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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만렙 뉴비 875화


875화. 흉수(手)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칼이나 총에 당했을 때?

독버섯 수프를 먹었을 때?

아니면 사람에게 잊혀질 때?

전부 아니다.

단언컨대 흑화한 의대생이 눈싸움 살인마로 돌변할 때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태, 태민아! 도와줘! 나 죽는다. 진짜 죽어!”

진혁이 한쪽에서 열심히 드론들을 조종하고 있는 이태민을 향해 외쳤다.

“네! 형!”

[이태민이 고유능력 ‘기계 군주’를 발동합니다!]

[Lv33 ‘스노우 발칸포’가 발동됩니다!]

퍼퍼퍼퍼퍽!

눈덩이들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한 개 한 개는 별거 없었으나, 수백 개가 넘는 시점에서는 전투의 영역에 가까웠다.

“아핫! 뭐야 오빠들. 다시 한번 붙는 거야? TS 물약 때는 활약을 못 해서 아쉬웠는데!”

유연화까지 가세하면서 더욱더 열기가 거세졌다.

[이태민이 고유성창 ‘라스트 마이스터’ – ‘콜 오브 드랍쉽’을 발동합니다!]

죽음의 백조라 불리는 B2폭격기.

수백 킬로그램의 눈덩이를 실은 편대가 일제히 활강을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

쏟아지는 눈은 차라리 눈사태라고 보는 게 옳으리라.

그렇게 서로의 뒤통수를 치는 폭풍이 지나가고.

“다들 식사하세요!”

“후후. 노는 것도 좋지만, 공복은 건강에 좋지 않답니다?”

테레사와 추혼사영 그리고 엘리스가 준비한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졌다.

한참을 놀고 나서 먹는 뜨거운 라면과 우동, 그리고 직접 싼 소불고기 김밥과 참치마요 김밥까지.

메뉴는 너무나도 훌륭했다.

“엣헴! 계약자! 어여쁘고 귀여운 새색시가 만든 김밥이니라! 계약자가 좋아하는 걸 듬뿍 넣었지!” 

물론, 함정 카드가 섞여 있긴 했다.

진혁이 세모눈을 뜬 채 엘리스를 바라봤다.

“이게 뭐야?”

“민초김밥이다! 녹기 전에 먹거라. 정확한 재료는 구하지 못해서 대충 기억나는 대로 만들어보았다.”

식기 전에 먹으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녹기 전에 먹으라니.

거기서부터 이미 모든 게 글러먹었다.

“엘리스.”

“응!”

“진정한 민초파는 디저트에만 민초를 추가하는 거야. 이렇게 식사류에 민초를 섞는 건 진정한 민초파가 아니라고.” 

민초 치킨이나 민초 피자 같은 건 반(反)민초파들의 모략이다.

대중에게 민초에 대한 혐오를 심어주기 위한 아주 간악하고 더러운 수작이란 말이다.

“그래서 안 먹겠다는 것이냐? 짐이 1시간 넘게 애써 준비한 것을?”

엘리스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젠장.

발세테르가 쌍욕을 박으면서 안 한다고 한 게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려고 한다.

“유성 공자. 아앙 해보세요. 아앙.”

“스, 스승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후후.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우리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백년가약을 맺은 사이인데요.”

세삼 저 멍청한 검성과 추혼사영이 부러워지는 때가 올 줄이야.

“누나. 고기만 먹지 말고. 여기.”

“으응.”

이태민과 유연화 커플도 달달하긴 마찬가지였다.

“97|!”

고구마가 다가와서 진혁의 다리를 쿡쿡 찔렀다.

그래. 우리 구마밖에 없구나.

상황이 힘드니 응원해주려고 온 거야?

이래서 잘 키운 고구마 하나가 열 사원 안 부럽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배애.”

고구마가 입에서 침이 잔뜩 묻은 마정석을 뱉었다.

나름 아끼는 걸 특별히 나눠줬다는 듯.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가득했다.

이거 먹으라고 준 거겠지?

“너도 좀 가라.”

세상이 미워지려고 한다.

***

정신없는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들 이글루 안에서 따뜻하고 노곤노곤한 시간을 보냈다.

