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만렙 뉴비 872화
872화. TS 버전 (1)
TS 물약.
이건 단순히 성별만 바꾸는 게 아니라 몸에 있는 특질은 물론 마력을 운용하는 방식과 성격 자체까지 바뀐다. 완전히 새롭고 이질적인 몸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당연히 적응하기 전까지는 기존의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 터.
하지만 이미 플레이를 해본 진혁은 알고 있었다.
TS가 된 상태에서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머, 멈춰라! 너 그걸 했다가는 진짜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진혁이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있는 천유성과
“뭔지 몰라도 안 돼요!”
뒤늦게 불길함을 느낀 테레사가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지.
딸깍.
진혁이 뚜껑을 개방했다.
그러자.
쏴아아아…
무지개빛이 숲 전체를 집어삼켰다.
[성별 전환이 완료되었습니다.]
[제한 시간 1H: 59M : 595]
2시간.
그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그렇게 무지개 운무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으….”
익숙하면서 낯선 신음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여인이 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찰랑이는 머리카락에 백옥 같은 피부.
미인이라는 명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가 싶을 정도다.
세상에나.
이게 천유성이라는 말이지?
‘단순히 외모만 변하는 게 아니라 성격까지 달라지는 게 크긴 크네.’
천유성의 눈에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배에 바람구멍이 나도 으르렁대는 모습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유, 유성・・・공자?”
추혼사영의 코에서 피가 터졌다.
참고로 추혼사영은 2M에 이르는 체구의 건장한 청년으로 변한 상태였다.
“보, 보지 마세요. 스승님….”
“어찌 이렇게 훌륭한 기물・・・ 아니, 간악한 기물이 있다니! 지금 우리 낭군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추혼사영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뽑았다.
쿠쿠쿠쿠!
음. 투기를 끌어올리고 있긴 한데.
어째 그 투기에 고마움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는 건 왜일까?
꽃향이 아주 가득하다 가득해.
피식 웃은 진혁이 이번엔 옆을 바라봤다.
“재밌는 짓을 했네. 우리 진혁이.”
테레사는 유럽 중세 기사를 떠올리는 근사한 미청년으로 탈바꿈했다.
그 옛날 아서왕을 떠올리는 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다.
물론.
“벌을 내려야겠어.”
혀로 입술을 할짝이는 걸 보니 예전의 따뜻하고 자상했던 테레사가 그리워졌다.
“다들 색달라서 좋긴 한데, 이제부턴 많이 다를 거야.”
진혁이 두 자루의 단검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탓!
곧바로 진혁이 움직였다.
노린 것은 천유성이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 때문에 잠시 시야를 가렸지만, 여성스러워진 몸 덕분에 훨씬 더 날렵하고 가벼운 움직임이 가능했다.
얘가 TS 이후 완전히 부끄럼쟁이가 된 덕에 검조차 제대로 못 잡았거든.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 같은 놈이 눈을 질끈 감는 걸 보니…..
“츄릅.”
더욱더 괴롭혀주고 싶었다.
“어림없습니다!”
추혼사영이 나섰다,
거대한 체구에서 오는 압박감이 상당하다.
이쪽은 오히려 키가 줄어서 165cm인 데 비해 상대는 190cm가 훌쩍 넘게 자라났으니까.
하지만.
부우웅!
검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몇 번을 휘둘러도 진혁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이런….”
추혼사영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깨달은 거겠지.
무림을 주름잡던 고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추혼검은 미묘한 균형과 감각을 중요시하죠.”
달라진 시야와 거리감.
음과 양의 역전으로 인한 단전의 뒤틀림,
모든 게 제대로 된 초식을 구현할 수 없는 방해 요소들이다.
뭐, 추혼사영이 워낙에 천재인 탓에 시간만 조금 주면 결국 적응하긴 할 테지만….
‘어림없지.’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만큼 사람이 좋지 못해서 말이다.
카가가강!
진혁의 검이 종횡무진 움직였다.
‘빙하조형’으로 만들어낸 서릿발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음의 기운을 극대화시키는 빙계 능력은 여자의 몸과 시너지가 더 좋을 터.
