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30화 : 비밀 호위 (2)
비밀 호위 (2)
“내일 아침에 돌아간다고?”
“네.”
“웬만하면 맹주님 고희연에 참석했 다 가지. 인맥 쌓기엔 그보다 좋은 자리가 없는데.”
“인맥은 수석 보좌 한 명으로 족해요.”
“후훗, 하긴 쭉정이 열보단 알맹이 굵은 하나가 낫지. 그럼 내일 아침 에 말을 내줄 테니까 그거 타고 편 안하게 돌아가.”
늦은 밤, 설우진과 제갈윤은 또다 시 술잔을 기울였다.
이번에 마시는 술은 이별주였다.
“윤이 형, 내일 웬만하면 맹주님 가까이는 가지 마.”
“응?”
“날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는 데, 내일 고희연에서 맹주님께 큰일 이 닥칠 거야. 괜히 곁에 있다가 휩 쓸리지 말고 적당히 거리 유지해.”
“너 벌써 취한 거야?”
제갈윤이 뭔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 으로 설우진을 빤히 쳐다봤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그러니까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 봐.”
“인마, 맹주님 곁엔 그림자 수신 호위만 스물이 넘어. 대체 어떤 간큰 놈이 그들을 뚫고 들어와 맹주님 의 몸에 해를 가하겠어?”
“그 흉수가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인이라면?”
“에이, 설마.”
“형이 어제 얘기했잖아. 최근에 강경파들의 움직임이 거세졌다고.”
“그렇다고 그런 극단적인 수를 쓸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는 게 강경파의 특성 이야.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보는데.”
어느새 술자리가 진지해졌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주정을 몸 밖으로 배출시켰다.
“호위를 강화하는 게 좋을까?”
제갈윤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설우진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 지. 근데 흉수의 정체를 알지 못하 는 상태에선 큰 효과를 보기 힘들거야.”
“그럼 다른 좋은 방도가 있어?”
“가장 좋은 건 아무도 모르게 대역 을 내세우는 거야. 그리하면 흉수를 잡아내는 건 물론이고 맹주님의 안 전까지 확보할 수 있지.”
“맹주님께서 대역을 쓰려 하실까?”
“그걸 설득하는 게 형의 역할이야. 수석 보좌가 설마 그 정도도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 그걸 말이라고. 걱정 마. 내 힘으로 안 되면 아버님을 통해서라 도 관철을 해 보일 테니.”
제갈윤이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준비는 어떻게 돼 가지?”
“맹주에게 불만을 갖고 있는 장로 둘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연 회가 무르익을 무렵 그 둘이 방심해 있는 맹주에게 암습을 가할 것입니 다.”
“호위들은?”
“일꾼으로 가장해 잠입해 있는 본문의 무사들이 이법을 활용해 그들의 눈을 가릴 것입니다.”
쌍룡맹의 귀빈들이 머무는 칠성각 안. 은은하게 일렁이는 호롱불 주위 로 두 사내가 얼굴을 맞대고 있었 다.
그중 오른편에 앉아 있는 이가 낯 이 익었다.
일전에 혈옥불로 신하촌을 피로 물 들였던 오성의 일인, 위가렴이었다.
“맹주의 호위들은 강하다. 이법이 실패할 가능성도 있으니 현무십령도 불러 근처에 대기토록 해라.”
“굳이 그들까지 움직일 필요가 있 겠습니까?”
“황유하는 본회의 대업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인물이다. 현무십령을 모두 소모하더라도 그를 죽일 수 있 다면 본회에 큰 이득이 될 것이다.” 위가렴의 눈빛이 진한 탐욕으로 물 들었다.
“미안하다.”
설우진은 황당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는 제갈윤을 바라봤다. 그는 아침 일찍 맹을 나서려 했다. 한데 정문에서 발이 묶였다. 위에 서 명령이 내려왔다며 수문위사들이 그를 붙잡은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설우진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섰다.
