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19화 : 나찰요귀 (2)
나찰요귀 (2)
놀란 무리가 한입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황보궁은 몇 걸음 휘청거리다 이내 몸을 바로 세웠다. 그의 얼굴은 흉 신 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네, 네놈이 감히 날 쳐? 어디, 오 늘 초상 한번 제대로 치러 보자.”
황보궁이 한껏 열을 내며 조인창에 게 달려들었다.
거칠게 내뻗는 주먹에선 옅은 살의마저 느껴졌다.
“인창이 여동생 예뻐?”
“모르지, 아직 얼굴은 본 적이 없 으니까.”
“그래도 대충 얘기는 들었을 거 아니야?”
“얼굴 얘기는 한 번도 한 적 없어. 그냥 세상에 다시없을 착한 여동생 이란 것만 매번 강조했으니까.”
“설마, 친구 여동생에게 흑심을 품 지는 않겠지?”
자스민이 눈을 흘기며 물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하루만에도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는 게 남녀 관계니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녀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섰다.
“왜,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걱정 돼?”
설우진이 기습적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 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거, 걱정은 무슨, 도망갈 테면 가. 너 아니라도 나 좋다는 남자 많으니 까.”
자스민은 샐쭉거리며 설우진을 밀 어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조인 창의 집이 가까워 왔다. 그런데 설 우진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들은 것 이다.
설우진은 한달음에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크윽.”
한쪽 구석에 조인창이 신음을 흘리 며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얼 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본래 의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부어올라 있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황보궁은 조인창의 머리를 향해 소변을 갈겼다.
“어쩌냐, 멋진 오라비의 모습을 보 여 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여동생 앞 에서 오줌이나 맞고 있으니.”
황보궁이 조인창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노골적으로 비아냥댔다.
그때 신음 사이로 힘겹게 내뱉은 말 한마디가 들려왔다.
“안 돼.”
“이 자식이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황보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 다. 놀라서 뒤를 돌아봤더니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오라비를 보며 울먹이 고 있던 조예진이 산발한 머리에 흰 자위만 남은 두 눈으로 자신을 괴롭 혔던 사내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겼 다.
병장기를 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종이를 찢듯 양손으로 부여잡고 사지를 하나씩 몸에서 떼어 냈 다.
그 끔찍한 광경에 황보궁은 등골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의 등 장에 잔뜩 긴장을 한 것이다. 잠깐 의 망설임 끝에 황보궁은 같이 온 이들을 내팽개치고 홀로 도주를 감 행했다.
다행히 조예진은 그의 뒤를 쫓지 않았다.
한데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 앞쪽 에 도사리고 있었다. 막 담을 뛰어 넘으려던 설우진이었다.
그는 조인창의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황보궁을 순순히 보내 주지 않았 다. 몸이 교차하는 찰나에 잽싸게 황보궁의 머리채를 잡아채고는 그대 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거친 손놀림에 황보궁은 별다른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마당으로 널 브러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이 좀 필 요할 것 같은데.”
설우진이 황보궁의 목덜미를 틀어 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번들거리는 두 눈이 진한 살 기를 머금었다.
“괴, 괴물이 저, 저 안에 있어.”
“횡설수설하지 말고 제대로 입 놀 려. 그 주둥아리 확 찢어 버리기 전에.”
“이, 인창이 놈 여동생이 괴물로 변했어. 내, 내가 보는 앞에서 친구 들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었다고.” 황보궁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자신이 목도한 장면을 그대로 묘사 했다.
‘설마, 인창이 여동생이 나찰요귀 는 아니겠지?”
설우진은 황보궁의 얘길 듣고 한때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여인을 떠올렸다.
나찰요귀는 별호가 말해 주는 대로 나찰 같은 외모에 귀신같은 손 속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마천에 의해 쌍룡맹이 사라 지고 난 뒤였다. 그녀는 마천의 무 사들에게 일방적인 살수를 휘둘렀 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호 사가들 사이에서 얘기가 분분했는데 그중 가장 설득력을 얻었던 게 바로 쌍룡맹의 무사들 중에 그녀의 친인 이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었다.