“큭! 크흡.”
추혼사영이 쩔쩔매며 방어하기 급급했다.
“그, 그만해! 싸우지 마세요! 다들 대화로 해결하면…”
천유성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얘는 진짜 적응이 안 되네.
그냥 이대로 계속 여자로 냅둘까?
시련의 탑의 입장에서도 그편이 훨씬 더 평화로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승부가 갈렸다.
투콰앙!
명치를 제대로 맞은 추혼사영이 게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음. 좀 너무했나?
‘아니. 너무한 건 감히 내 편에 안 붙고 왕관을 탈취하려 한 게 너무한 거지.’
태고의 존재들로부터 이 세계선을 지켰는데, 고작 착취와 억압과 독재를 좀 했다고 발끈하다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오히려 지나치게 관대한 처분이었다.
그럼 다음은….
진혁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천유성에게 다가갔다.
일부러 풍선껌도 입에 넣어서 질겅질겅 씹고. 최대한 건들건들거린 건 덤이다.
“야.”
“응?”
“응? 으으응? 어째 말이 짧다?”
확씨.
어디서 눈도 똑바로 마주치고 말이야.
“미안해… 아니 죄송해요.”
“그래. 이제 좀 괜찮네.”
일진녀로 빙의한 진혁이 천유성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일단 왕관부터 내놔. 개기면 저기 나가떨어진 네 신부처럼 만들어버리는 수가 있어.”
“여기・・・ 있어요.”
천유성이 순순히 왕관을 넘겼다.
크으.
사이다가 뱃속에서부터 뇌까지 솟구치는 기분이다.
도파민에 절여진 세포들이 단체로 탭댄스를 추는 게 이런 거였구나.
“너 좀 생기고 능력도 좋고 의학도 배우고 기타 등등 잘났다고 사람 함부로 대하고 말이야. 툭하면 대결이니 뭐니. 1무로는 안 되느니 하면서 사람 괴롭히면 돼? 안 돼?”
“그게….”
“돼?! 안 돼!?”
“안・・・ 돼요. 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형 아니, 언니가 살아보니까 사람 한 방에 가는 거 순간이더라. 겸손하게 살란 말이야. 겸손하게 알았어?”
“나이는 제가 더 많….”
“야. 지금 하려는 말이 그게 아니잖아. 맥락 못 짚어?”
툭툭.
가볍게 뺨을 두드려 준다.
천유성이 히끅거리면서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이러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괴롭히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물약엔 제한 시간이 존재한다.
여기서 너무 시간을 끌다가는 나머지 일정이 꼬여버릴 수 있으리라.
“테레사 씨는 안 싸울 겁니까?”
“음. 원래는 한 판 붙으려고 생각했는데, 싸우는 걸 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어. 이 몸으로는 승산이 없을 것 같거든.”
“그럼, 왕관은?”
순순히 넘겨줄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지. 뭐.”
테레사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왕관을 던졌다.
호오. 상황 판단이 제법 빠르군.
이로써 가장 골치 아픈 두 명을 탈락시켰다.
TS 물약이 아니었으면 숲이 사라질 정도로 혈투를 치러야 했을 테지만,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한 덕에 승산이 대폭 올라간 셈이다.
“아하하. 와. 진짜 대단하네. 일을 이렇게 만들 줄은 몰랐는데.”
긴 금발을 가진 피에타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그리스신화에 나올 법하게 흰색 천으로 몸을 감싼 모습.
아프로디테가 현현했다면 정확히 이랬을 거다.
어음.
노출이 좀 과하긴 하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네.
“도와준 덕분이야. 고마워.”
“에이.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나저나. 지금부터는 어떻게 할 거야? 왕관을 3개나 확보했으니 일단 눈치를 좀 보면서 다른 쪽을 살펴볼까?”
“일단은 동료부터 모집해야 할 것 같아.”
남은 강적은 엘리스와 고대종들.
엘리스는 워낙 잠재력이 엄청났기에 성별이 바뀌었어도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다.
성별이 바뀌든 말든 간에 머릿속이 온통 꽃밭인 고구마와 정령수들 역시 커다란 변수가 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이쪽도 가능한 한 든든한 아군을 모집해야만 한다.
