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21화 : 위기 중첩 (2)

랜덤 이미지

낭왕전생 4권 – 21화 : 위기 중첩 (2)


위기 중첩 (2)

그는 제 몸통만 한 술동이를 양손 에 짊어지고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겼다. 한데 어째 힘에 부치는 것 인지 자꾸만 휘청거리며 밖으로 술 을 쏟아 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술이 튈까 저 어해 앞다퉈 거리를 벌리며 청년을 피해 갔다.

하지만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던 설우진은 청년을 보고서도 피하지

않았고 결국 사달이 벌어졌다.

뒤늦게 설우진을 발견하고 옆으로 비켜서던 청년이 한순간 균형을 잃 고 술동이를 손에서 놔 버린 것이 다.

술동이에 담겨 있던 술이 설우진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야말로 난데없는 술 벼락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술동이를 놓친 청년이 황급히 설우 진에게 달려와 허리에 매고 있던 수 건으로 몸에 묻은 술을 닦아 냈다. 

“됐으니까 그만 갈 길 가지.”

설우진은 청년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는 술 벼락을 맞은 것에 그리 기 분 나빠 하지 않았다. 워낙 좋아하 는 술이기도 했고 지금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 문이다.

“그럼 이거라도 받아 주십시오.” 

청년은 미안한 마음에 철전을 건넸 다. 설우진은 거절할까 하다가 그냥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청년과 실랑 이하기 싫어서였다.

철전을 챙긴 설우진은 그길로 곧장 포목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 고 청년이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안전부절 어찌할 줄 모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는 입가에 가는 호 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철전을 만졌으니 이제 오른손은 한동안 못 쓰게 될 테지, 혈봉의 침 은 마비를 불러올 정도로 독하니까.”


“이거 옷부터 사야겠군.”

설우진은 옷에서 진하게 풍겨 나오 는 술 냄새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설 우진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오 른손을 거칠게 털어 냈다. 그 순간 손바닥 안쪽에서 눈으로는 분간하기 힘든 작은 크기의 물체가 세찬 날갯 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손바닥을 펼쳐 보니 한가운데가 살 짝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따끔한 통증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빌어먹을. 혈사적봉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녀석은 사천에서 서식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설우진은 머리 위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붉은빛깔의 곤충을 사납게 노려봤다.

모기만 한 크기의 붉은 곤충은 사 천 일대에서 혈봉이라 불리는 살인 벌이었다.

겉보기엔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녀석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 게 사나운 독침을 지니고 있었다, 것도 한 발이 아닌 여러 발을.

그래서 매년 사천 일대에서는 수백 에 이르는 사람들이 혈봉에 쏘여 의 원으로 실려 왔다. 녀석의 침에 쏘 여서 죽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그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가는 편이었 다.

위이이잉.

그사이 혈봉들의 숫자가 더 늘었다.

설우진은 혈봉들을 단번에 태워 버 릴 요량으로 단전의 뇌기를 한껏 끌 어 올렸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뇌기는 반응 하지 않았다. 마치 단전이 텅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설마, 산공독에 당한 건가?’

몸에 나타난 증상이 딱 산공독의 그것과 같았다. 산공독은 내기를 흐 트러뜨리는 데 특화된 독으로 무색 무취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독공을 익힌 자가 아니면 분간해 내기가 쉽 지 않았다.

‘대체 어떤 놈들이 이따위 개수작 을 부린 거지?”

설우진은 혈봉들의 공격을 피하며 흉수로 의심되는 이들을 하나씩 머 릿속에 떠올렸다. 하지만 판단의 근 거가 너무 미약했다.

‘일단 저것들부터 때려잡고 고민하 자.’

설우진은 혈봉들을 노려보며 천뢰 도를 뽑아 들었다. 당장에 내력을 쓰진 못해도 그에겐 긴 세월 몸으로 체득해 온 야수감각도가 있었다.

야수감각도는 감각의 무공이다. 내 력이 없어도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기관만 멀쩡하면 그 위력을 십분 발 휘할 수 있었다.