설우진은 황보궁이 도망치지 못하 도록 마혈을 찍어 놓고 안채 쪽으로 황급히 내달렸다.
안채는 한 폭의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나찰로 분한 조예진 주변에는 사지 가 찢겨 나간 황보궁의 친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죽음 그 직전까지도 고통에 시달렸 는지 그들의 얼굴은 모두 섬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거, 이거, 뒷수습하려면 골치 좀 썩겠는걸.”
안채로 막 들어선 설우진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하고는 인상을 굳혔다.
정당방위를 주장하기에는 시체들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누가 봐도 시체들이 피해자라고 볼 수밖에 없 는 상황이었다.
“도, 도망가.”
맞은편에서 조인창이 설우진을 보 며 힘겹게 소리쳤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또렷이 전 달됐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설우진의 정면으로 조예진이 들이 닥쳤다. 낯선 불청객의 등장에 잠시 가라앉았던 광기가 다시 깨어난 것 이다.
“이런, 니미.”
설우진은 와락 인상을 쓰며 다급히 공격을 회피했다.
그런데 야수안으로 그 궤적을 읽어 냈음에도 그녀의 오른손이 가슴 어 름을 깊게 훑고 지나갔다.
‘이거, 소문 이상인데.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살갗이 얼얼하잖아.’
설우진은 가슴을 살짝 매만지며 뇌기를 몸 안에서 돌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힘을 쓰지 않고선 그녀를 막 아 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사이 조예진은 괴이 신랄한 움직 임으로 설우진의 급소를 노리고 들 어왔다. 그 움직임은 특별한 무공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본능 에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 더 대처 하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설우진의 옷은 금세 너덜너 덜해졌다.
“후우, 후우.”
설우진이 거친 숨소리를 토해 냈다.
과거로 회귀한 이후로 오늘처럼 수 세에 몰려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개고생을 하고 있음에도 설 우진의 입가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게 얼마만이냐? 등에 땀나도록 뛰어 보는 게. 역시, 싸움은 이렇게 쫄깃쫄깃한 맛이 있어야 한다니까.’
설우진은 이 순간 전생의 낭왕으로 돌아와 있었다.
낭왕 시절의 그는 투귀였다. 하루 라도 싸우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할 정도로 쉴 새 없이 싸 움판을 전전했었다. 그리고 더 기막 힌 건 그중에 하나도 쉬운 싸움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데 그 낭왕이 과거로 돌아온 뒤 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싸움판에 끼어 보질 못했다. 싸움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상대들이 너무 약했 다.
덕분에 그는 알게 모르게 욕구불만 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지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나찰요귀가 눈앞에 나타 났다.
그간에 쌓인 욕구불만을 풀어 내기 엔 최적의 상대였다.
“제대로 한번 놀아 보자고.”
설우진이 뇌기를 양 주먹에 끌어모 았다. 천뢰도는 집에 두고 온 상태 라 맨주먹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 다.
퍼퍼펑, 펑펑.
두 사람은 정신없이 공수를 주고받았다.
조예진은 칼처럼 날을 세운 손톱을 휘두르고, 설우진은 뇌기를 머금은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누구도 쉽사리 우위를 점하 지 못했다.
‘손 속만 사나운 줄 알았더니, 맷 집도 보통이 넘잖아. 이건 숫제 강 시를 상대하는 느낌인데.’
설우진은 낭왕 시절에 철강시를 상 대한 바 있었다.
철강시는 고루마종이라는 사도 일 맥의 종주가 만든 것으로 온몸이 금 강불괴처럼 단단했다. 강기를 쓰지 않고선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할 정도 였다.
그런데 그 철강시와 조예진이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리 급소를 때려도 그녀는 아무 렇지도 않다는 듯 벌떡 일어나 달려 들었다.
‘이런 식으론 끝이 없겠어. 아예 목숨을 끊는 거라면 폭뢰를 중첩해 서 때려 박으면 될 테지만, 친구의 여동생한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 고.’
싸움이 길어지면서 설우진은 고민 에 빠졌다.
