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14화 : 사제 화해 (3)
사제 화해 (3)
막동이는 그렇게 한참 동안 신나게 그네를 탔다. 성능을 시험해 보는 목적이라면 진즉 멈췄어야 할 그네 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팽천호는 계속 그네를 밀었다.
‘속마음을 표현 못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그냥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될 것을 뭐 저리 미련 하게…………….’
설우진은 말없이 그네를 미는 팽천 호를 보면서 입가에 가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네 타기가 이어지는 동안 막동이 의 얼굴은 조금씩 창백해지기 시작 했다. 익숙지 않은 그네를 장시간 타다 보니 속이 견디질 못한 것이 다.
결국 막동이가 손을 들어 팽천호를 불렀다.
“사, 사부님, 이 정도면 성능은 충 분히 검증된 것 같은데요. 그만 내 려 주시죠.”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그네를 험 하게 타는 줄 아느냐?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하니 아무 소리 말고 계속 타거라. 오늘 하루 그네 타는 게 질릴 때까지 이 사부가 마음껏 인심을 베 푸마.’
등을 떠미는 손길이 한층 더 빨라 졌다.
그런데 정작 막동이의 얼굴색은 점 점 시퍼렇게 질려 갔다.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해 댈 것 같은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수련에 빠진 벌을 이런 식으로 내 리는 건가?”
막동이는 속을 애써 달래며 원망스 러운 표정으로 팽천호를 내려다봤다.
사실 처음엔 고마웠다, 성능 검증 때문이라고 해도 그네를 타는 건 설레고 신나는 일이었기에. 한데 지금 에 와서는 그 성능 검증도 다 핑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벌주려 는 목적이 아니면 이렇게 오랫동안 그네를 태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 다.
속으로 팽천호를 원망하며 막동이 는 간절히 그네가 멈추기만을 기원 했다.
그의 기원에 하늘이 응답한 것인지 때마침 단예가 예심원의 아이들을 데리고 후원으로 들어왔다.
“그네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네로 쏠 렸다. 그제야 팽천호는 아쉬운 표정 으로 그네를 잡아 세웠다. 막동이는 그네가 멈춰 서기 무섭게 구석으로 뛰어가 고개를 처박았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아이들이 저 렇게 환하게 웃는 거 오랜만에 봐 요.”
그네를 타려고 줄지어 서 있는 아 이들을 보면서 단예가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에 설우진은 손사레를 치 면서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에게 공 을 돌렸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감사를 하 려면 이쪽에 해야지.”
“두 분, 감사드려요.”
설우진의 말에 단예가 두 사람 쪽 으로 고개를 돌려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팽천호는 쑥스러운지 연신 헛기침 만 해댔고 막동이는 시선도 마주치 지 못한 채 얼굴만 붉혔다.
“아침 일찍부터 일하시느라 힘들었 을 텐데 바쁘지 않으시면 여기서 점 심 드시고 가세요.”
단예가 식사를 제안했다.
순간, 어색하게 서 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어떡할테냐?
-준비한 성의가 있으니 수락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지? 성의를 무시하는 건 사내로서 할 짓이 아니지.
몇 차례 전음을 주고받은 끝에 두 사람은 단예의 청을 수락했다.
예심당의 식당은 컸다. 얼마나 많 은 아이들을 들일지 몰라 최대한 넉 넉하게 증축한 것이다.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제 데우고 끓이기만 하면 돼요.”
미리 음식을 만들어 두었던지 단예 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한 음식 향이 식당 전체에 퍼졌다. 그런데 냄새를 맡은 이들의 표정이 상당히 기묘했다.
‘음, 이건 무슨 냄새지? 매운 내와 비린내가 함께 섞여 있는 것이 매운 탕이라도 끓인 건가?’
‘음, 냄새가 조금 역하군. 하지만 뭐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킁킁, 이 냄새는 내가 어릴 적에 멋모르고 끓였던 어룡탕과 비슷한 데? 물고기만 많이 넣으면 되는 줄 알고 비린내를 잡아 줄 야채들을 하 나도 넣지 않았지.’