쉭쉭.

사위를 둘러싼 혈봉들이 앞다퉈 달 려들었다.

설우진은 두 눈에 잔뜩 힘을 줬다. 눈을 자극시켜 일시적으로 시각의 극대화를 꾀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넓어지면서 좁 쌀만 한 크기로 보이던 혈봉들이 참 새만 한 크기로 커졌고 그에 따라 설우진의 움직임 또한 전에 없이 기 민해졌다.

쏴아악.

허리에서 뽑혀 나온 천뢰도가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뇌기를 머금지는 않았지만 강한 근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가볍게 받아넘길 수준이 아니었다.

이에 목숨에 위협을 느낀 혈봉들은 필사적으로 날갯짓을 해 댔다. 하지만 천뢰도가 일으키는 바람은 혈봉들이 도망치도록 놔두지 않았 다. 바람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혈봉 들. 천뢰도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 고 녀석들의 몸을 바스러뜨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설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뢰도를 거둬들였 다. 그 주변에는 혈봉들의 잔해로 보이는 붉은빛깔의 가루들이 자욱하 게 깔려 있었다.

‘혈봉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내게 달려들었을 리 없어. 그렇다는 건 내 몸에 녀석들을 유인할 만한 뭔가 가 있었다는 건데………………’

한숨 돌린 설우진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고 한참 만에 혈봉들을 불러들인 원흉을 찾아내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것은 술동이 를 들고 가던 청년이 미안하다며 건 네줬던 철전이었다.

철전은 한눈에 보기에는 아무런 특 이점이 없었다. 시중에서 볼 수 있 는 흔하디흔한 철전이었다.

그런데 코끝에 가져가 보니 알싸한 매운 향이 풍겼다.

‘이 독특한 향, 낯설지가 않은데. 어디선가 분명히 맡은 적이 있어.’

설우진은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었 다. 그리고 기억해 냈다, 향기의 주인을.

“어쩐지 혈봉들이 미친 듯이 달려 든다 했더니. 사천의 괴화인 홍설련이었어.”

홍설은 사천에서만 서식한다고 알려진 꽃이다. 겉보기엔 무척이나 수수한 꽃인데 꽃이 지고 난 뒤에 맺는 열매가 엄청나게 매웠다. 하나 만 먹어도 입천장이 홀라당 벗겨질 정도였다.

그래서 사천 사람들은 홍설련을 괴 화라 불렀다. 생긴 것과 풍기는 향 이 너무 상반됐기 때문이다.

“크큭, 이거 내가 제대로 한 방 먹었는걸. 설마 이런 조잡한 수법으로 내 빈틈을 파고들 줄이야.”

설우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사실 일반적인 자객이 달려든 것이 었다면 이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겐 살기를 읽어 낼 수 있는 경험과 능력이 있었기에.

한데 아까 부딪혔던 청년은 살기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연기까지 자연 스러워 설우진도 깜빡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받은 게 있으면 돌려줘야지. 어디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설우진은 자신이 지나쳐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청년과 부딪혔던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홍설련의 향은 진하고 강해. 손을 씻는다고 해도 하루 정도는 있어야 완벽하게 사라지지. 그리고 이 주향 또한 옷을 벗는다고 해도 몸을 씻지 않는 한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 

설우진은 낭인 시절 추종술에 남다 른 재능을 보였다. 감각도가 인간의 오감에 기반한 무공이다 보니 자연 스럽게 감각이 다른 이들보다 발달 한 것이다.

특히 후각은 시각 못지않은 숙련도 를 자랑했다. 수많은 향이 뒤섞인 곳에서도 원하는 향만을 걸러낼 수 있을 정도였다.

‘홍설의 향과 이 주향을 쫓아가면 놈이 어디에 숨었든 찾아낼 수있어, 물론 시간은 별로 없지만.’ 

설우진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후 각의 영역을 확대했다. 기민해진 후 각에 닿을 듯 말 듯 홍설련의 향과 주향이 풍겨 왔다.

설우진은 그 향을 쫓아 빠르게 신 형을 날렸다.