“지난밤에 아버님께 네 말을 전했더니 직접 만나서 얘길 들어 봐야겠네…….”
“무슨 얘길 또 들어요?”
“낸들 알겠느냐. 일단 군사부로 가 자. 대신 이번엔 말 대신 마차를 내주마.”
“그럼 이왕 크게 쓰는 김에 사두마 차로 준비해 놔요.”
“알았다. 귀빈용으로 내줄 터이니 일단 가기나 하자.”
극적인 합의가 이뤄지고 두 사람은 군사부로 향했다. 군사부는 쌍룡맹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역할이 중한 만큼 군사부 주변 에는 맹을 대표하는 네 개의 무력대가 동서남북에 걸쳐 자리하고 있었 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두 사람은 칠 층 높이의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 들의 머리 위로 수려한 필체로 휘갈 겨 쓴 문패가 보였다.
와룡부.
“어서 오십시오, 수석 보좌님!”
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두 사람을 반겼다. 양쪽 태양혈이 불룩 튀어나온 것이 최소 절정급의 고수로 짐작됐다.
“군사님은 안에 계시느냐?”
“네. 바로 칠 층으로 올라가십시오.”
무사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은 와 룡전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이거 완전 용담 호혈인데. 곳곳에 문지기와 비슷한 실력을 갖춘 이들 이 몸을 숨기고 있잖아.’
설우진은 계단을 오르면서 힐끗힐 끗 주변을 살폈다. 그의 시선이 닿 는 곳에는 어김없이 와룡전의 비밀 호위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그가 호위들을 눈으로 하나씩 집어 내는 사이 계단이 끊겼다. 목적지인 칠 층에 다다른 것이다.
한데 의외로 칠 층에는 호위가 없었다.
똑똑똑.
“아버지, 윤입니다.”
“안으로 들어오너라.”
안쪽에서 쇠가 갈리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우진은 의 외라는 표정으로 제갈윤을 슬쩍 쳐 다봤다.
-젊은 시절에 마도 무사들과 시비 가 붙어 목을 크게 다치셨대. 완치 는 됐지만 그 이후로 제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 거지.
간단하게 사정을 설명하며 제갈윤 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전체적으로 검박한 분위기를 풍겼다.
맹주 다음 가는 권력을 쥐고 있는 군사의 방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해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책상에는 보고서로 짐작되는 서적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네가 우진이란 아이냐?”
서적들 너머에서 제갈명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안을 들여다보니 제갈 명은 정신없이 붓을 놀려 대고 있었 다.
‘쌍룡맹 군사부에 들어가면 서류 속에 파묻혀 뒈진다는 항간의 소문 이 과장된 게 아니었네. 대가리가 저 정도면 밑의 애들은 오죽하겠어.’
설우진은 고된 업무에 시달리는 제 갈명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 다. 그사이 급한 일을 마쳤는지 제갈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쪽 으로 다가왔다.
제갈명은 지극히 평범한 외모를 지 니고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도드라지 지 않는 이목구비. 길을 걷다 보면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중년 의 사내였다.
“고놈 참 실하게 생겼구나.”
‘이 영감이 왜 남의 몸에 멋대로 손을 대고 지랄이야!’
설우진은 거침없이 자신의 몸을 매 만지는 제갈명을 보면서 발끈했다. -네가 좀 이해해. 아버지는 본래 좀 괴팍한 성정을 지니고 계시거든. 제갈윤이 난처한 표정으로 설우진을 달랬다.
‘그래. 참자, 참아. 쌍룡맹 한복판에서 노인네를 두들겨 팰 순 없으니.’
“절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설우진이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제갈명의 눈빛이 수십 년 동안 검을 닦아 온 무사의 그것처럼 사납게 변했다.
“어젯밤 윤이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이번 고희연에 맹주님 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 거라고?”
“그냥 제 추측입니다.”
