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30화 : 만시지탄(3)
만시지탄(3)
“보기보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구 려. 마천의 신물이 왜 이곳에서 갑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하오?”
“설마, 우릴 끌어들이기 위해?”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구려. 그럼 우리의 대계를 위해 얌전히 이 곳에서 죽어 주시오.”
청무가 검을 눕혔다. 그리고 살짝 상체를 낮추고 왼발을 축으로 앞세 웠다. 특이한 모양의 출검세였다.
‘위험하다.’
화천규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 했다.
질풍검기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에 남은 내력을 모두 짜내 철선에 집중했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
화천규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뺨을 타고 턱 아래로 떨어졌다. 그 때를 같이해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 에 바닥을 박찼다.
양쪽에서 강기의 소용돌이가 휘몰 아쳤다.
둘 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라 어느 한쪽이든 무너지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어 보였다.
쿠쿠쿵.
성질이 다른 두 개의 강기가 맞부딪치면서 강한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잠시 후 한 인영이 밖으로 튕겨 나왔다.
화천규였다.
심대한 타격을 입었는지 얼굴은 새 하얗게 질려 있고 입술 새로는 쉼없이 핏물이 흘러나왔다.
“멋진 공격이었소.”
청무가 검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 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이 지쳐 보였다.
“자네, 수호 가문이었나?”
화천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공방을 나누면서 청무의 무공 내력을 짐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청무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허허, 결국 진인께서 우려하던 사 태가 터지고 말았구나. 쌍룡맹이 수 호 가문의 역린을 건드렸다고 하더 니 기어이………….”
화천규는 군림마천과의 기나긴 전 쟁이 끝난 후 화산파의 장문인 청월 진인과 독대를 나눴었다. 단순히 다 도를 즐기는 자리인 줄 알고 찾아갔 는데 그 자리에서 청월진인은 뜻밖 의 얘기를 꺼냈었다. 바로 수호 가 문의 변심을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수호 가문은 군림마천과의 전쟁 당시 철저히 이용당했다.
강호를 수호한다는 기치 아래 그들 은 용감히 싸웠지만 돌아온 건 싸늘 한 배신감뿐이었다.
쌍룡맹은 철저하게 정보를 왜곡해 수호 가문을 사지로 밀어 넣었다. 마천이 사라진 강호에 수호 가문이 새로이 주인이 될까 겁을 먹은 것이 다.
쌍룡맹의 야비한 술수로 수호 가문 의 전력은 하나둘 깎여 갔다. 하지 만 수호 가문은 설마 아군이 자신들 을 속이고 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 지 못하고 쌍룡맹이 시키는 대로 움 직였다.
그 결과 다섯 개의 수호 가문은 정예의 대다수를 잃고 빈껍데기만 남았다. 뒤늦게 쌍룡맹의 악행을 알 아내고 분노했지만 복수를 마음먹기 엔 쌍룡맹이 너무 거대해져 있었다.
“복수를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은가?”
“후훗, 복수는 대계를 위한 명분일 뿐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오.”
“그럼 대체 무엇을 위해?”
“당신들이 오랫동안 누려 왔던 것.”
청무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가볍게 내려치기만 하면 저 목이 떨어지리라.
쉬익.
검이 아래로 향했다. 기력이 다한 화천규는 눈으로 그걸 보고서도 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청무의 등 뒤로 사나운 기세가 일 었다. 암습이었다. 청무는 할 수 없 이 검을 돌려 등 뒤에서 날아드는 물체를 막아 냈다.
텅.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돌 부스러기 가 공중에 흩날렸다.
청무는 놀란 눈으로 돌이 날아든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차갑게 얼어붙은 설우진이 서 있었다.
그는 한참 싸움이 펼쳐지고 있을때 후원에 도착했다.
둘 다 누구인지 모르기에 일단 조 용히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한데 둘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여태껏 풀 리지 않았던 의문점들이 풀리면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혈옥불 쟁탈전에 숨겨진 배후가 있 고 그 배후가 신하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임을.
