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24화 : 황하 출두 (3)
황하 출두 (3)
“형님, 그 봇짐 어떻게 하실 겁니 까?”
“일단 안에 쓸 만한 것들은 모조리 챙겨야지. 마을을 위해 고생하는 건 우린데 엉뚱한 것들이 혜택을 누리 게 할 수는 없잖아.”
“나중에 촌장님이 알게 되면 큰일 나지 않을까요?”
“큰일은 무슨, 다 늙어 빠진 영감 이 뭘 할 수 있겠어. 더군다나 지금 은 눈엣가시 같던 상윤이도 없잖아.”
길보성과 서상윤은 신하촌에서 함 께 나고 자란 친구 사이였다. 어릴 때만 해도 서로 죽고 못 살 정도로 친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벽은 바로 열등감이었 다.
서상윤은 열 살 무렵부터 다니기 시작한 학관에서 신동으로 불렸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도 어려워하는 사서삼경을 줄줄 욀 정 도로 뛰어난 머리를 자랑했다. 게다 가 공부만 잘하는 샌님이 아니라 운 동도 곧잘 했다. 특히 축국에서 매 번 같은 편을 승리로 이끌며 학관내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그에 반해 길보성은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힘만 센 바보로 통했다. 운동할 땐 발군의 실력을 보여 주는 데 시험만 봤다 하면 맨 뒷자리에서 도통 벗어날 줄 몰랐다.
길보성은 서상윤을 따라잡으려 안 간힘을 썼다. 한데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벌어졌다.
“촌장 영감이 무서운 놈들은 여기 서 빠져.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 으니까.”
길보성이 으름장을 놓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이에 망설임을 보이던 청년들이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바위로 이뤄진 가파른 언덕배기. 열 살쯤 돼 보이는 어린 소녀가 아슬아슬하게 아래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저거면 상이한테 죽을 끓여 줄 수 있어.”
소녀의 시선이 향하는 자리에는 석 이버섯이 좁은 범위에 군집을 이루 고 있었다.
석이버섯은 바위에 붙어 자라는 식 용버섯으로 독특한 생김새와 식감으로 미식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 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소녀가 조막만 한 손을 내뻗었다. 금방이라도 석이버섯이 손끝에 닿 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석이버섯을 쥐려는 순간 몸을 지탱하고 있던 왼 발이 미끄러졌다.
반사적으로 석이버섯을 쥐려던 손 으로 바위를 붙잡았지만 아래로 미 끄러지는 힘을 거스르기엔 아귀힘이 너무 약했다. 소녀의 몸이 속절없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이대로 떨어진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
그런데 바로 그때 소녀의 발밑으로 길쭉한 물건이 날아들었다.
그 물건은 바위 안쪽에 그대로 쑤셔 박혔고 소녀는 간발의 차이로 그 곳에 안착했다.
“야, 죽으려고 환장했냐?”
소녀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림자의 정체는 조인창을 앞서 보 내고 느긋하게 산을 내려오던 설우 진이었다.
“구,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소녀는 벌벌 떨면서도 설우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고마운 줄 알면 다음부턴 이런 무 모한 짓 하지 마. 저깟 버섯이 뭐라 고 목숨을 걸어.”
설우진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소녀를 나무랐다.
한데 그 말이 서러웠는지 갑자기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야, 왜 울어? 내가 뭘 어쨌다고.”
“흑흑, 저 버섯 상이 줄 거예요. 우리 상이 사흘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단 말이에요.”
“왜 아무것도 못 먹어? 너희 부모님은 어쩌고.”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소녀의 두 눈이 금세 눈물로 범벅이 됐다.
“그럼 다른 친척은?”
“마을에 큰어머니가 한 분 계시긴 한데……… 저희 남매를 싫어하세요. 쓸데없이 밥이나 축낸다고.”
“뭐 그런 빌어먹을 인간이 다 있어. 애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 고.”
설우진은 소녀의 큰어머니 얘기에 제대로 열이 받았다.
