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6화 : 황룡 입성 (3)
황룡 입성 (3)
쌍룡맹은 십여 년 전 군림마천이 발호하고 중원 전역이 혼란에 휩싸 여 있을 때 전격적으로 결성됐다. 공통의 적을 부수자는 명분하에 절 대섞일 수 없을 것 같던 정도와 사도가 손을 잡은 것이다.
하나 된 정도와 사도의 힘은 쌍룡 맹이라는 이름 아래 맹위를 떨쳤다. 단일 세력으로는 최강이라 평가받던 군림마천조차도 그 힘에는 견뎌 내 질 못했다.
결국 쌍룡맹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패한 군림마천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에도 쌍룡맹은 그대로 존속됐다. 맹 내부에서 권력을 휘어잡고 있던 정 사 수뇌부가 힘의 구도를 그대로 유 지하자 암묵적으로 합의를 한 것이 다.
지난 십 년의 세월 동안 쌍룡맹은 중원 최고의 권력 집단으로 온전히 자리 잡았다.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들이 모두 전쟁의 여파로 그 힘 을 잃은 터라 쌍룡맹의 기세는 해가 갈수록 욱일승천했다.
그 과정에서 황룡 학관은 자연스럽 게 쌍룡맹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되었다.
“소저, 난 무인으로 성공하고 싶은 생각이 없소. 칼로 흥한 자 칼로 망 한다고, 무인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가 본들 칼에 피밖에 더 묻히겠소?”
자스민의 반문에 설우진은 담담하 게 대꾸했다.
낭왕으로 올라서는 길.
그 길은 수많은 이들의 피로 얼룩 져 있었다. 악의를 갖고 저지른 일 은 아니었지만 다시 그 길을 반복하 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억지로 꾸며 낸 말이 아니야. 한 창 호기 넘칠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성숙된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자스민은 가슴 한구석이 두근거렸다.
사내다우면서도 소탈하고 얼굴까지
훈훈한 남자. 그녀가 오랫동안 그려 왔던 이상형이었다.
짧은 망설임 끝에 그녀가 용기를 냈다.
“저기, 혹시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나요?”
그녀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어렸 다.
설우진은 뜬금없는 그녀의 물음에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 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에 그녀는 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나 솔직히 그쪽이 맘에 들어요. 제대로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역시, 누란 사람이라 그런지 화끈
하네. 싸미라 누님도 남편에게 먼저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더니.’
설우진은 자스민의 당돌한 고백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좋았 다. 솔직히 미인이 사귀자고 하는데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더욱 이 자스민의 몸은 중원의 여인들이 가지지 못한 풍만함을 지니고 있었 다.
“아직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르니 일 단은 친구로 지내죠.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좋아요, 그럼 우리 말도 편하게 놔요. 일단은 친구 사이니까.”
‘그럼 나야 고맙지. 아직도 이놈의 말투가 영 적응이 되질 않거든.’
설우진은 회귀한 지 삼 년이 지나 도록 좀체 말투에 적응을 하지 못했 다. 수십 년 동안 낭인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거친 말을 써 왔으니 쉽게 바뀔 리 만무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편하게 말을 놨다.
만난 지 불과 한 시진도 안 됐는 데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 은 수년을 알아 온 지우처럼 친해 보였다.
“그러니까, 자스민 네가 누란의 공주라고?”
설우진은 그녀의 신분을 알고 나서 화들짝 놀랐다.
누란은 비단길 북쪽에 자리한 소국 이다. 전체 인구가 일만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작은 나라지만 중개무 역을 바탕으로 성장한 경제력은 명 나라 조정도 무시 못 할 수준이었 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누란에서나 공주지 여기서는 그냥 흔해 빠진 부 잣집 딸일 뿐이니까.”
자스민은 공주답지 않게 소탈했다. 그녀 개인의 성향인지, 아니면 누 란이라는 나라의 성향인지는 몰라도 설우진은 그 소탈함이 맘에 들었다.
“근데,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공주 가 먼 길을 떠나는데 호위 하나도 안 붙인 거야?”
“아, 아까 같이 식당에 왔었는데 잠깐 집 구하러 나갔어. 아마 곧 돌 아올 거야.”
황룡 학관은 기본적으로 멀리서 온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그곳을 이용하는 학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도 그럴 게 황룡 학관에 들어오 는 이들 대다수는 유력 가문의 자녀 들이다. 서안의 물가가 아무리 살인 적이라고 해도 근처에 집 하나 얻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건 설 우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집을 안 가 봤 네. 어머니 말씀으론 아담하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거라 고 했는데.’
