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28화 : 전복위화(5)
전복위화(5)
‘마지막 내용을 빼놓고는 정상적인 내용이 하 나도 없잖아. 금광을 캐는 사업도 아니고 무슨 수로 일 년 안에 투자 원금의 세 배를 버냐고.’
설우진은 순간적으로 눈앞의 계약서를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설가 포목점의 매출은 최근의 부흥기를 맞이 하기 전까지 한 달에 금자 쉰 냥을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게다가 거기서 재료비를 제하면 순 수익은 그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런데 일 년 매출이 육백 냥도 넘지 않는 가 게에 황금 일 천 냥을 투자하고, 오 년의 기한 내에 그 세 배인 삼천 냥을 상환하라니.
이건 말이 좋아 투자지 실상은 사기나 다름없 었다.
“투자 금액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십분의 일로 줄이시죠.”
설우진이 감정을 애써 추스르며 중재안을 내놨다.
황금 일백 냥도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였지 만, 그래도 일천 냥보다는 훨씬 나았다.
“고놈 참, 돈을 준다는데도 마다하는구나.”
‘그게 다 영감님 돈이라는 게 문제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가게의 역량으로 그만큼의 수익을 내는 건 불가능해요.”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내 계산으론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강무호는 도통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우진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지만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대화를 이어 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일 년 매출이 육 백 냥도 넘지 않는 가게에서 어떻게 천 냥이 넘 는 수익을 내겠어요.”
“쯧쯧, 이놈아, 투자금 일천 냥은 엿 바꿔 먹 을 셈이냐? 그 돈이면 설가 포목점을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크게 키울 수 있다. 그럼 자연히 매 출이 늘 테고 그만큼 수익도 늘지 않겠느냐!”
‘아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래서 사 람은 배워야 한다는 건가.’
강무호의 친절한 설명에 설우진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무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솔직히 낭인으로 세상을 떠돌 때는 머리를 쓸 일이 거의 없었다. 힘으로 해결하는 일이 대부 분이다 보니, 싸움만 잘하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보니, 그런 생 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됐다
단적으로 이번 일이 그랬다.
그에겐 아버지를 구해 낼 충분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힘을 갖고도 정작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제갈윤은 단번에 아버지를 구해 낼 비책을 제시했다. 설우진으로서는 자신의 무지를 한탄하는 것이 당연했다.
“계약할게요.”
설우진이 살짝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생각했다. 수결은 모를 테니 지장으로 대신해라.”
강무호가 벼루를 내밀었다.
설우진은 벼루 안에 남아 있던 먹물에 엄지를 살짝 담갔다 뺀 뒤, 서명란에 꾹 눌러 찍었다. 끼익.
바로 그때, 총단 안에서 제갈윤과 중년 사내 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둘은 강무호의 얼굴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단주님을 뵙습니다.”
“어르신, 오랜만입니다.”
“클클, 윤아, 네가 아주 재밌는 놈을 데려왔더구나. 꽤 유쾌한 시간이었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강무호가 제갈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하기야 무한의 상권과 무력을 쥐고 있는 두 세력의 인물들이니 교류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그럼, 방면에 힘을 써 주시는 겁니까?”
“계약을 했으니 당연히 써 줘야지. 늦어도 오늘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게다.”
강무호는 장담하듯 얘기했다.
이에 제갈윤은 믿는다는 표정으로 설우진 옆 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이 잘 풀려서 정말 다행이다.”
“모두 형 덕분이에요. 형이 아니었으면 이곳 으로 찾아올 생각도 못 했을 거예요.”
“후훗, 그 정도 가지고 뭘. 정 고마우면 시간 날 때 장포나 하나 만들어 줘. 이왕이면 두 마리 용이 어울리는 걸로.”
제갈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화답했다.
밤하늘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동호.
그 한복판에 한 척의 소선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조촐한 술상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사내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왼편에 앉은 이는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로 굵직한 이목구비에 왼쪽 눈을 가로지르 는 흉터가 인상적이었고, 오른편에 앉은 이는 백발의 노인으로 특이하게 적안을 하고 있었다
“봉뢰동이 비어 있었다고?”
노인이 술을 들이켜며 물었다.
“네, 우리보다 한발 앞서 누군가 들어간 것 같 습니다.”
“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봉뢰동 의 존재를 아는 건 우리 수호 가문들뿐인데.”
“그래서 저도 처음엔 사제들을 의심했었습니 다. 제게 마공을 뺏길 것을 우려해 선수를 친 것 이 아닌가 하고.”
“얼굴을 보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네, 사제들은 오히려 빈손으로 봉뢰동을 나 서는 제게 마공서를 내놓으라며 되레 검을 겨 눴습니다.”
좀체 표정의 변화가 없던 그의 얼굴에 감정의 뒤틀림이 엿보였다.
“마음이 많이 안 좋았겠군.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자라온 사제들일 텐데.”
“멸천지계에 참여키로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입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을 생각은 없나? 그 아이도 자네가 복수귀가 되어 미쳐 날뛰는 걸 보고 싶지는 않을 터인데.”
적안의 노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설영이는 강호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그 래서 제 몸이 망가지는 걸 알면서도 마천을 막 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한데, 탐심에 눈이 먼 쌍룡맹 놈들은 되레 설영이를 함정으 로 몰아넣고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 의도도 모르고 그곳으로 향했 을 것 같은가?”
“그래서 더 놈들이 용서가 안 된다는 겁니다. 놈들은 설영이의 순수한 마음을 철저히 이용하 고 짓밟았습니다.”
사내의 두 눈에서 진한 살의가 끓어올랐다. 격해진 감정은 내기의 발출로 이어졌고, 소선 주변이 풍랑을 맞은 것처럼 요란하게 물결쳤다
“전 쌍룡맹이고 마천이고 모두 용서할 수 없 습니다. 설영이를 죽게 만든 그 세력들, 반드시 제 손으로 깨부수고 말 것입니다.”
“천하에 다시없을 악인이 되는 길일세. 정말 후회하지 않겠나?”
“그 정도 각오도 없었다면 애당초 멸천회에 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사내는 다시 한 번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드 러냈다.
“내가 괜한 말로 자네의 심기만 어지럽힌 것 같군. 봉뢰동의 일은 내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그 만 황룡학관으로 돌아가 보게. 너무 오래 자릴 비우면 그자들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게 될 걸세.”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시 뵙는 그 날까지, 몸 보존하십시오.”
사내가 가볍게 포권을 하며 소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육지까지는 까마득히 먼 거리건만 그는 거침없이 수면 위에서 발을 튕겼다.
촤아악.
발끝을 타고 솟아오르는 물보라.
그의 신형은 눈 깜짝할 새 시야 너머로 사라졌다.
소선에 홀로 남은 노인은 남은 술잔을 기울이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수한 별들이 저마다 자신을 뽐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설영아, 미안하구나. 아무래도 네 부탁은 들 어주지 못할 듯싶다. 그래도 하늘 위에서 외롭 지는 않겠구나. 널 저리 끔찍하게 위해 주는 사 내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