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16화 : 낭왕 비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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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3권 – 16화 : 낭왕 비무 (2)


낭왕 비무 (2)

설우진은 화려한 공격에 현혹되지 않고 간간이 치고 들어오는 위협적 인 공격에만 대응했다.

그의 견고한 수비에 혈룡은 좀체 힘을 쓰지 못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어느 정 도 상처를 내고 있기는 했지만 결정 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선배, 어째 갈수록 칼끝에 실리는 힘이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설마 벌써 지치신 건 아니겠죠?”

설우진이 여유 있는 얼굴로 사준후 의 도를 밀어냈다. 사준후는 안간힘 을 쓰며 버텨 보려 했지만 폭뢰를 통해 배가된 설우진의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세 걸음. 사준후가 뒤로 밀려난 거 리다.

보통의 공방전이었다면 크게 의식 할 게 없는 수치였지만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는 상황에서 그 세 걸음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컸다. 

‘난감하군, 오성의 혈룡마라도로도 놈을 제압하지 못하다니.명문가의 후예도 아니라는 놈이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사준후는 설우진에 대한 궁금증이 크게 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궁금증을 풀기보 다는 당장의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 이 더 중요했다.

결국 그는 한참의 망설임 끝에 아 껴뒀던 비장의 패를 꺼내 들었다. 우우웅.

혈룡의 울부짖음이 커졌다.

그리고 뒤이어 혈룡의 전신에 강한 빛이 어렸다.

일반적인 검기보다 더 선명하고 강 렬한 빛이었다.

‘마음이 급하긴 했나 보군. 벌써부 터 도강이라는 패를 꺼내 든 걸 보 니.’

설우진은 사준후가 꺼내 든 패를 한눈에 알아보고 발 빠르게 대응했다.

강기는 무형의 기운, 즉 기가 응축 되어 유형화된 것이다.

만드는 과정이 까다로워서 그렇지 강기를 뽑아낼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에 못 부술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강기라고 해서 절대적인 건 아니 지.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삼 류 무사의 검보다 못할 수도 있어.’ 

설우진은 벽뢰진천의 뇌기를 발끝 에 응축시켰다. 순간적인 움직임을 내기 위함이었다.

그사이 도강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 은 혈룡이 정면으로 사납게 들이쳤다.

혈룡은 설우진이 피할 방위를 미리점하며 그를 비무대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끝났군.’

사준후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우진은 혈룡이 들이치는 마지막 순간에 천뢰도를 휘둘렀다. 언뜻 무 모한 행동처럼 비춰졌지만 혈룡과 맞닥뜨리는 순간 그의 몸이 팽이처 럼 돌았다.

강기의 힘을 역이용한 것이다. 그 것은 흡사 무당의 이화접목의 수법을 연상케 했다.

순간적으로 둘의 위치가 바뀌었다.

당황해하는 사준후의 등 뒤에서 설 우진이 환하게 웃었다.

“선배님, 안녕히 가십시오.”

짧은 작별 인사와 함께 설우진이 사준후의 둔부를 거칠게 걷어찼다. 예상치 못한 불의의 일격에 사준후 는 속절없이 비무대 밖으로 떨어졌 다. 두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버텨 보려 했지만 설우진의 발끝에 실려 있는 폭뢰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 었다.

쿵.

사준후가 보기 민망한 자세로 비무대 아래로 떨어졌다.

일순간 비무대 주변이 고요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다들 놀란 것이다.

바로 그때.

남궁천호가 바닥에 떨어진 사준후 를 흘깃 쳐다보고는 손을 들어 설우 진의 승리를 선언했다.

“와아아!”

그의 외침에 관객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새로운 신성의 출현에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자네, 혹시 무한 출신인가?”

“그걸 어떻게….?”

“동명이인인가 싶었는데, 역시 자네가 맞았군. 난 모용황이라 하네. 설이의 숙부 되는 사람이지.”

시합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길.

모용황이 설우진을 붙잡아 세웠다. 그러고는 간단한 통성명과 함께 모 용설의 안부를 전했다.

“설이는 본가에서 잘 지내고 있네. 아직도 집안의 행사가 있을 때면, 자네가 만들어 준 옷을 입곤 하지.” 

“아, 네.”

“바쁜일 없다면 식사나 함께하지.”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식사하면서 천천히 얘기 나누세. 길바닥에서 나눌 얘기는 아니니.”

