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17화 : 북경 풍운 (2)
북경 풍운 (2)
“흠흠, 내 마음 같아서는 사 주고 싶네만 이 근처에선 북경고압을 팔 지 않네.”
나철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못 사 주는 사정을 구구절절 읊어 댔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설우진은 가볍게 주변을 훑어보는 것만으로 북경고압을 파는 식당을 찾아냈다. 사실 이렇게 오가는 이들이 많은데, 식당이 없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설우진은 앞장서 그 식당으로 향했고 나철환은 한참을 망설이다 이내 그 뒤를 따랐다.
식당은 크고 넓었다. 점심때가 가 까워져서인지 꽤나 많은 이들이 자 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창가 쪽은 비어 있었고 설우진은 의아해하면서 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저기, 손님.”
설우진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려 는 찰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점원 이 달려왔다.
서안의 소문이 퍼진 것인지 이곳의 점원도 여자였다, 그것도 몸매가 아 주 잘 빠진.
“무슨 문제라도 있나?”
설우진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 봤다. 여자 점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이 자리는 궁의 별장의 아드님께서 매일 식사하시는 곳이라 다른 분께 내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궁의별장이 대단한 직책인가 보지?”
설우진의 말투에 살짝 뿔이 돋았다.
“황족들의 의복을 전담해서 지어 내는 일을 하세요. 그 때문인지 몰라도 간혹 황족들이 저희 식당을 방 문하시기도 한답니다.”
여점원은 유독 황족이란 이름을 강 조했다. 알아서 다른 자리로 옮기라 는 의미였다.
하지만 황족에 겁먹을 설우진이 아 니었다.
“그거 잘됐네. 잘하면 보기 힘든 황족과 안면을 틀 수 있겠는걸.”
“황족은 아무나 만나 주시지 않습 니다.”
“후훗, 그 아무나에 내가 들어간다 는 거야, 점원 아가씨?”
설우진이 여점원의 눈을 똑바로 쳐 다보는 순간 폭발적인 기세가 뿜어 져 나왔다. 내력을 발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 되는 고수는 단순 한 입김만으로도 상대를 압박할 수 있었다.
“소, 손님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 이에요. 별장님의 비위를 거슬렀다 간 금의위에 끌려갈 수도 있어요.”
여점원은 황족에 이어 금의위를 언 급했다. 금의위는 황제의 직속 무력 기구로 황제의 경호와 북경 안팎의 순찰, 죄인 체포 및 심문 등의 임무 를 수행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기에 그들이 지닌 힘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깟 일로 날 잡아가려 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서, 설마 금의위와 맞서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죄가 없는데 꿀릴 게 뭐 있어! 시 장하니 북경고압이나 빨리 갖다 “줘.”
설우진은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북경고압을 주문했다. 여점원은 입 술을 깨물고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 내 후회할 거라는 말을 남기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나이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 는 건가? 아니면 선천적으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건가?”
나철환은 설우진의 객기에 혀를 내 둘렀다.
잔뼈 굵은 상인으로 많은 이들을 상대해봤지만 이토록 대책 없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아까 내가 한 말 귓등으로 흘려들 은 거야? 죄가 없는데 왜 겁을 내?”
“권력만 있으면 없는 죄도 만들어 낼 수 있네. 자네한테 얼마나 든든 한 뒷배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세.”
나철환은 괜한 소란에 휘말리고 싶 지 않았다. 특히 권력자와 엮이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한데 안타깝게도 그의 설득이 먹히 기도 전에 문제의 인물이 식당 안으 로 들어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남자의 곁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궁장을 걸친 여인이 걸 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니, 저것들은 뭐야?’
안치규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두 불청객을 보고는 사납게 눈살을 찌푸렸다. 귀한 손님을 데려왔는데 초장부터 일을 그르치게 생긴 것이 다.
그는 다급히 점원을 향해 손짓했 다.
이에 설우진을 맞이했던 여점원이 그에게 다가와 그간의 사정을 귓속 말로 전했다.
“아가씨, 작은 오해가 있었나 봅니 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 오.”
안치규는 여인에게 사정을 구하고 곧장 설우진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점원이 분명 내 자리라고 했을 터인데.”
“당신이 이 자리를 전세 낸 건 아니잖아.”
“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 했느냐! 멀리서 와서 이곳 사정을 모르는 모양인데, 내 말 한마디면 네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수 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든가.”
설우진은 안치규의 협박에 콧방귀 도 뀌지 않았다.
설우진의 태도에 안치규의 얼굴이 우락부락 일그러졌다. 동행한 여인만 이 자리에 없었어도 당장에 사람 을 불러 치도곤을 놓았을 것이다.
‘보아하니 돈을 노리고 배짱을 부 리는 것 같은데………….’
안치규는 설우진을 쫓아낼 요량으 로 품 안에 손을 넣어 전낭을 꺼냈 다. 그러고 적선하듯 은전 두 냥을 설우진 앞에 내던졌다.
“그 돈이면 이곳이 아니더라도 북경고압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돈 받고 꺼지라는 소리였다.
“돈이 많은가 보지?”
“그 돈으로는 만족이 안 된다는 거냐? 좋다. 두 냥을 더 주마. 하니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안치규가 은전 두 냥을 더 던졌다.
이에 설우진이 오른쪽 입꼬리를 실 룩이며 품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 고 잠시 후 누렇게 반짝이는 금전을 꺼냈다.
“방금 전에 당신이 지껄인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이 돈 줄 테니 다 른 곳이나 알아봐.”
휘익.
설우진이 내던진 금전이 식탁 위로 굴러갔다. 둘 사이에 흐르는 짧은 적막. 그 속에서 나철환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손을 초조하게 비벼 댔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죠?” 바로 그때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여인네의 고운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취한 사 내들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 다. 하지만 아쉽게도 면사를 쓰고 있어 그 생김새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안치규가 굳은 표정으로 여인 앞에 고개를 그렸다.
