 이걸 먹는 즉시 여기서 결판을 내고 정상으로 갈 테니까.”
“흐음. 최초의 혼돈이 있는 곳 말이야?”
“그래.”
“그렇다면 더욱더 내가 있는 곳으로 와야겠네. 이걸 그토록 가지고 싶다면 말이야.”
짤그랑.
과거의 천유성이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또 하나의 유리병을 흔들었다.
안에 있는 것은 새빨간 빛을 뿜어내는 기체였다.
‘최초의 혼돈’.
저 유리 병을 해방할 경우 50층을 정복한 것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이 세계의 엔딩을 볼 수 있는 마지막 피스라는 뜻이다.
“너…!”
“워워. 흥분하지 말고 천천히 전력을 갖춰서 와, 제비꽃 엘릭서는 효과는 압도적이지만, 체내에 완전히 흡수되려면 보통 2시간 이상이 필요하니까. 제아무리 너라고 해도 최소한 1시간은 쉬어야 할 거야.”
의사가 처방을 하듯.
아주 조목조목 조언까지 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위대한 대결을 망칠 생각도 하지 마. 여차하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거니까.”
쿠쿠쿠쿠쿠!
아자토스의 성이 고요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쩌저적.
조금씩 무너지는 하늘.
보라색을 머금은 번개.
틀림없다.
조금 전의 여파로 이곳에 잠들어 있는 괴물이 깨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분신체 따위가 아닌, 아자토스 본체 그 자체가.
***
엘릭서를 통해 완전히 몸이 회복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55분.
엘리스와 테레사 역시 엘릭서를 조금씩 나누어 마셔 몸에 쌓인 광기를 진정시켰다.
‘생각보다 더 심각하긴 하네.’
진혁이 피부에서 꿈틀거리는 검은색 핏줄을 바라봤다.
간신히 진행이 악화되는 걸 막긴 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겠지.
‘제비꽃 엘릭서’로도 완벽한 정화가 불가능했다.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다. 그 녀석이 뭔가 더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맞아요. 게다가 여기서 더 지체하면 지킬 것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될 거예요.”
[네크로노미콘의 페이지가 사라집니다.]
[트루넴브라의 노래가 효력을 잃어갑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상태창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노라 말해주듯. 상태창에 담긴 글자들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계약자. 놈의 위치는 알고 있는 것이냐?”
“그래. 녀석이라면 분명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굳이 마력의 잔향을 추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최후의 전장에 가장 어울리는 장소라면 50층 전체를 통틀어 놓고 봐도 단 한 곳뿐이었으니.
마지막 정비를 끝낸 셋이 빠르게 움직였다.
콰드득.
후둑.
하늘이 조금씩 조각나는 게 보인다.
아름다웠던 정원은 말라비틀어졌고, 여기저기엔 죽어버린 태고의 식물들이 넘쳐났다.
곧 있으면 부서진 성단의 파편들이 떨어지기 시작하겠지.
그리고 노랫소리가 모두 사라지는 시점이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외우주의 군주가 깨어나리라.
그렇기에.
탓!
서둘러야 한다.
1분 1초라도 더.
엄청난 속도로 통로와 복도를 넘나드는 질주는 그로부터 10분이 넘게 이어졌다.
마침내 전력 질주가 멈춘 곳은 천장이 없는 거대한 원형 공간이었다.
우우우웅!
궁전 한가운데서 쏘아진 빛이 이름 모를 별에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시련의 탑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야.”
과거의 천유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흔히 ‘별의 탄생지’라 불리는 장소.
태고의 유생들이 심연포식자나 초승달사제 혹은 하위 신격들을 상대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는 일종의 성인식을 위한 곳이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수많은 성단과 성운 그리고 별자리들이 최후의 우승자를 칭송하며 위대한 태고의 존재가 태어났음을 공표하는데, 그 장면은 웅장하면서 전율을 불러 일으키게 만들었다.
당연히 승리에 목마른 과거의 천유성이 딱 좋아할 만한 최종무대다.
“헤헤. 오빠!”
“우리 잡혀 버렸어! 그래도 시킨 대로 목숨은 잘 부지했지롱!”
“…크윽.”
한쪽에는 포로로 잡힌 케이시와 주드로 그리고 아델이 보였다.
제법 심한 검상을 입은 아델에 비해 천유성은 너무도 멀쩡해 보인다.
과연….
그 정도 수준이란 말이지.
“우리 유성이가 확실히 달라지긴 했네. 표정도 엄청 띠꺼워졌고, 나름 오랜만인데 반갑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진혁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천유성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과거 녀석이랑 같이 다니면서 단순히 검술 훈련만 한 게 아닌 모양이다.
‘탐식의 눈’을 통해 본 천유성의 심상은 칠흑같이 어두웠으니까.
‘강해지기 위해 인간성을 버리게 만든 건가.’
단기간에 엘더갓들을 사냥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니. 해서는 안 되는 변칙을 쓴 게 틀림없었다.
“유성 씨….”
“쳇! 바보 검성 같으니라고.”
테레사와 엘리스가 그런 천유성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수많은 사선을 넘으며 동고동락했던 소중한 동료.
그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너무도 차갑게 얼어붙은, 하나의 잘 벼려진 칼날만이 남아 있었으니까.
“자자, 케케묵은 인사는 여기까지 하고 슬슬 시작해보자고. 아자토스의 본체가 깨어나게 된다면 솔직히 나도 막을 방법이 없거든.”
과거의 천유성이 손뼉을 마주쳤다.
그 말대로 하늘이 부서지는 속도가 조금씩 더 빨라지고 있다.
모두에게 있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어.’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리스와 테레사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3:2라는 숫자상의 이점.
거기에 검에만 집중된 상대와 달리 이쪽은 다양한 능력들로 변수를 창출하고 시너지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우위에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아, 깜빡하고 말을 안 했네. 싸우는 건 우리 다섯이 아니야. 유성이하고 싸우기 전에 먼저 너희끼리 예선전을 치러야 하거든.”
과거의 천유성이 한 말을 기점으로.
[엘리스의 혈액이 오염됩니다!]
[테레사의 신성력과 마기에 제3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쿠쿵!
모든 게 급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