모용황이 설우진을 이끌고 근처 식 당으로 향했다.

용봉각. 비싼 가격만큼이나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식당이었다. 특히 탕 요리가 유명해 독한 화주를 즐겨 마시는 이들이 자주 찾았다. 두 사람은 삼 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넓게 개방되어 있는 일이 층과 달 리 삼층은 여러 개의 방으로 이뤄 져 있었다. 조용히 얘기를 나누기에 는 제격인 장소였다.

“자네, 술 좋아하나?”

“좋은 술이라면 마다하지 않습니 다.”

“후훗, 술맛을 좀 아는 모양이군. 잠시만 기다리게. 용봉각의 별주를 맛보게 해 줌세.”

모용황이 천장에 매달려 있는 줄을 가볍게 당겼다.

잠시 후, 방 안으로 곱게 옷을 차 려입은 미녀가 환한 미소를 머금고 들어왔다.

비싼 집이라 그런지 점원의 미모도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용봉쌍화주와 어선탕을 가져다주게.”

“술은 몇 병이나……?”

“세 병 정도면 적당할 것 같군.”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바로 올리겠습니다.”

미녀 점원은 주문을 받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단둘만 남은 상황.

설우진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을 초대한 연유를 물었다.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군. 좋아 말 해 주지. 내가 자넬 여기까지 부른 이유는 석 달 앞으로 다가온 맹주님 의 고희연 때문일세.”

현 쌍룡맹의 맹주는 화산검선 황유 하였다.

그는 화산 속가 출신으로 여든이 넘은 나이에 노구를 이끌고 나가 마 천의 무사들과 용감히 맞서 싸웠다. 화산의 직전 제자가 아니었음에도 그가 휘두르는 매화검은 본산 제자 들의 것보다 오히려 날카로우면서도 사나웠다.

그로부터, 일 년 뒤.

황유하는 쌍룡맹의 맹주로 추대됐 다. 자격이 없다며 한사코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쌍룡맹의 양축을 이루고 있는 천중오가와 삼사보의 뜻이 너무도 강경했다.

결국 그는 쌍룡맹의 이 대 맹주로 정식 취임했다. 하지만 허울 좋은 명예직일 뿐이었다.

이름만 맹주라고 붙여 놨지 사실상 그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허수아비 맹주.’

설우진은 이름 대신 그의 별명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당시의 호사가들은 손발이 꽁꽁 묶 여 아무것도 못하는 황유하를 가리 켜 허수아비 맹주라 칭했다. 이에 사람들은 그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변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그에 게 비판의 날을 세웠다.

물론 설우진은 당장 먹고살기도 바 빴기에 그런 오지랖 넓은 짓거리에 동조하지 않았다.

“맹주님께 드릴 선물이 필요하신 겁니까?”

설우진의 물음에 모용황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 제작은 가게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비쌉니다.”

“후훗,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불하겠네. 대신 옷을 짓는 데 각별히 신 경을 써 주게.”

‘하긴 쌍룡맹 정도면 월봉도 어마 어마할 테지.’

“그럼, 옷에 꼭 넣기를 원하는 문 양이 있으십니까?”

“화산의 그늘 아래 평생을 살아오 신 분이네. 당연히 매화 문양을 넣 어야 하지 않겠나?”

모용황이 매화 문양을 추천했다. ‘하긴, 화산 사람들 치고 매화 안 좋아하는 인간이 없지. 특히 도진 그 양반이 중증이었는데.’

설우진은 모용황과 옷에 대한 얘기 를 나누면서 화산파의 사이비 도사 도진을 떠올렸다.

도진은 진자 서열의 화산 직전 제 자였다.

하지만 도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품행이나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특히 술과 여자에 환장을 했다. 기루에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설 우진과 함께 몇 차례나 상단 호위를 뛰었을 정도였다.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학업과 병행해야 하니, 아무리 빨 라도 두 달은 기다리셔야 할 것 같 습니다.”

“알겠네. 그 일정에 맞춰서 돈을 준비함세.”

둘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

여점원이 용봉쌍화주와 어선탕을 가져왔다. 용봉쌍화주는 주향이 그 윽했고 어선탕은 뽀얀 국물에 얼큰 한 향기를 풍겼다.

“자, 한 잔 받게.”

