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20화 : 정면 승부 (2)
정면 승부 (2)
“양수의 의뢰 내용이 적힌 장부가 필요해. 좀 갖다 줬으면 싶은데.”
“장부라면 지부장님께서 갖고 계십 니다.”
부하가 친절하게 장부의 소재를 알 려 줬다.
‘저 미친놈이 그걸 순순히 알려 주 면 어떡해? 금자 아흔 냥보다 더 귀한 게 장분데.’
냉무룡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 다. 그가 품에 지니고 있는 장부 안에는 지난 일 년간 흑야가 중계한 의뢰들이 상세히 수록돼 있었다. 그 안에는 불법적인 일들도 다수 포함 되어 있었기에 장부가 외부로 유출 되는 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 다.
“끄윽, 장부는 제게 없습니다.”
“네 부하는 있다는데?”
“녀석이 착각한 겁니다. 장부는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그게 누군데?”
“그건 저도 모릅니다. 의뢰를 받을 때만 나타나는지라.”
냉무룡은 최대한 그럴싸하게 말을 지어냈다.
하지만 설우진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 바로 여기서 의뢰를 넣지.”
“네?”
“의뢰를 받을 때만 나타난다며.”
순간, 냉무룡은 할 말을 잃었다. 자기가 파 놓은 함정에 스스로 걸려 든 꼴이었다.
냉무룡은 어쩔 수 없이 장부를 내 줄 수밖에 없었다.
“장부는 여기 있습니다. 대신 필요 한 곳에 쓰시고 바로 돌려주십시오. 저희에겐 밥줄이나 다름없는 물건입 니다.”
“맨입으로?”
“아까 위약금을 모두 까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설우진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냉무룡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찍어 누르며 원하는 바를 물었 다.
“그렇게 인상 쓸 것 없어. 어려운 일 시키려는 거 아니니까. 낭인들 중에 이 이름을 쓰고 있는 자들이 있는지 좀 찾아봐 줘.”
설우진이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그 위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후휘, 청유, 사마율.
그들은 전생에 설우진의 곁에 그림 자처럼 머물렀던 의형제들이었다. 그가 전생의 인연을 찾고자 하는건 순전히 역마삼귀 탓이었다. 티격 태격하면서도 한 형제처럼 붙어 다 니는 그들을 보면서 그동안 잊고 지 냈던 세 사람을 떠올린 것이다.
‘자식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설우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어렸다.
“대체 왜 전 안 된다는 겁니까? 성적도 저 자식보다 더 나은데.”
“쯧쯧쯧,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닌데. 이놈아, 네 주 제를 알아라. 어디 근본도 없는 것 이 감히 일검장의 자리를 노린단 말이냐!”
잘 정돈된 연무장 위.
중년 사내와 앳된 얼굴의 청년이 서로를 마주 보며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쾌검술로 이름 높은 중견 무가 극검보의 검술 사부였고 청년은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 하나였다.
문제의 발단은 일검장을 뽑는 시험 이었다.
청년은 그 시험에서 최고의 성적을 받아 냈다. 해서 당연히 일검장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될 거라 생각했 다.
한데 다음 날 발표된 일검장은 전 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수업을 들은 적 없는 극검보주의 손자가 일검장이 된 것이다.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했다. 내 결정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당장 여기서 나가라.”
“억울해서 그냥은 못 나갑니다.”
“허허, 이놈이 크게 혼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중년 사내가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주변에 있던 제자들은 그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청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네놈이 정녕.”
불같이 노한 중년 사내가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숙이면서 엄지 끝으로 손잡이를 살 짝 튕겨 올렸다.
쉭.
눈 깜짝할 사이에 날 선 검이 허 공을 갈랐다.
쾌검만을 추구해 온 문파답게 발검 과 동시에 검 끝이 청년의 눈앞으로 들이닥쳤다.
한데 청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 고 왼손을 들어 검을 붙잡았다.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맨손으로 빠르게 날아드는 검을 잡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젠 제 차롑니다.”
왼손으로 중년 사내의 검을 묶은 뒤 청년이 지체 없이 검을 뽑았다.
중년 사내가 보였던 것과 꼭 닮아 있는 발검술이었다.
검집을 빠져나온 청강검이 서슬 퍼 런 빛무리를 뿌리며 중년 사내의 얼 굴로 날아갔다. 그도 많이 당황했는 지 손에서 검을 놓고 부랴부랴 뒷걸 음질을 쳤다.
간발의 차이로 검 끝이 중년 사내 의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청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중년 사내가 애지중지 길러 왔던 턱수염이 허공에 흩날리는 장면을 목도한 것이다.
“교두님, 인생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재능 있는 제자를 이리 내치셔야 쓰겠습니까. 충고하는데 앞으로 밤길 조심하십 쇼. 전 교두님 말씀대로 근본도 없 는 천한 놈이라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청년이 검을 거두며 나지막한 목소 리로 경고했다.
중년 사내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아까처럼 자신 있게 소리 를 내지는 못했다. 청년이 하는 말 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알기 때문 이다.
‘하후휘, 이 징그러운 놈! 넌 무리 에 어울릴 수 없는 짐승이다. 네놈 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상대를 물어뜯는 것뿐이지. 본디 한 무리의 장 이란 기본적인 무력뿐 아니라 주변 인들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이 필 요하다. 한데 넌 그것이 심각하게 결여돼 있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 하는 한, 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 할 것이다.’
중년 사내는 떠나가는 하후휘의 뒷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 실패했다고?”
“죄송합니다, 설마 놈이 돈으로 낭 인들을 역으로 매수할 줄은 미처 예 상치 못했습니다.”