소녀의 몸은 바짝 말라 있었다. 키 가 작은 건 둘째 치고 팔다리가 학 의 그것처럼 가늘었다.
“저어, 아저씨, 저것 좀 대신 따 주시면 안 될까요? 대신 제가 맛있 는 무침 만들어 드릴게요.”
소녀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석이 버섯을 가리켰다.
이에 설우진은 가볍게 바위를 박차 단숨에 석이버섯이 군집해 있는 바 위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부지런히 손을 놀려 석이버섯을 채취한 뒤 바지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이거면 됐지?”
어느새 소녀의 곁으로 돌아온 설우 진이 손안 가득 잡혀 있는 석이버섯 을 내보였다. 소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환한 미소로 설우진의 노력에 화 답했다.
“이 버섯은 순전히 네 노력으로 얻 은 거니까 다른 사람 주지 말고 동 생하고 단둘이서만 먹어.”
“네.”
“그럼 난 이만 간다. 인연이 있으 면 또 보겠지.”
설우진은 소녀에게 석이버섯을 듬뿍 안겨 준 뒤 홀연히 사라졌다.
“상아!”
버려진 토굴 안으로 소녀가 들어왔다.
안쪽에는 소녀와 똑 닮은 소년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누, 누나.”
소년이 힘겹게 소녀를 불렀다.
몸을 일으킬 힘도 없는지 손만 겨우 흔들었다.
“몸은 좀 괜찮아?”
“으응, 아까보단 많이 좋아졌어.”
“거짓말, 아직도 얼굴이 이렇게 창 백한데.”
소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소상의 얼굴을 매만졌다. 남동생은 어릴 때 부터 몸이 약했다.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나온 영향이 컸다.
“상아, 조금만 기다려. 이 누나가 맛있는 버섯 죽 끓여 줄게. 이거 먹 으면 확실히 기운이 날 거야.”
소교가 한 손에는 작은 돌솥을 다 른 한 손에는 석이버섯을 쥐고 토굴 을 나섰다. 가까운 곳에 계곡이 있 는지 물 흐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 려왔다.
잠시 후 계곡 근처에 소교가 자리 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주변의 돌을 주워와 화덕을 쌓더니 이내 돌을 부딪쳐 불씨를 만들었다.
화덕 안에서 시원하게 불길이 피어 올랐다. 그 위에 마른 장작을 얹고 나니 그 기세는 더욱 사나워졌다. 이때 소교는 버섯을 씻어 물을 절 반쯤 채워 넣은 솥 안에 집어넣었 다. 물기가 닿자 마른 잎사귀 같던 석이버섯이 탱탱하게 살아났다.
소교는 반 시진가량 석이버섯을 푹 익혔다.
별다른 양념을 넣지 않았는데도 버 섯 특유의 풍미가 코끝에 전해졌다. 소상이 먹기 딱 좋을 상태가 되자 소교는 지체 없이 돌솥을 토굴 쪽으 로 옮겼다. 뜨거운 김이 얼굴을 그 대로 적셨지만 그녀는 동생을 배불 리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미소로 그득했던 얼굴이 토굴 앞에 선 순간 겁에 질린 토끼처 럼 굳어졌다.
소교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명 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눈꼬리 가 양쪽으로 치켜 올라간 것이 보통 의 성품은 아닌 듯 보였다.
“아픈 동생을 놔두고 어딜 다녀오 는 게냐?”
중년 여인이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상이가 너무 배고파해서………… 버섯으로 죽을 좀 끓여 왔어요.”
“버섯은 어디서 난 게냐?”
“저쪽 바위 절벽에서.”
‘가만, 바위에서 딴 거면 그냥 버 섯도 아니고 석이버섯이잖아. 저년이 어떻게 거길 내려가서 그 귀한 걸 딴 거지?’
중년 여인 손추향은 소교의 말을 듣고 날카로운 눈매를 들썩였다. 석이버섯이 자생하는 바위 절벽은 마을의 장정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 하는 곳이었다. 경사는 그리 가파르 지 않지만 지반이 약해 발을 지지하 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거 이쪽으로 가져와 봐.”