세 사람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 였고 그사이 문제의 요리가 식탁으 로 올라왔다.
“어머니께서 몸을 보신하는 데에는 잉어만큼 좋은 게 없다고 하셔서 잉 어로 어룡탕을 끓여 봤어요. 맛이 조금 없더라도 정성을 봐서 맛있게 드셔 주세요.”
단예가 쑥스럽게 미소 지으며 솥뚜 껑을 열었다. 그때 안쪽에 뭉쳐 있 던 희뿌연 김이 폭발적으로 피어오르며 내용물이 한껏 그 자태를 드러 냈다.
그런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솥 안에는 튼실한 잉어가 꽉 들어차 있 었기 때문이다.
뭐 그것까지는 전혀 문제 될게 없었다. 한데 탕에는 잉어만 보일 뿐 들어가야 할 기본 재료들이 보이 지 않았다.
비린내를 잡아 주는 향채는 둘째치 고무나 파 같은 기본적인 야채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도 단예는 음 식 못 하기로 악명이 높았지. 착한 얼굴로 사람 죽인다는 소문도 있었고.’
설우진은 그제야 단예가 천수검희 시절에 갖고 있던 이색적인 별명을 떠올렸다.
악식검희. 마귀의 음식을 만드는 검희라는 뜻이다.
“사부님, 먼저 드셔 보시죠.”
설우진이 국자를 이용해 접시에 어 룡탕을 담아 냈고 큼지막한 잉어가 그 안에 가득 들어찼다.
하지만 팽천호는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 코끝으로 파고드는 역한 잉 어 비린내가 문제였다.
바로 그때 단예가 초롱초롱한 눈망 울로 그를 바라봤다. 어서 맛을 보 고 평해 달라는 표시였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팽천호는 잉어 살점과 함께 붉은빛깔의 국물을 수저로 떠 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크윽’
팽천호의 얼굴이 독이라도 마신 것 처럼 사납게 일그러졌다. 혀끝에서 감도는 비린 맛은 상상 그 이상이었 다.
“어르신, 어때요? 맛 괜찮아요?”
단예가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팽천호는 잉어 살점을 억지로 씹어 넘기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크흠, 어린 나이치고는 음식 솜씨 가 제법이구나. 잉어도 잘 삶아졌고 국물 맛도 시원해.”
‘어지간히 맛이 없나 보군, 거짓말 할 때 떨리는 미간이 저리 사납게 요동치는 걸 보면.’
설우진의 시선이 팽천호의 미간에 꽂혔다.
팽천호는 거짓말을 할 때 저도 모 르게 미간을 떠는 버릇을 갖고 있었 다.
“사부님, 그렇게 맛있으시면 제 것 까지 드시죠. 오늘따라 속이 좀 안 좋네요.”
설우진이 은근슬쩍 자신의 그릇을 팽천호 쪽으로 떠밀었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팽천호의 수 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동생이 널 생각해서 한 음식인데, 입맛이 없더라도 맛있게 먹어 주는 게 예의 아니겠느냐?”
“저야 저녁에라도 먹을 수 있지 않 습니까. 아까 보니까 기력이 많이 쇠잔해지신 것 같던데, 이 잉어로 제대로 기력 보강하십시오.”
설우진이 검지로 가볍게 접시를 튕 겼다. 그러고 그 반동을 이용해 앞 을 가로막고 서 있던 수저를 피해 잽싸게 팽천호 앞에 접시를 안착시켰다.
-이놈아, 날 죽일 셈이냐?
-아까는 분명 맛있다고 하시질 않았습니까?
-그야 네 동생이 만든 것이니 예의상…….
-후훗, 모두 사부님이 자초한 일입 니다. 맛있다고 해 놓고 안 먹으면 예아가 많이 실망할 테니 제 몫까지 많이 드십시오.
설우진은 자신의 몫을 강제로 떠넘 겼다. 팽천호는 설우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 단예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수저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설우진은 막동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곤란 해하고 있을지 확인하기 위함이었 다.