양수가 백무영 앞에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늘어놓는 거야? 잘못하면 우리가 관여한 사실 이 들통날 수도 있잖아.”
백무영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가 이토록 격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엄격하기로 유명한 황룡 학 관의 학칙 때문이었다.
황룡 학관에서는 의외로 관도들 간 의 다툼을 그리 엄격하게 제한하지 않았다. 싸우면서 성장한다는 초대 관주의 뜻을 따른 것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 가지만은 용납 하지 않았다.
바로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 이었다.
백무영은 설우진을 치워 내기 위해 낭인들을 고용했다. 이는 확실한 교 칙 위반이었다.
이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백무영이 아무리 천하 상단의 자제라 해도 퇴 학을 면할 수 없었다.
“도련님, 너무 걱정 마십시오. 흑야 는 하오문만큼이나 입이 무거운 곳 입니다.”
“크큭, 과연 그럴까?”
“웬 놈이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양수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 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설우진이 손 을 흔들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 다.
“네, 네놈이 여긴 무슨 일이냐?”
백무영이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그렇게 정색할 필요 없어요. 싸우려고 온 거 아니니까.”
“……?”
“선배, 이게 뭔 줄 알아요?”
설우진이 품 안에서 장부를 하나 꺼내 들었다. 장부의 표지에는 흑야 를 상징하는 검은 눈동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 새끼야, 흑야는 믿을 수 있다 며?
장부의 정체를 알아본 백무영이 사 나운 눈초리로 양수를 쏘아봤다. 양 수는 그 눈빛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 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깟 장부로 날 협박할 셈이냐?”
“후훗, 그깟 장부가 아닐 텐데요. 선배의 미래가 달려 있잖아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정도 로 이 백무영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가진 금력이면 학 칙 하나 어긴 것쯤은 가볍게 지워 버릴 수 있다.”
백무영은 자신했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황룡 학관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세속에 물들어 있었다. 본디 세속의 때가 많이 낀 곳일수록 금력의 힘이 커지기 마련인데 이번의 경우도 돈 을 좀 무리하게 쓴다면 충분히 무마 가 가능했다.
“후훗, 그럼 이 장부를 서천회나 남천회에 넘기면 어떨까요? 그들이라면 선배의 금력에도 휘둘리지 않 을 것 같은데.”
순간 백무영의 얼굴빛이 사색으로 변했다.
자신을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두 세력이다. 그곳에 장부가 넘어간 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안 봐도 훤했다.
“원하는 게 뭐냐?”
백무영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 그로선 참기 힘든 굴욕이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황룡 학관에서 쫓겨나는 순간 그가 그동안 누려 왔던 모든 것들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크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그저 돈 많은 선배님이니 용돈이나 두둑 이 챙겨 주십시오.”
‘응? 요구 조건이 너무 쉬운데. 혹 시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건가?’
돈을 달라는 얘기에 백무영은 고개 를 갸웃거렸다.
뭐를 요구해도 다 들어줄 판인데 겨우 용돈이나 달라고 하다니. 의구 심이 드는 게 당연했다. 해서 백무 영은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정말 용돈이면 되냐?”
“네. 그거면 충분해요.”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백무영이 단단히 못을 박으며 책상서랍 안에서 두툼한 전낭을 꺼냈다.
“은전 오백 냥이다. 서안의 물건이 조금 비싸기는 해도 이 돈이면 열흘은 거나하게 놀 수 있을 거다.”
백무영이 전남을 던졌다.
설우진은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 었다.
그리고 곧장 발길을 돌려 문밖으로 나서려 했다.
이에 백무영이 다급히 소리쳐 그의 발을 붙잡았다.
“야, 돈을 받았으면 장부는 주고 가야지.”
“제가 언제 장부를 드린다고 했었나요?”
“그, 그건 아니지만.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줬잖아. 그럼 당연히 돌려줘 야 맞지.”
백무영은 강하게 요구했다.
이번만큼은 쉬이 물러서지 않겠다 는 의지가 느껴졌다.
“선배, 이 장부가 은자 오백 냥의 값어치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당장 서천회나 남천회에 넘겨 도 그 열 배는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방금 전에 받아 간 돈은 뭐냐?”
백무영이 울컥해서 되물었다.
“그건 첫 달 치 용돈이죠. 달이 넘 어가면 또 받으러 올 테니 미리 준 비해 두세요. 그리고 이 장부는 선배가 졸업하는 날 드릴게요, 졸업 선물로.”
설우진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장부 를 흔들어 보였다.
그 순간 백무영이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다.
“오늘 너랑 나, 둘 중 하나는 죽는 다.”
백무영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설우 진에게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두 팔이 큼지막하게 부 풀어 올랐다.
서장밀교의 대표무공인 대수인이었 다. 대수인은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패도적인 성질의 장법으로 내력 소모가 심한 대신에 그 한방 한 방이 위협적이었다. 쾅쾅쾅.
대수인이 방 안 곳곳에 자신의 흔 적을 남겼다.
고급스러운 자단목 탁자는 반 토막 이 났고, 바닥에 깔린 대리석은 산 산이 부서졌다.
한데 정작 맞혀야 할 대상은 한 번도 맞히질 못했다.
‘쯧쯧, 전형적인 불량품이네. 하긴 기초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상태에 서 내공만 들입다 채웠으니 저리될 밖에.’
설우진은 백무영의 몸놀림을 보며 그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한눈에 알 아봤다.
백무영이 구사하는 대수인은 분명 수준급이었다. 정타를 허용한다면 설우진도 위험할 정도였다. 한데 정 확도가 너무 떨어졌다.
그 원인은 바로 두 다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