“자리가 없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금방 다른 자리로 알아보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여기도 빈 자리는 많은데.”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설우진이 자신의 좌우로 비어 있는 자리들을 가리켰다.
평소, 안치규가 앉던 자리답게 열 사람 정도는 넉넉히 앉을 수 있도록 의자가 배치돼 있었다.
여인은 면사 너머로 비치는 설우진 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고는 자연스 럽게 합석했다. 이에 당황한 건 안 치규였다.
“아, 아가씨, 어찌 저런 불한당 같 은 놈과 함께 식사하려 하십니까? 지금 당장 다른 자리를 찾아보겠습 니다.”
“됐어요. 호위들과 함께하는데 별 일이야 있겠어요?”
여인은 안치규의 만류에도 불구하 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안치규도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사나운 눈길로 설우진을 한번 노려보고는 이내 여점원을 불러 요리를 내오도록 했다.
일각여 뒤, 여점원은 황금옥이 자 랑하는 북경고압을 들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점원이 가져온 북 경고압은 달랑 두 접시였다. 설우진 과 나철환의 몫이 나오지 않은 것이 다.
“왜 우리 건 안 나오는 거지?”
설우진이 항의하듯 물었다. 이에 여점원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대 꾸했다.
“이분들은 미리 예약하셔서 빨리 나온 거고요, 그쪽은 예약을 안해 서 아직 안 나온 거예요.”
듣고 보니 억지를 부리는 것 같지 는 않았다. 이에 설우진은 조용히 요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 고 그사이 여인과 안치규가 식사를 시작했다.
바삭삭.
귓가에 바삭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절로 입가에 침이 고이고 숨이 가빠 왔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돈 받고 자리를 양보할 걸 그랬어. 눈 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정말 미칠 것 같잖아. 이게 음식 고문이 아니면 뭐야.’
설우진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 렇게 이각여쯤 지났을까, 그에게도 북경고압이 전해졌다. 그런데 안치규 일행이 먹던 것과는 모양이나 냄 새가 많이 달랐다.
‘뭐, 귀한 분들이라고 저쪽에 더 신경을 썼나 보지.’
일부러 이쪽 요리에 장난을 치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 설우진은 북경 고압의 날개 부위를 뜯었다. 날개 부위는 고소함의 극치로 알려져 있 을 정도로 특유의 풍미를 자랑했다. 한데 날개를 입에 넣고 씹는 순간 비릿한 핏기가 느껴졌다. 설마 하는 마음에 안쪽을 살펴봤더니 살점에는 붉은 핏기가 돌고 있었다. 겉만 익 히고 안쪽은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 이다.
‘이것들이 먹을 거 가지고 장난질을 해?’
설우진은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에라도 부엌으로 달려 가 숙수의 멱살을 틀어쥐고 싶은 심 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것이야말로 놈이 바라는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가만, 요 녀석을 뇌기로 익혀 내 는 건 어떨까? 뇌기는 패력기와 더 불어 화기도 담고 있으니………… 시도 는 한번 해 볼 법한데.’
덜 익은 북경고압을 보고 설우진은 허황된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분명 그의 생각대로 뇌기 안에는 화기도 담겨 있다. 하지만 이 화기는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벼락을 맞고 재가 되어 사라진 수많은 나무들이 그 증 거였다.
한데 설우진은 제 고집대로 북경고 압에 뇌기를 밀어 넣었다. 농도 조 절을 잘못했는지 손이 닿은 곳이 새 까맣게 타 재로 변했다.
‘농도를 옅게 했는데도 고기가 타 버리네. 그럼 뇌기를 실처럼 뽑아서 살점을 감싸 볼까?’
설우진은 뇌기를 실처럼 가늘게 뽑 아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안으로 밀 어 넣은 뒤 고기의 결대로 맞췄다. 잠시 후 고기가 조금씩 익어 가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고소한 향.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설우진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면사 여인도 있었다.
“이 정도면 다 된 것 같군.”
설우진이 살이 타기 직전에 뇌기를 거뒀다. 주변의 시선이 모인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는 그 작업 에 집중해 있었다.
제대로 된 북경고압이 완성되고 설 우진은 반대편 날갯죽지를 찢어 입 으로 가져갔다.
바사삭.
잘 익은 껍질이 부드러운 살점과 함께 입안에서 녹아들었다. 그러고 살점을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감칠맛이 어우러졌다.
‘이거 맛 죽이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요리해 먹을 때 뇌기를 쓸 걸 그랬어.’
설우진은 새롭게 알게 된 벽뢰진천 의 효용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 북경고압, 나도 좀 맛볼 수 있 을까요?”
설우진이 상념에 젖어 있을 때면 사 여인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북경고압은 절반 이상 사라진 상태 였다.
‘굳이 이런 일로 황족과 질 필욘 없지.’
설우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그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보고 그 신분을 대번에 알아챘다.
그녀의 옷에는 봉황이 금사로 수놓 여 있었다.
고가의 옷을 취급하기로 유명한 일 품점에서도 자수 전체를 금사로 하 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그 드문 경우 중 하나가 황족들의 의뢰를 받아 옷을 만들 때였다. 면사 여인은 우아한 손길로 뒷다리 를 잡아 뜯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면사를 살짝 걷어 올려 다리를 입으 로 가져갔다.
순식간에 뼈만 남고 살점이 사라졌다.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죠?”
면사 여인이 입가에 묻은 기름을 닦아내며 물었다. 면사 너머의 두 눈이 세차게 요동치는 것이 적잖게 그 맛에 반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