‘고수다.’
청무는 바짝 긴장했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설우진 이 내뿜는 기세는 날 선 검처럼 살 갗을 쿡쿡 찔러 댔다.
“방금 전에 네놈이 지껄인 말, 모두 사실이냐?”
“…….”
“네놈들의 그 알량한 복수에 신하촌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걸 얘 기하는 거다.”
설우진의 입에서 신하촌이 언급되 자 청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 다.
‘낭패로군. 강호와는 아무런 관계 가 없는 곳인 줄 알았는데 설마 이 정도의 고수가 얽혀 있었을 줄이 야.’
청무는 당혹스러웠다.
분명 거사를 시작하기 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신하촌은 평범한 농촌 마을로 강호와의 연관성이 전혀 없 었다.
한데 느닷없이 눈앞에 신하촌의 이름을 언급하는 고수가 등장했다, 자신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내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인 모양이군. 그럼 일단 맞고 시작하자.”
천뢰도를 뽑음과 동시에 설우진의 신형이 청무의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극성의 빠름.
청무는 미처 피할 틈을 찾지 못하 고 다급히 검을 들어 내력을 주입했다.
검신 전체에 반투명한 기막이 쳐졌다.
탕.
천뢰도가 청무의 검신을 그대로 때렸다. 일격에 검을 부숴 버릴 기세 였다. 하지만 기막은 효율적으로 충 격을 상쇄시켰다.
“이런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으면 서 왜 비겁하게 양민들을 끌어들인 것이냐?”
첫 번째 공세가 막히자 설우진은 뇌기로 천뢰도를 감쌌다. 도기를 뭉 쳐 도강을 만들겠단 심산이었다. 잠 시 후 중첩된 뇌기가 강기화됐다.
“아무리 복수에 눈이 뒤집혔다고 해도 네놈들이 한 짓은 절대 용서받 을 수 없다.”
곧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도격. 빠름만을 중시했던 첫 번째 도격과 달리 이번에는 빠름에 변초가 뒤섞였다.
짧은 순간에 천뢰도가 수십 개의 도영을 그리며 청무를 덮쳐 갔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 이 되지 않을 정도로 변초는 농밀했 다.
하지만 청무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 지는 않았다.
변초를 읽어 낼 수 없다면 모두 쳐 내기로 마음먹고 질풍검기를 극 성으로 전개했다.
강기와 검기의 맞대결.
초반에는 대등한 듯 보였지만 싸움 이 백합을 넘어가자 그 차이가 여 실하게 드러났다.
뇌기를 기반으로 한 벽력도강은 질풍검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질 풍검기 특유의 예기도 벽력도강의 단단함 앞에서는 좀체 힘을 쓰지 못 했다.
결국 질풍검기의 방해를 뚫고 천뢰 도가 기어코 청무의 옆구리에 한 방 을 먹였다.
청무의 입술 새로 가는 신음이 새 어 나왔다.
잠시 스쳐 맞았을 뿐인데도 상처 부위를 인두로 지진 것처럼 살점이 녹아들었다.
공격을 허용한 뒤로 청무의 움직임 이 눈에 띄게 둔탁해졌다. 설우진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노골적으로 옆구리를 노렸다. 약점을 집요하게 물어뜯는 낭인의 습성을 따른 것이 다.
결국 그 집요함이 거세게 저항하던 청무를 무너뜨렸다.
옆구리에 신경이 집중되게 해 놓고 마지막 순간에 칼이 나아가는 방향 을 틀어 옆구리가 아닌 검을 쥐고 있던 오른팔을 갈라 버린 것이다. 그걸로 사실상 싸움은 끝이 났다.
‘빌어먹을, 여기서 내 꿈이 스러지 다니.”
청무는 허망한 눈빛으로 바닥에 떨 어진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찬 란한 미래를 열고자 제 발로 나섰는 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철없는 만 용이었다.
‘놈의 무공은 정도의 그것과는 거 리가 있어. 고로 화천규만 입을 다 물면 이번 일의 전모는 숨길 수 있 어.’