모용황이 용봉쌍화주를 술잔에 따 랐다.

용봉쌍화주는 은은한 붉은빛을 띠 고 있었다. 잔이 모두 채워지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용봉 쌍화주를 들이켰다.

‘알싸하면서도 뒤끝에 청량감이 감 도는군. 구지선엽초와 삼화설련은 맛이 강해 서로 겉돌기 마련인데 이 술은 제대로 어우러졌어.’

설우진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후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용 봉쌍화주를 쉴 새 없이 들이켰다.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둘 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내기를 끌어 올리 지 않았기에 주독이 그대로 몸 안에 쌓인 것이다. 물론 지금도 맘만 먹 으면 단번에 그 주독을 밖으로 뽑아 내거나 태워 버릴 수 있었다.

“자, 자네, 보기보다 술이 세군. 나 도 어디 가서 술로는 뒤지지 않는데 자넨 도저히 못 당하겠어.”

“전 아직 젊지 않습니까! 타고난 주당이라도 세월 앞에선 장사가 없 는 법입니다.”

“허허,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의 위안이 좀 되는군. 근데 자네 사람들이 맹주님을 가리켜 뭐라고 하는 줄 아는가?”

“하긴 내 앞에서 말하긴 곤란하겠 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 허수아비 맹주님이 계시기에 지금의 강호가 평화로울 수 있는 거라네. 양쪽에 치이면서도 강호의 안위를 위해 하 루하루 버텨 내시는 게지.”

모용황은 술기운 탓인지 심중에 담 아 두고 있던 속내를 어렵게 털어놨 다. 그 안에는 황유하에 대한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쌍룡맹은 겉에서 보기엔 더할 나 위 없이 견고해 보이지만 사실 그안은 매우 위태위태하다네. 공통의 적이었던 마천이 사라지면서 두 개 의 세력이 서로에게 날을 세우기 시 작한 게지.”

모용황이 털어놓는 얘기 속에는 당 금강호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그 대로 드러나 있었다.

지금의 쌍룡맹은 하나의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올라타 있는 형국 이었다.

두 마리의 호랑이 모두 상대의 목 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을 만큼 성장 한 상태였기에 언제 싸움이 일어나 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강호가 조용한 것일까?

그 이면에는 모용황의 얘기대로 황 유하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 황유하는 허수아비 맹주라는 비아 냥을 들으면서도 끈질기게 그 자리 를 고수하며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세력의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맞춰 갔다.

일종의 균형추 역할을 한 셈인데 그 과정에서 그가 겪는 고초는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양쪽 세력의 강경 파들은 대놓고 그를 면전에서 모욕 하거나 심지어 맹주 자리에서 쫓아 내겠다는 협박까지도 서슴지 않았 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허수아비 맹주가 죽임을 당한 시점부터 쌍룡맹이 흔들리기 시작했었지. 그때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었는 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설우진은 모용황의 얘길 듣고 황유 하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만나 뵙고 싶네요, 그분!”

“호오, 후회하지 않겠나? 맹주님과 연을 맺은 이들은 대부분 한직을 떠 돌고 있는데.”

“어차피 무인으로 성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면, 가업을 물려받을 참인가?”

“그건 아닙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마음껏 살아 보고 싶습니다.”

설우진은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꿈꿨다. 물론 그 렇다고 해서 낭인의 길을 다시 밟겠 다는 건 아니었다.

“부럽군,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 다는 게. 오늘 술자리 즐거웠네. 옷 이 완성되거든 맹으로 한번 놀러 오 게. 내 맹주님과의 만남을 주선해 줌세.”

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모용황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우진은 떠나는 그를 배웅하며 다 음에 만날 날을 기약했다.


“지금 놈을 찾는 걸 포기하자는 게 냐?”

치군성의 방 안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단단히 뿔이 난 듯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위축되지 않고 차분 히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근처의 흑매들을 모두 동원했는데 도 작은 흔적조차 찾아내질 못했습 니다. 누군가 야료를 부리지 않고서 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가 놈들을 의심하는 게냐?” 치군성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쌍룡무회가 열리고 있는 이곳 서 안은 놈들의 앞마당입니다. 아닌 말 로 맘만 먹으면 사람 하나 숨기는 것쯤 일도 아닐 겁니다.”

턱 밑에 난 사마귀가 인상적인 사내 태사군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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