설우진은 그제야 자신에게도 집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설가장은 일품 점이 큰 성공을 거둔 뒤로 하루하루 재산이 쌓여 갔다. 강무호에게 받은 투자금을 단 삼 년 만에 삼분지 이 이상 갚아 버렸을 정도였다. 그래서 서안에 집을 구해야 한다고 말을 꺼 냈을 때도 가족들 중 누구 하나 반 대하는 이가 없었다. 설우진은 이 자리를 파하는 대로 집에 찾아가 봐 야겠다 마음을 먹고 다시 대화에 집 중했다.
“아까부터 계속 묻고 싶었는데 그 면사는 왜 쓰고 있는 거야? 누란이 위치해 있는 타클라마칸처럼 이곳에 모래바람이 이는 것도 아닌데.”
“아, 이거 그냥 멋으로 하는 거야. 중원의 여인들이 예뻐 보이기 위해 머리 장식을 하는 것처럼 우리 누란 에서는 이 면사로 멋을 내거든.”
그녀가 면사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자연스럽게 면사를 벗었다. 온전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이국적인 미 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큼지막한 두 눈에 콧대는 위로 오뚝 솟아 있 고, 붉은빛이 감도는 입술은 볼록하 면서도 도톰했다.
“벗으니까 더 예쁜데. 앞으론 면사 쓰지 말고 그냥 다녀.”
“정말 내가 예뻐?”
자스민이 기습적으로 얼굴을 들이 댔다.
순간적으로 둘 사이의 거리가 한 치 정도로 좁혀졌다.
‘누가 누란 여자 아니랄까 봐 엄청 적극적이네. 하지만 여기서 홀라당 넘어가 줄 순 없지. 쉽게 넘어가는 남자한테는 쉽게 질리는 법이니까. ‘
“얼굴 좀 치우지. 사람들이 다 쳐 다보잖아.”
민망함에 자스민의 얼굴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뒤부터 주도권은 설우진에게 완 전히 넘어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용소 녀석, 활의당의 월천이 말로는 손목뼈가 완전히 바스러졌다던데.”
정갈하게 꾸며진 방 안.
언기문이 바짝 얼어붙은 얼굴로 부 동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눈매가 날카롭게 선청 년이 책상에 두 다리를 올려놓고 앉 아 있었다.
청년의 왼쪽 가슴에는 천天 자 명 찰이 박혀 있었다.
“용성각에서 사소한 시비로 신입 관도와 싸움이 붙었습니다. 전 말리 려고 했는데 용소가 흥분해서 달려 드는 바람에 막을 수가 없었습니 다.”
“용소가 다른 무공은 몰라도 권각술엔 제법 조예가 깊을 텐데 어떻게 그 지경이 된 거지?”
“그게, 수법은 평범했습니다. 특별 한 초식을 쓴 것도 아니고 그냥 용 소의 주먹을 잡아채 오른쪽으로 비 튼 것이 전부였습니다.”
“호오, 그럼 단순히 힘으로 용소를 눌렀다는 뜻인데, 이거 검귀 못지않 은 신인의 출현인가.”
당세기는 설우진에게 강한 흥미를 보였다.
그는 현재 서른 명밖에 없다고 알 려진 천자 조의 일인으로 동심계 중 하나인 서천회를 이끌고 있었다. 황룡학관 내부에는 다양한 동심계 가 존재했다. 동심계는 같은 뜻을 품은 이들이 모인 일종의 모임으로 그 숫자는 수십 개에 달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동심계들 사이에 서 세 곳이 뚜렷한 세력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관도들은 그들을 가리켜 황룡삼천이라 칭했다.
황룡삼천은 새로 학생들이 들어오 는 시기가 되면 바쁘게 움직인다. 재능 있는 관도들을 미리 선점해 세 를 불리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당세 기가 설우진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그 신입, 어떻게 할까요?”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거야?”
“감히 서천회 식구를 건드린 놈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라 해도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 다.”
언기문은 복수의 의지를 강하게 내 비쳤다.
‘어디, 진짜 쓸 만한 놈인지 시험 을 해 볼까.’
당세기는 언기문의 청을 흔쾌히 수 락했다. 그리고 덤으로 서천회 내에 서 무력 서열이 꽤 높은 지 자 조 의 척무강까지 붙여 줬다.