호로록. 영하 30도까지 떨어진 강추위. 이와 대조적으로 화염 마법과 보온 마법을 겹겹이 두른 이글루 내부는 아늑하다 못해 몸이 녹아내리려 했다.

“헤헤.”

산타복을 입은 엘리스가 뜨거운 크림 코코아를 양손으로 꼭 쥔 채 마셨다.

입가에는 하얀 거품이 가득 묻었다.

“에휴. 이리 와 봐.”

진혁이 즉시 휴지를 뽑았다.

그러자.

“휴, 휴지 말고.”

“응?”

“그, 계약자의 세계에 있는 드라마 보면. 그・・・ 있지 않느냐!”

설마. 그걸 말하는 건가?

일명 거품 키스.

요즘 드라마 정주행에 푹 빠진 엘리스는 이태민이 만든 휴대용 TV를 보물 1호로 삼고 있었다.

엘리스가 두 눈을 꼭 감았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미인은 미인이다.

백옥 같은 피부에 눈송이 같이 하얀 머리카락.

뚜렷한 이목구비와 발그스름한 볼과 입술까지.

그 누가 이 소녀를 보고 수많은 적들을 쓸어버리는 최강의 진조를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럴 때마다 긴장하는 모습.

모든 게 생소하고 낯선 듯 가늘게 떨리는 어깨와 팔까지.

그 모습과 행동이 전부 귀여워 보였다.

진혁이 얼굴을 가까이 향했다.

한 손으론 엘리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더욱더 거리를 좁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다.

호흡과, 온기. 그리고 감정이 뒤섞인다.

그것은 코코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까?

‘달콤하네.’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이글루의 밤이 더욱더 깊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사박. 사박.

눈보라 사이로 낯선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진혁이 있는 곳을 향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릭 헤네시와 운영자들이었다.

“흐음. 타이밍이 좀 안 좋았나 보군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너란 애는.”

“흐으으, 너, 너무 추워. 화상 통화 같은 걸로 하면 안 되는 거였어?”

“트수. 너는 운영자란 게 고작 이 정도 추위에 징징대는 건가?”

“아. 어쩔티비. 추워 뒈지게 생겼는데, 운영자는 몸에 자동 발열 기능이라도 있냐?”

건장한 남자의 핀잔에 단발머리 여자가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탑의 정상을 정복하면서 부활하게 된 이들.

‘수리부엉이’, ‘새영환’, ‘JJ’, ‘1인 2닭’, ‘방구석 트수’와 다른 운영자들도 보였다. 진혁이 털이불을 끌어올려 엘리스의 얼굴까지 덮었다.

얘는 찬바람이 이렇게 들이닥치는데도 여전히 침까지 흘리며 단잠에 빠져 있냐?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다.

“프라이버시라는 것도 없습니까?”

진혁이 툴툴대며 서둘러 옷을 입고 일어섰다.

“하하. 죄송합니다. 저희도 가급적 낮에 찾아뵙고 싶었습니다만,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어서요.’

“무슨 일인데요?”

“그 전에 트수 씨 말처럼 워낙 추위에 떨면서 와서 말입니다.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주실 수 있겠습니까? 듣자 하니 루왁커피가 그렇게 향이 좋다고 하더군요.”

루왁 같은 소리하네.

여기가 만물 스타벅스인 줄 아나.

“구마가 뒤쪽에 한 무더기 싸놓긴 했는데, 어떻게 그걸 듬뿍 넣어서 끓여드릴까요?”

“차, 차가워지셨군요. 많이.”

“원래 신혼집에 예고 없이 함부로 들이닥치면 좋은 대접 받긴 힘든 법입니다.”

“생각해 보니 따뜻한 물이면 충분할 것 같군요.”

릭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젖은 중절모와 코트를 걸어두었다.

“그래서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입니까?”

“그게….”

릭이 뜸을 들이자, 옆에 있던 트수가 답답하다는 듯 나섰다.

“아 왜 이리 굼떠! 속 시원하게 말하면 되지. 우리가 온 건 누군가 아자토스의 고유 무장 중 하나를 50층 밖으로 소환해서 그래.

“푸웁! 콜록콜록.・・・뭐!?”