본능은 그녀의 가슴에 폭뢰를 퍼부 으라고 하는데 이성이 그것을 가까 스로 말렸다.
바로 그때, 설우진의 두 눈이 가슴어름에 나 있는 실밥을 비쳤다.
그걸 본 순간, 뇌리에 상관추를 제 압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 때릴 수 없으면 못 움직이 게 만들면 되잖아.’
설우진이 실밥을 거칠게 잡아당겼 다. 그 손길에 실이 빠르게 풀려 나왔다.
“이만 끝을 내자고.”
설우진은 정면에서 짓쳐들어오는 조예진의 공격을 그대로 몸으로 받 아 내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실로 그녀의 몸을 빙 둘렀다.
뇌기를 머금은 실이 강한 억제력을 발휘하며 그녀의 몸을 압박했다. 그녀는 온몸을 뒤틀며 실을 끊어내려 했지만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뇌기에 실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졌 다.
그녀의 손발이 묶이자 설우진은 잽 싸게 달려들어 수혈을 찍었다. 그녀 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대체 네 여동생, 어떻게 된 거 야?”
설우진이 침상에 누운 조인창을 내 려다보며 조예진에 대해 물었다. 조인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아는 누구보다 착하고 예쁜 아 이였어. 사도라는 뿌리가 믿기지 않 을 정도로. 한데 그 아이의 몸이 특별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달이 벌어졌어. 아버지께서 진아를 이용해 금기시된 괴물을 만들고자 마음 먹은 거야.”
“나찰요귀?”
“그걸 네가 어떻게……?”
“아, 사부한테 들은 적이 있거든. 마도에 강시가 있다면 사도에는 나 찰이 있다고.”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었 다.
실제 그의 사부였던 팽천호는 나찰 에 대해 얘길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술에 거나하게 취해 내뱉은 말이었 지만.
“맞아, 아버진 진아를 나찰요귀로 만들고자 하셨어. 실제 우리 가문엔 그 비술이 전해지고 있고.”
“가만, 그러고 보니 네 가문이 어 딘지도 모르고 있었잖아.”
“미안, 얘기를 한다고 마음은 먹고 있었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 어. 사실, 우리 가문은 귀요성이야.” ‘녀석이 왜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 았는지 알겠군.’
설우진은 귀요성이란 이름을 듣고 조인창의 마음을 단박에 헤아렸다. 귀요성은 한때 사파의 종주로 군림 하던 세력이었다.
그들은 사파 특유의 다양한 이술을 전승, 발전시켜 왔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비술이 실혼명이었다.
실혼명은 인간의 이지를 제압해 꼭 두각시로 부렸다. 실제 귀요성의 장 난질에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강호의 세력들은 은밀히 손을 잡고 귀요성을 쳤다. 귀요성은 갖가지 비술을 동원해 그 들을 막아 내려 노력했지만 중과부 적이었다.
결국, 귀요성은 그날부로 지도상에 서 이름이 지워졌다.
“아버진 귀요성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 하셨어. 그 한 많은 세월을 이 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 욕심에 진아를 희생시킨 것만큼은 도저히 납득이 안 돼.”
조인창의 두 눈에서 강한 분노가 느껴졌다.
“네 동생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 은 없는 거야?”
“비술이 펼쳐진 이상 대성을 이루 는 수밖에 없어.”
“대성을 이룬다니? 나찰요귀도 성 장을 한다는 거야?”
“응. 나찰요귀는 몸 안에 사기만 담고 있을 뿐이지 그 외적인 부분은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 없어.”
“그럼 저 얼굴은?”
“몸은 준비가 안 됐는데 과도하게 사기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생겨난 부작용이야. 대성을 이루게 되면 본 래의 얼굴로 돌아올 거야.”
설우진은 조인창을 통해 풍문으로 만 들었던 나찰요귀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 가지 궁금증 이 일었다.
바로, 그녀가 폭주한 원인이었다.
“네 여동생은 갑자기 왜 폭주한 거 야? 나찰요귀는 이성을 그대로 지니 고 있다고 했잖아.”
“황, 보, 궁, 그 개자식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