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7화 : 억지 기연(3)
억지 기연(3)
틱.
설우진이 등짐 안에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 였다.
여느 비동처럼 야명주가 천장에 박혀 있는 게 아니었기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불이 필수 였다.
일렁이는 불길을 앞세워 설우진은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디뎠다.
‘드디어 첫 번째 암관이군.’
두 번째 기관까지 가볍게 해체하고 들어온 설 우진이 여러 개의 석판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겉보기엔 평범한 기관이었다.
일정한 순서에 따라 석판을 밟으면 해체가 되는.
그런데 그 평범함이 이 기관이 갖고 있는 진짜 무서움이었다.
설우진은 조심스럽게 석판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부가 알려 준 순서를 복기하며 한발 한발 신중하게 내디뎠다.
얼마 후, 설우진이 석판의 끝자락에 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기관은 성공 적으로 해체가 된 듯 보였다.
그런데 설우진의 얼굴에는 오히려 긴장된 빛 이 역력했다.
‘이 발을 떼는 순간 분명 비뢰침이 날아들 거 야. 감각도를 익힌 상태라면 몸이 알아서 반응 하겠지만, 지금의 몸으론 의식하고 피하는 수 밖에 없어.’
숨을 깊게 몰아쉬며 설우진이 석판에서 내려 왔다.
그 순간, 기관음이 울리며 날카로운 파공성이 연속적으로 일었다. 방향은 뒤쪽이었다. 설우 진은 잽싸게 밟고 온 석판 쪽으로 온몸을 던졌다.
파파팍.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길쭉한 쇠 침들이 빼곡하게 틀어박혔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온몸이 꿰뚫렸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휴우, 겨우 한고비 넘겼네. 얼마나 귀한 걸 숨겨 두고 있기에 이런 살벌한 기관들을 설치 해 둔 거야?”
설우진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저 너머를 바라봤다.
그의 사부도 기관만 해체했지 비동 안에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기관 해체가 끝나고 대금을 받으려는 찰나에 그를 고용했던 자가 살인멸구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비싼 의뢰일수록 뒤끝이 안 좋았던 선례가 있 어 연막탄을 챙겨 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산중고혼이 될 뻔했다.
‘파훼법을 안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야. 사부의 기억이 잘못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설우진은 신중하게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저, 정말 더럽게 춥네. 이걸 안 가져왔으면 정말 얼어 죽었겠어.”
마지막 기관을 해체하고 나온 설우진이 몸을 부르르 떨며 호리병 안에 든 술을 벌컥벌컥 들 이마셨다.
아직 술을 접해 보지 못한 몸이라 목이 타들 어 가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살기 위해선 힘들 어도 다 마셔야 했다.
화주의 열기가 빠르게 한기를 몰아냈다. 굳어졌던 몸이 풀리자 설우진은 정면의 석문 을 향해 다가갔다.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 없는 크기였다.
설우진은 석문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다 밖으 로 돌출되어 있는 부분을 가볍게 눌렀다.
순간, 요란한 기관음과 함께 석문이 위로 올 라갔다.
비동이 그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비동안은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설마, 저게 단가?”
설우진의 시선이 비동 한가운데 자리한 원탁에 꽂혔다.
원탁에는 오래된 책자와 검붉은 빛이 감도는 구슬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왠지 사부한테 속은 기분인데.’
설우진은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책을 들었다.
표지에는 벽뢰진천이란 글자가 어지러운 필 체로 겨우 그 뜻을 전했다.
설우진은 저자를 알 수 있을까 싶어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펼쳤다. 보통의 경우 그쯤에 연자에게 전하는 글을 남기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앞 장에 저자의 글이 적혀 있었다.
벽뢰진천은 천지간의 가장 강한 기운인 뇌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천고의 내가기공 이다.
뇌기를 두려워한 놈들은 이것을 두고 사공이네 마공이네 폄하하지만 벽뢰진천이야말로 소림의 반야심공이나 무당의 태극신공에 버금간 다 할 수 있다.
벽뢰진천은 행공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남들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일주천을 하 는 방식이 아니기에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 지만 몸을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내기의 수발 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용적인 측면에서 좌공 보다 더 낫다 말할 수 있다.
벽뢰진천은 총 네 번의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
그 네 번의 단계는 아래와 같은데, 하나의 벽 을 뛰어넘을 때마다 뇌기의 힘이 수배로 늘어 난다.
일단 축뢰, 뇌기를 쌓는다.
이단 제뢰, 뇌기를 자유자재로 부린다.
삼단 폭뢰, 뇌기를 터뜨려 사위를 무너뜨린다
사단 신뢰, 뇌기와 몸이 하나가 된다.
…….
연자라는 낯 뜨거운 말은 하지 않겠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본 좌조차도 밟아 보지 못한 신뢰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 원탁에 동 그란 구슬이 보이느냐? 그것의 이름은 뇌정으 로, 소림의 중들이 죽음 뒤에 남기는 사리와 비 슷한 것이다. 뇌정을 먹고 단숨에 벽뢰진천의 일단을 뛰어넘어라.
‘세상에 이런 괴이한 무공이 존재했다니.’ 비동안의 내공심법, 벽뢰진천은 설우진이 이 제껏 알고 있던 무공의 상식을 단번에 깨 버렸다.
낭인으로 지내면서 강호의 수많은 무공을 접 해 봤지만 단언컨대 벽뢰진천과 같은 무공은 없었다.
“이걸 익혀도 될까?”
설우진은 고민에 휩싸였다.
분명 저자의 말대로라면 벽뢰진천은 세상에 다시없을 신공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확신 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크큭, 천하의 낭왕이 겨우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하다니. 나도 모르는 새 진짜 애가 돼 버린 모양이야.”
설우진이 실소를 터뜨렸다.
낭인 시절의 그는 위험을 즐겼었다. 즐기지 않고서는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세계였기 때문이다. 설우진은 낭인 시절의 기억을 곱씹 으며 뇌정을 손에 쥐었다. 뇌기의 결정체답게 뜨거운 열기가 자연스레 손끝에 전해졌다. 꿀꺽.
설우진은 거침없이 뇌정을 목구멍 너머로 넘 겼다. 침이 닿자 뇌정은 그대로 녹아내렸고 이 후 전신 혈도를 따라 거침없이 흘러갔다.
“크, 크아악.”
뇌정에 담겨 있던 뇌기는 상상 이상으로 강렬했다.
고통에 익숙해져 있던 설우진조차 비명을 지 르며 바닥을 나뒹굴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데 쉼 없이 바닥을 구르는 동안 신기하게 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서서히 본래의 색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위기의 상황이 닥 치자, 본능적으로 벽뢰진천의 구결을 운기한 것이다.
기경팔맥에 쌓여 있던 노폐물들이 거침없이 흐르는 뇌기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된 길을 따라 뇌정이 단전에 자리 잡았다.
추월산 능선 위로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길게 드리워진 햇살이 비동을 비출 때 작은 인영이 빠르게 그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 움직임이 들고양이처럼 표홀하고 가벼웠다.
비동 주변에는 신추명과 다툼을 벌였던 적색 무복의 사내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시선이 모두 전면을 향해 있던 터라 미처 그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