진혁이 마시고 있던 코코아를 그대로 뿜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순간 과부하가 걸렸다.

완전히 봉인된 50층에서 어떻게 궁전에 있는 무장을 빼돌렸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 게……

“몇 번째 무장이지?”

진혁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부유하는 흑안’과 ‘차원 브레이커’는 아직 봉인시켜 뒀을 때의 여파가 남아 있을 터.

설령 소환했다고 하더라도 아자토스 본인이 아니면 제대로 다루는 게 불가능하다.

“19번째 성물이야.”

방구석 트수가 짧게 답했다.

진혁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빌어먹을. 최악은 면했지만, 차악이 당첨이다.

아자토스의 고유 무장 중 하나이자 19번째 성물인 ‘침식하는 모래’.

발동 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운 데다 준비 기간도 길긴 하지만, 일단 모든 조건이 달성되면 엄청나게 골치 아픈 성물이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세계관을 구현한 뒤.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만 그 세계를 닫을 수 있는 능력.

일명 ‘차원 보구’라 불리는 종류였으니까.

이것 역시 아무나 다룰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누가 고유 무장을 빼돌렸는지를 알아내는 게 관건이 되었다. 진혁의 고민을 짐작이라도 한 듯 릭이 한 영상을 재생했다.

“한 번 보시죠.”

[‘기억의 구슬’이 발동됩니다!]

허공에 어두운 감옥의 모습이 나타났다.

“누군가 49층에 가둬둔 북유럽 세력을 전부 탈출시켰습니다.”

각 일족의 정예들이 손 하나 못 쓰고 쓸려나가는 모습.

특유의 검보랏빛 마력이 일렁이며 공간 자체를 집어삼키는 게 보였다.

자세히 얼굴이 나오진 않았지만….

태고의 존재들 중 유일하게 전 층계를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으며, 또한 수많은 기믹과 편법을 알고 있는 자는 단 하나뿐이다.

“니알라토텝.”

그래.

그 녀석밖엔 없다.

“맞습니다.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첫 번째 침식이 일어났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침식도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벌써 3번째란 말인가.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이 뒤에서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각 침식에 갈 수 있는 인원은 제한됩니다. 첫 번째 침식이야 상관없으나,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동시에 발생되었기 때문에 인원 배분이 필요하죠.. 

믿을 수 있는 동료들과 각 침식에 맞는 전략과 대응이 중요하다는 뜻.

“첫 번째 침식의 종류는요?”

“별로… 마음에 들진 않으실 겁니다. 다른 세계선의 엘리스 님과 싸워야 할 테니까요.”

‘타락한 자들의 회랑’에 갇혀 세월의 흐름 속에 풍화되어 가던 엘리스가 있다면…….

가주들에게 배신당하지 않고 절대 권력을 가진 세계선의 엘리스도 존재한다.

침식하는 모래에 의해 만들어진 IF의 세계.

그 안에서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지만 침식을 막을 수 있었다.

“…확실히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긴 하네요.”

진혁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엘리스를 바라봤다.

회랑에서 처음 만나서 결혼을 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그런데 다른 세계선이라고 하더라도 엘리스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할 수밖에. 그러나.

‘해야만 해.’

침식을 막지 못하면, 그쪽 세계선이 현실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온갖 고생을 하며 이룩한 이 세계가 송두리째 지옥으로 바뀌게 될 거라는 소리다.

[직업과 고유 성창, 고유 능력 및 스킬 포인트가 새롭게 정해집니다.]

[함께 갈 수 있는 인원은 1명이며, 동행자 역시 모든 상태창이 새롭게 정해집니다.]

[침식 목표: 블랙 캐슬의 내부에 있는 ‘순혈의 왕관’을 확보하거나 혹은 성채의 주인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를 죽이십시오.]

익숙한 능력들은 사용할 수 없다.

어떤 게 걸릴지는 랜덤이라는 말이겠지. 이거야 들어가서 확인해봐야 할 일이고. ‘누구랑 동행하느냐를 정해야 하는데.’

진혁이 후보군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능력이 달라져도 제 몫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결정하셨습니까?”

릭이 물었다.

“예.”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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