진혁과 피에타가 즉시 움직였다.
***
“야. 놔. 안 놔?”
“너, 너부터 놔.”
두 명의 소녀가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열심히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시련의 탑 상층부를 주름잡는 두 개의 거대 세력. ‘마계’와 ‘이집트’.
그 둘을 대표하여 이번 야유회에 참석한 아누비스와 베리엘이었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놓는 거다?”
“그래. 하나, 둘, 셋!”
아아아악! 하는 비명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둘 다 아직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는 중이었다.
얘네는 명색이 절대자란 것들이 TS가 되고 나서도 이 모양 이 꼴이냐.
아무리 마력을 다루는 게 어색해졌다고 해도 그렇지.
상위 세력을 이끄는 주신들치고는 너무 짜친다.
“놓으라고 했다? 진짜 죽고 싶어?”
“너야말로 내가 할퀴고 나서 울지나 마.”
나름 상남자들이었는데.
성격 변화의 부작용이 너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때.
뚜둑!
머리카락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캬아아아!”
아누비스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작은 수인 소녀가 왕관을 내팽개친 채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훗!”
아누비스를 상대로 승리한 베리엘이 득의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그래. 뭐… 좋으면 된 거지.
나름 치열한 승부긴 했다.
짝짝짝.
진혁이 진심을 담아 갈채를 보냈다.
“어? 너는….”
그제야 진혁을 발견한 베리엘이 쪼르르 달려왔다.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몸매.
머리에 난 작은 뿔.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모습이다.
“내・・・ 내… 내 사도가 되거라!”
베리엘이 진혁에게 외쳤다.
나름 왕관을 무려 2개나 가진 위협적이고 강력한 마왕의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던 모양.
하지만, 어쩌냐.
그러기엔 너무 하찮아 보이는데 말이지.
“네가 내 사도가 되어라.”
“뭐? 그, 그건….”
“말 더듬지 말고. 날 믿고 따라. 계속 그래왔듯이. 그러면 이번에도 승리하는 쪽이 될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베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뒤바뀐 사고와 익숙하지 않은 몸.
그런데도.
그토록 처절하고 절망적인 전선을 함께 넘어왔던 기억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뭐, 뭐. 정 원한다면… 못 해줄 것도 없긴… 해. 알지? 특별히 해주는 거야.”
베리엘이 세 번째 동료로 합류했다.
***
같은 시각.
숲의 한쪽에서는 치열한 전투에 쉼표가 찍혀 있었다.
“바보 성녀랑 바보 검성이 짐의 동반자에게 패하였다. 당연한 일이긴 하다만, 작은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꼬리를 말았다고 하더군.”
188cm에 이르는 탄탄하면서 슬림한 체형,
허리까지 오는 긴 은발을 가진 미청년으로 변한 엘리스가 으르렁댔다.
“모깅!”
그러자 옆에 있던 고구마가 네 발을 마구 굴렀다.
고구마에게도 뾰족하고 귀여운 속눈썹이 자라나 있었다.
“대장 말이 그들은 고인물 코퍼레이션 중 최약체였다고 하네.”
귀여운 소년의 모습으로 변한 운디네가 대신 해석해주었다.
“홀홀홀. 제자의 성장을 보니 아랫배가 뜨거워지려고 하는구나.”
4m에 이르는 근육질의 여인이 진한 웃음을 흘렸다.
암황.
TS는 통상 모든 대상을 너프시키는 게 정석이었으나, 흑천마황공을 익힌 암황은 오히려 기존보다 훨씬 더 강해져 버렸다. 이곳에 오면서 홀로 올림포스의 주신 셋을 박살 내 버렸으니까.
“주군…”
암황의 곁에 서 있던 월영이 조용히 그 이름을 곱씹었다.
청초하다 못해 한 떨기 꽃잎같이 가녀린 외모.
하늘거리는 무복을 입은 월영이 자신의 검을 꼭 붙잡았다.
그렇게.
“지금부터 이 3대 세력의 연합을 선포하겠느니라!”
엘리스가 당당하게 전쟁의 시작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