한데 막동이의 접시는 시원하게 비워 있었다.
-야, 괜찮냐?
-괘, 괜찮아요. 조, 조금 비리긴 했지만 아주 맛있었어요.
-지금 네 눈이 반쯤 풀려 있는데.
-맛에 감동해서 그래요. 제 평생에 이렇게 맛있는 탕은 처음 먹어 봐 요.
막동이는 그렇게 전음을 보내면서 빈 접시에 다시 탕을 채웠다.
‘저 녀석이, 예아한테 마음이 있는 건가?”
설우진은 막동이의 얼굴을 빤히 쳐 다봤다. 그러고 보니 수저를 입안에 넣을 때마다 막동이의 시선이 단예 쪽을 향해 있었다.
파란만장했던 점심 식사가 끝이 났다. 멀쩡하게 밖으로 걸어 나온 설우진 과 달리 두 사람은 밖으로 나오자마 자 구석으로 달려가 고개를 처박았 다.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긴 것이 어 찌 이리도 손맛이 지랄맞을 수 있느 냐?”
“사람이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순 없 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누가 고 계집에게 장가를 갈지는 모르겠지만, 쯧 …….”
팽천호는 단예의 어룡탕을 떠올리 며 혀를 찼다.
독한 차를 석 잔이나 비웠지만 아직도 입안에는 어룡탕이 남겨 놓고 간 비린내가 그득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되는 반응을 보 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꾸역꾸역 잘도 어룡탕을 먹어 대던 막동이였 다.
“사부님, 왜 그런 소릴 하세요? 전 맛있게 먹었는데.”
“미친 놈, 아까 먹은 걸 다 게워 냈으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 는구나.”
팽천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막동이를 쳐다봤다.
“아까 그건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랬던 거예요.”
“그럼, 오늘 같은 요리를 또 먹을 수 있다고?”
이번엔 설우진이 물었다. 막동이는 이번에도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 다.
‘이 녀석이 단예에게 단단히 반했 나 보네. 근데 괜히 상처받지 않으려나?”
설우진은 막동이가 단예에게 품고 있는 연모의 감정을 눈치챘다. 오빠 로서 둘 사이를 반대하는 건 아니었 다, 사랑이라는 건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둘은 여러모로 차이점이 극 명했다.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모두 단예가 압도적으로 앞섰다. 이런 상황에서 단예가 막동이를 마음에 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불러 주세 요.”
“그, 그래.”
설우진은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큰아 들!”
집으로 돌아온 설우진을 여소교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아들이 돌 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초조하게 기 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 아들, 못 본 사이에 얼굴 살이 쪽 빠졌네. 타지에서 혼자 생활 하느라 힘들었지?”
여소교가 설우진의 뺨을 매만지며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어머니, 저 그동안 잘 지냈어요. 보세요. 전보다 팔이 더 두꺼워졌잖 아요.”
설우진이 오른팔에 한껏 힘을 줬고 순간 옷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몸은 무한을 떠날 때보다 더 불어 있었 다. 학관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 서 근육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 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두런두런 얘기 를 나눴다. 대부분 가족들의 소소한 일상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 와중에 설우진이 설무백의 안 부를 물었다.
그 순간 여소교의 낯빛이 살짝 어 두워졌다. 설우진은 그 변화를 단번 에 알아챘다.
“아버지께 무슨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게 실은…….”
여소교가 이틀 전에 무한상인회합 에서 오갔던 이야기들을 설우진에게 그대로 전했다, 황궁에서 경연이 열 린다는 것부터 그 경연에 일품점이 대표로 나서게 된 것까지.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난 설우진 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머니, 그런 문제라면 고민할 게 뭐 있어요. 예아 대신에 제가 나가 면 되잖아요.”
“오랫동안 쉬었는데 괜찮겠니?”
“후훗, 제가 누구예요? 한때 신의 손이라 불렸던 장인이잖아요. 며칠 연습하면 충분히 과거의 실력을 살릴 수 있어요.”
설우진은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에 여소교는 하인으로 하여금 서 재에 있는 설무백을 불러오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