살기를 머금은 시선이 멀찍이 떨어 져 앉아 있는 화천규를 향했다. 화 천규는 내상이 심한지 마른기침을 해대며 가까스로 운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청무는 잠시 설우진의 눈치를 보다 기습적으로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 리고 남은 왼손으로 검을 집어 들어 앞으로 힘차게 내던졌다.
검이 날아가는 방향을 읽은 설우진 은 다급히 몸을 튕겼다. 하지만 그 의 발보단 내기를 머금은 검이 한발 더 빨랐다. 푹.
검이 화천규의 이마 한복판에 정확히 꽂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화천규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 미친놈아, 대체 무슨 짓을!”
잔뜩 열이 받은 설우진이 청무에게 윽박질렀다. 한데 청무는 그런 설우 진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스로 심맥 을 끊었다. 심맥이 끊어진 이상 대 라신선도 온다고 해도 살리는 건 불 가능했다.
“놈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감추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혈옥불을 이용해서 뭘 얻으려 했 던 걸까?”
용아보 근처에 자리한 객잔.
설우진은 그곳에서 몸에 밴 피 냄 새를 깔끔히 지워 낸 뒤 침상에 몸 을 눕혔다.
오랜만에 무리를 한 탓인지 몸의 피로가 상당했다.
한데 이상하게 정신은 또렷했다. 누울 땐 금방이라도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청무가 남겨 준 숙제 때문인지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혈옥불이 야기한 싸움으로 섬서무 림은 큰 내홍을 겪었었어. 한데 웃 긴 건 그 난리를 피우고도 혈옥불을 차지한 세력이 없었다는 거지.”
설우진은 전생의 기억을 천천히 되 짚었다.
그가 기억하는 바로 혈옥불의 주인 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누가 차지했는지 알 수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한데 홀연히 사라진 혈옥불이 남긴 후유증은 심대했다.
혈옥불을 차지하겠다고 저마다 쟁 투에 뛰어들면서 섬서에 기반을 두 고 있던 열다섯 개 문파가 거의 봉 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이다.
‘가만, 혹시 그 혈옥불이 마천이 들어올 길목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설우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 다.
군림마천이 재차 발호를 했을 때 섬서무림은 너무나 쉽게 그들의 진 군을 허용했었다.
막고 싶어도 막을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봉문을 하고 있던 화산이 부랴부랴 제자들을 내려보내기는 했지만 그들 만으로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내 가정이 맞는다고 한다면 왜 수 호 가문의 인물이 마천의 중원 진출 을 도운 거지? 단순히 복수를 위해서?”
설우진은 쌍룡맹과 수호 가문 사이 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쌍룡맹 측에서 하오문을 활용해 철저히 사실을 왜곡했기 때 문이다. 그래서 진실은 군림마천과 쌍룡맹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밝혀졌다.
그 진실을 알고 나서 설우진도 남 들 못지않게 쌍룡맹을 씹어 댔었다. 같은 편 뒤통수를 쳐 대는 행동만큼 야비한 게 없다고.
‘확실히 복수라는 동기가 어색하진 않아. 내가 수호 가문의 입장이었다 고 해도 무슨 수를 써서든 쌍룡맹에 앙갚음을 하려 했을 테니까. 근데 계속 뭔가가 마음에 걸려. 복수보다 더 근원적인 목적이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설우진은 뒤끝이 영 개운치가 않았 다.
거하게 일을 봤는데 뒤를 닦지 않 은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안 되겠어. 뻔히 놈들이 뭘 할지 아는데 그냥 돌아가는 건 나답지 않잖아. 더 많은 세력들이 몰리기 전에 혈옥불을 내 손에 넣고 야 말겠어. 그럼 놈들에게도 큰 타 격이 될 테지.”
설우진은 혈옥불을 차지하기로 단 단히 맘먹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 흘 만에 그 뜻을 이뤄 냈다.
그가 혈옥불을 찾은 건 청운학과 곡전해의 싸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당시 혈옥불은 청운학의 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