“단순한 추측치고는 그 내용이 꽤나 구체적이던데.”
“제가 좀 상상력이 풍부하거든요.”
“그럼 그 상상력을 더 확장시켜 봐라.”
“……?”
“맹주님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면 그 배후도 분명 존재할 것이 아니 냐? 그 배후를 짚어 보란 말이다.”
제갈명의 눈빛에 더 힘이 실렸다. 태도를 보아하니 그도 뭔가를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이걸 어쩐다, 다 얘기해 줘?’
설우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쌍룡맹주의 죽음 뒤에 수호 가문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그것만 얘길 해 줘도 암 살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공산이 컸다.
하지만 쉽게 결심이 서질 않았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뒤바뀔 미래 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망설임이 길어지는 가운데, 뇌리에 잊고 지냈던 하나의 얼굴이 스쳐 갔 다.
그 얼굴의 주인은 자신이 만들어 준 옷을 입고 환하게 미소 짓고 있 던 순박한 소녀, 소교였다.
‘설우진,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 가 된 거냐! 낭왕 시절엔 앞뒤 안 재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했었잖아. 그깟 수호 가문 놈들이 뭐가 무서워서 이리 벌벌 떨고 있는 거냔 말이 다.’
설우진은 갑자기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동안 그는 귀찮다는 핑계로 그는 모든 일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신하촌의 일만 해도 그랬다. 그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 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참사 였다.
‘강호에 발을 담그고 사는 이상, 언제까지 놈들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어. 그럴 바엔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나아.’
설우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혹시, 쌍룡맹에도 수호 가문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은 갑자기 왜?”
“지난 마천과의 전쟁에서 수호 가 문은 쌍룡맹에 의해 일방적인 희생 을 강요당했습니다. 한데 승리의 영 광은 그들이 아닌 쌍룡맹에 모두 돌 아갔습니다.”
“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한 데, 그 일로 수호 가문이 맹주를 해 하려 한다는 건 지나친 억측 같은 데.”
“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습니 다. 언제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 다는 뜻이죠. 군사님께서 한번 수호 가문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보십시 오. 얻는 것 없이 일방적으로 잃기 만 했는데 그 마음이 언제까지 유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설우진은 강한 어조로 수호 가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하지만 제 갈명은 쉬이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 했다. 수호 가문의 변절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강호에 드리워진 수호 가문 의 그림자는 깊고 넓었다.
“판단은 군사님의 몫입니다. 대신 이번 고희연은 맹주님을 위해 취소하십시오.”
“아무런 명분도 없이 취소할 수는 없다.”
“그럼, 맹주님께 화가 닥칠 것을 알면서도 그냥 보고만 계시겠단 말 입니까?”
설우진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잠시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휴우, 네 녀석이 나한테 풀기 어 려운 과제를 던져 주는 구나. 현실 적으로 당일 열리는 고희연을 취소 할 방도는 없다. 취소하려 해도 강 경파 놈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에.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 호위를 세 “우는 것이지.”
호위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제갈 명이 설우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 다.
“설마, 그게 저는 아니겠지요?”
“호랑이가 발톱을 숨긴다고 고양이 가 되겠느냐? 내숭 그만 떨고 진짜 실력을 내보여라!”
‘꼬리 아홉 달린 너구리라더니. 내 무위를 알아본 건가?’
설우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쌍룡맹에서 지내는 내내 뇌기 를 단전에 꾹꾹 눌러 담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드러나는 걸 감추기 위함이었다.
한데 제갈명은 한눈에 자신의 실력 을 알아봤다. 이는 그의 무위가 자 신과 동등한 수준에 올라 있음을 의 미했다.
“나이가 어려서 더 튀지 않을까 요?”
“시종이 나이가 많을 필욘 없지.”
“……저보고 지금 시종 노릇을 하라는 건가요?”
“단 하루다. 일당은 두둑하게 챙겨줄 테니 하루만 강호를 위해 봉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