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11화 : 귀향지로 (4)
귀향지로 (4)
혹시나 싶어서 구석진 자리까지 뒤 져 봤지만 만져지는 건 먼지뿐이었 다.
그 순간 막철의 뇌리에 고간의 얼 굴이 떠올랐다.
“이 개자식이 우릴 속인 거였어. 애당초 진짜 금고는 다른 곳에 두 고. 형님!”
막철이 씩씩대며 호걸륜을 불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밖에선 아무 런 대답도 들려오질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막철은 조심스럽게 구멍 밖 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바로 그때 머리 위로 가는 소성이 들려왔다. 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 는데 묵직한 뭔가가 머리를 세차게 찍어 눌렀다.
퍽!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큰 충격이 전해졌다. 이마가 뜨끈한 것이 피도 흐르는 것 같았다.
“혀, 형님.”
막철이 호걸륜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동안 잊고 지 냈던 괴물의 목소리였다.
“백날 불러 봐야 소용없어. 네가 애타게 찾는 그 형님, 저기 널브러져 있거든.”
설우진이 막철의 머리채를 잡아 올 려 앞쪽에 쓰러져 있는 호걸륜을 마 주 보게 했다. 무슨 큰 충격을 받았 는지 호걸륜은 허옇게 눈을 까집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 대체 형님에게 무슨 짓을 한거냐?”
막철이 악을 내질렀다. 호걸륜이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거, 이거, 방귀 뀐 놈이 성낸다 고 하더니 네놈이 딱 그 짝이네. 그 냥 확 목을 뽑아 버릴까?”
설우진이 막철의 목덜미를 오른손 으로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의 힘이 라면 목을 뽑아내는 게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되는지 막철이 다급히 소리쳤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전 그저 형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 다.”
“넌 훔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저놈이 다 시켰다?”
“네, 네, 공자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뻔히 아는데 제가 어떻게 그 런 불측한 맘을 품었겠습니까!”
막철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 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호걸륜이 벌떡 일어났다.
사실 그는 설우진이 뿌린 뇌기에 잠시 경직되어 있었을 뿐, 눈이 까집어져 있던 것도 그 후유증의 하나 였다.
“정말 눈물 나는 뒷골목 의리네. 살기 위해서 형님을 내다 팔다니. 호걸륜, 네놈은 그 눈깔부터 뽑아 버려야 해! 믿어야 할 놈은 못 믿 고, 믿지 말아야 할 놈만 믿으니.”
설우진은 호걸륜을 사납게 노려보 며 호되게 질책했다.
그는 애당초 풍야패를 거둘 생각이 없었다. 태생이 양아치인 놈들은 결 국 양아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는 걸 전생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왜 풍야패를 거뒀냐?
그 이유는 단순했다. 고간이 원했기 때문이다.
한데 풍야패 놈들은 고간의 믿음을 저버렸다.
“네놈들에 대한 처분은 고간에게 일임할 것이다. 어차피 그 몸으론 어디 도망가지도 못할 테니 고간이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이곳에서 기다려라.”
설우진은 서슬 퍼런 경고를 남긴 뒤 작업실로 올라갔다.
“왜 그랬냐?”
“혀, 형님.”
“난 그래도 널 믿었다, 십수 년을 함께해 온 형제라고 생각했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형님! 그리 말하 지 않으면 놈이 당장에 목을 뽑을 것 같아서 그만・・・・・・.”
“크크큭, 네 녀석은 끝까지 그 입만 살아 있구나. 내세에는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호걸륜이 자조 섞인 목소리로 외치 며 칼을 휘둘렀다. 힘차게 내지른 칼날은 발버둥 치는 막철의 목덜미 를 그대로 베고 지나갔다.
돈 냄새를 물씬 풍기는 상인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화려하게 치장된 회의청 안. 그 중심에는 육중한 체 구를 자랑하는 무한상인회의 회장 차철용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무한 상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호북에서 가장 큰 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무한 내에서 그의 돈이 안 들어간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자금력이 엄청났 다.
“자, 다들 어떤 내용인지는 이해했 을 걸세. 내일까지 명단을 내야 하 니 참가를 원하는 곳은 손을 들어 보이게.”
차철용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 다. 한데 무슨 연유인지 다들 그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그중에는 낯 익은 얼굴 설무백도 있었다.
“자진해서 나서는 이가 없으면 내 임의대로 뽑을 수밖에 없네. 그래도 괜찮겠는가?”
차철용이 턱을 매만지며 주변의 상인들을 한차례 쭉 훑어다. 그와 눈이 마주친 이들은 다들 난감한 표정 을 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쯧쯧, 상인이라는 자들이 이리 배 포가 작아서야. 좋네, 아무도 나서지 않겠다면 내가 고르는 수밖에.”
차철용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좌측 가장 중앙, 설무백이 앉아 있 는 곳이었다. 설무백은 차철용과 시 선이 마주치자 짧은 탄식을 내뱉으 며 고개를 떨구었다.
“설 점주, 너무 겁먹을 것 없네. 자혜 공주의 취향이 까다롭다 하나 자네에겐 천수신녀가 있지 않은가. 그 아이의 실력이라면 분명 자혜 공 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네.”
자혜 공주. 그녀는 당금 황제의 막 내딸로 아름다운 외모에 번뜩이는 지모까지 갖춰 황제의 총애를 한 몸 에 받고 있었다.
‘하아, 이 일을 어찌한다? 황궁에 예아를 데려가면 분명 얼굴을 알아 보는 사람이 있을 터인데………….’
설무백이 황궁 경연의 참가를 꺼린 이유. 그 이면에는 단예가 가지고 있는 신분이 크게 작용했다.
단예는 가문이 정쟁에 휘말려 관기 로 팔려 갔다. 도중에 돈을 써서 빼 오기는 했지만 그녀의 신분은 여전 히 관기였다. 만에 하나라도 경연장 에서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나타난다면 그녀는 물론이고 설가장까지 큰 화를 입을 수 있었다.
“자네가 무슨 연유로 그리 경연 참 가를 망설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무 한 상계를 책임지고 있는 내 입장에 선 일품점이 꼭 나서 줬으면 좋겠 네. 그리만 해 준다면 내 일품점이 강남으로 진출하는 데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음세.”
순간 주변 상인들의 눈빛이 변했 다.
차철용의 그 약속은 천금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 만 속으로는 욕심을 낼지언정 그 속 내를 겉으로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입을 떼는 순간 차철용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기에.
잠시 후 설무백이 어렵게 입을 뗐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미욱한 실력 이지만 무한을 대표해 최선을 다하 고 오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내 자네만 믿음세!”
차철용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결정을 반겼다. 반나절 동안 지루하게 이어지던 상인 회합이 끝 을 맺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