두두두 둥둥.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와 함 께 황룡 학관에 새로이 발을 내딛는 신입 관도들이 하나둘씩 연무장으로 걸어 올라왔다. 출신 지역이 달라서 인지 몰라도 신입 관도들의 복색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남쪽에서 왔다는 해남검문의 자식 은 가슴을 반쯤 드러내 놓고 있었고 반대로 북쪽에서 왔다는 빙백궁의 제자는 두꺼운 털옷으로 온몸을 감 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보다 더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끈 건 누란의 공주, 자스민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깊이 파여 있는 상 의에 미끈한 다리가 훤히 드러난 짧 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사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합창을 했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낸 자스민과 달리 설우진은 집에서 평소에 입던 옷을 걸치고 연무장에 올랐다.
그런데, 그가 걸음을 옮기자 이번 엔 여자들 쪽에서 큰 소요가 일었다.
“저기 신입 관도가 걸치고 있는 옷, 일품점 거 맞지?”
“맞아, 저기 왼쪽 가슴에 일품이라 고 작은 글귀 보이지? 저게 바로 일품점의 상표야.”
“저 정도는 다른 가게에서도 충분 히 흉내 낼 수 있는 거 아니야? 글 자만 따로 수놓으면 되는 건데.”
“후훗, 일반 수실로 수놓는 거라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일품점은 금사 를 사용해. 너희들도 금사가 얼마나 비싼지는 알고 있지?”
여자 관도들의 관심은 설우진이 입 고 있는 옷에 쏠려 있었다. 그가 입 고 온 청색 경장은 가게에서 팔던 물건이었다.
어머니와 단예는 따로 만들어 주겠 다고 성화를 부렸지만 설우진은 그 마음만 받겠다며 그냥 가게에서 팔 던 옷을 손에 집히는 대로 챙겨 넣 었다.
“저 애 누굴까?”
“일품점의 옷을 입을 정도면 서안 고관대작의 자식이 아닐까?”
“그건 아닐걸, 봉황회에서 올해 입 수한 남자 신입 관도 명단에 서안 출신은 한 명도 없었어.”
“가만, 그러고 보니 한 달여쯤 전 인가 무한에서 온 친척한테 일품점 의 장남이 서안에 있는 학관에 들어 갈 거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 혹 시저 신입이 일품점 아들 아닐까?”
일품점 아들이라는 말에 여자 관도 들의 눈빛이 갑자기 뜨겁게 달궈졌 다.
최근 삼 년 사이 일품점은 철저한 고급화 전략으로 여성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입이 떡 벌어지는 고가 였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그 인 기가 대단했다. 우스갯소리로 일품 점의 옷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부르다 는 얘기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너희들, 신입 관도 상대로 무슨 응큼한 생각을 품고 있는 거야?”
신경전을 벌이는 여관도들 뒤로 낯 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 가의 천금인 남궁지연이었다. 삼 년 전에 봤던 앳된 얼굴은 온데간데없 고 지금은 만개한 한 떨기 장미처럼 화려한 미모를 뽐냈다.
“회, 회주님 나오셨어요.”
여관도들이 황급히 그녀에게 고개 를 숙였다.
남궁지연은 일 년 전부터 봉황회를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봉황회는 여 관도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동심계로 남다른 결속력을 자랑했다.
“곧 있으면 입관식이 시작될 거야. 외부 귀빈들도 많이 와 계시니 쓸데없는 데 관심 끄고 제자리로 돌아 가.”
“네에.”
그녀의 강경한 태도에 여관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들이 떠나가고 난 뒤, 남궁지 연은 연무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설우진이 서 있는 대열의 후미였다.
‘설우진이라고 했던가? 인연이 참 묘하네. 그때 길이 엇갈린 이후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남궁지연은 묘한 인연의 끈을 느꼈 다.
삼 년 전 그녀는 설우진에게 요대 를 주문한 뒤 갑자기 가문에 일이 생겨 급하게 안휘로 돌아가야 했다.
시급을 다투는 일이다 보니 가게에 들를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길은 엇갈렸고, 그녀는 설 우진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잊어 갔 다.
‘과연 지난 삼 년 동안 얼마나 변 했을까? 멀리서 보기엔 키도 좀 크 고 몸에 살도 더 붙은 것 같은데.’
남궁지연은 한동안 설우진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