손추향이 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이건 저희 상이 먹일 거예요.”
“누가 빼앗아 먹는데? 잔말 말고 가져와.”
소교의 반항을 용납지 않는 손추 향.
결국 기세에 눌린 소교는 솥을 그 녀의 앞으로 가져갔다. 손추향은 손 끝으로 쓸어 향을 맡아 보더니 이내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 었다.
“이년아,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 인데 이리 좋은 걸 얻었으면 어른들 부터 챙겨야지. 내 마을 어르신들께 나눠 드리고 올 테니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손추향이 자연스럽게 돌솥을 빼앗 아 들었다.
소교의 가녀린 손목은 그녀의 억센 손아귀를 이겨 내지 못했다.
“크, 큰어머니, 그럼 상이 몫이라도 조금만 덜어 주세요.”
솥을 빼앗긴 소교가 손추향의 팔에 매달려 애원했다.
“누가 다 먹겠대! 너희들 몫은 확 실히 남겨 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 리고 있어.”
손추향은 소교의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누나.”
토굴 안쪽에서 소상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소교는 동생을 안심시키려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다급히 토굴로 들어갔다.
“미안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미안해.”
“나만 아니었어도 누난 편하게 살수 있었잖아. 철이 아저씨 따라가서.”
“너,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서, 설마 큰어머니가……………”
소교의 순해 빠진 두 눈에 전에 없던 적의가 떠올랐다.
그녀는 일 년여 전쯤 마을을 찾아 온 한 상인의 눈에 들었었다. 그 상 인의 이름은 차기철이었는데 셈에 밝은 소교의 자질을 높게 평가해 양 녀로 들이려 했었다. 그런데 소교는 동생의 곁을 지켜야 한다며 이를 거 부했다. 물론 동생에게 상처가 될까 봐 그 사실은 철저히 함구했었다.
‘용서 못 해.’
소교가 두 주먹을 움켜쥐고 토굴밖으로 나섰다.
“큰 도움을 받았는데 최소한 저녁은 대접해 드려야지요.”
야산에 넓게 자리한 공터.
그곳에는 임시로 지어진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천막들은 서 노인이 홍수에 대 비해 미리 마을 공동 자금을 이용해 구입해 놓은 것들이었다.
처음엔 쓸데없는데 돈을 쓴다며 주변의 반발이 심했었는데 홍수가 난 뒤에는 반대하던 작자들이 되레 천막을 차지하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이쪽입니다.”
서 노인이 조인창과 설우진을 공터 중앙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마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도록 여러 개의 화덕이 설치돼 있었다.
그리고 화덕 반대편에는 다수의 인 원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대나무를 잘라 만든 길쭉한 모양의 식탁이 자 리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변변찮 은찬이지만 한 끼 식사로는 충분할 것입니다.”
서 노인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우진아,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이 마을 인간들 도통 맘에 안 들 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아까 그 자식들 하는 거 못 봤 어? 제 놈들이 하기 싫은 일들은 모두 너한테 떠맡겼잖아.”
설우진은 소교와의 짧은 만남이 있 은 후 신하촌에서 조인창과 재회했 다.
조인창은 그가 온 줄도 모를 정도 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바 닥에 겹겹이 쌓인 진흙을 정신없이 퍼내고 또 그것을 수레에 담아 강변 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정작 일을 해야 할 마을 청년들은 조인창의 눈치를 슬슬 살 피며 요령을 피웠다. 특히 진흙이 가득 실린 수레를 끌 때면 어김없이 딴짓을 했다.
“홍수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사람들이잖아. 일을 하고 싶어도 힘 이 없어서 못했을 거야.”
“그래그래,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 가 무슨 말을 하겠냐. 아무튼 난 내 일 볼일 보러 간다.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늦어지면 먼저 학관 으로 돌아가.”
“응.”
두 사람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사이 마을 처녀들이 저녁을 가져왔다.
한데 그것을 바라보는 설우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