내기를 전혀 사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움직임은 한 마리 대 호처럼 날래고 거칠었다.


“후우, 긴장했었는데 생각보다 잘 했어. 그 남자 지금쯤 혈봉한테 꽤 나 시달리고 있겠지? 뭐 그래도 무 공을 익혔으니 혈봉에 쏘여서 죽지는 않을 거야.”

시전에서 멀리 떨어진 야산 계곡에 청년이 얼굴을 비췄다. 그는 옷에 묻은 술 냄새를 맡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빠른 손놀림으로 옷고름을 풀었다.

사르륵 내려가는 옷자락. 한데 가 슴에 무명천이 돌돌 감겨 있었다. 청년은 잠시 가슴 어름을 내려다보 더니 단단하게 묶여 있던 매듭을 풀 어냈다.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무명천 안쪽에서 박속같이 새하얀 가슴이 돌출되어 나온 것이다.

“아, 아까부터 저리고 아팠는데 이 제야 살 것 같네.”

청년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매만졌다. 뭉친 살을 풀어 주는 일종의 안마였다.

사실 청년은 남장 여인이었다. 임 무 때문에 일부러 남자로 분한 것이 아니라 사문을 잇기 위해 여자가 아 닌 남자로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그리 먹었을지언정 여자로서의 신체적 변화는 막을 수 가 없었다. 그녀는 성장기에 유난히 가슴이 발달했다. 한 손으로 다 쥐 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사부 만이 자신이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설하야, 이까짓 불편함쯤은 가볍 게 참아 낼 수 있어야 해. 사부님이 아니었으면 진즉 기루에 팔려가 고 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 거야.’

그녀는 유설하란 이름을 지니고 있 었다.

한데 그녀의 인생은 예쁜 이름처럼 순조롭지 못했다.

그녀는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그녀의 아 버진 부인을 잃고 난 뒤 술과 도박 에 빠져 방탕한 삶을 보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 보려 노력했지만 한번 빠져든 도박의 늪 은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 두웠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도박빚에 팔려 기루로 끌려갔다.

중도에 사부가 구해 주었기에 망정 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녀의 삶은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 다.

옷을 다 벗고 난 뒤 유설하는 시 원하게 흘러가는 계곡물에 몸을 담 갔다.

손끝에 남아 있는 홍설련의 향과 살갗에 묻은 술이 한 번에 씻겨 나 가는 느낌이었다.

“후훗, 이거 쥐새끼를 찾으러 왔다 가 제대로 눈요기하게 생겼네.” 

“웬 놈이냐!”

유설하가 황급히 몸을 물속으로 감 추며 사위를 살폈다. 그러고 빠르게 바닥을 훑어 둔탁하지만 어느 정도 날이 서 있는 돌을 찾아내 오른손에 쥐었다.

“벌써 내 목소릴 잊어버린 거야? 불과 반시진 전에 대화를 나눴던 사 이잖아.”

수풀 너머에서 설우진이 걸어 나왔다.

옷을 벗은 여인을 앞에 두고서도 그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어, 어떻게 여길……………?”

“이 철전이 알려 줬지.”

설우진이 홍설련의 향이 짙게 배어 있는 철전을 흔들어 보였다.

‘저게 말이 돼? 아무리 홍설련의 향이 짙다고 해도 시전에서 이곳까지오리는 족히 되는 거린데.’

유설하는 도무지 지금의 상황이 납 득되질 않았다.

개도 아니고 어찌 특정한 냄새만을 쫓아 이곳까지 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뭐라 얘기할 새 도 없이 설우진이 계곡 안으로 들어 와 버린 것이다.

“내가 보기와 다르게 성격이 그리 느긋하지 못해. 그러니까 대, 어떤 놈이 내 손을 이리 만들라 시켰는 지.”

설우진이 그녀의 눈앞에 오른 손가 락을 접었다 펼쳤다. 다른 손가락은 멀쩡한데 혈봉에게 쏘인 검지의 움직임이 평소와 다르게 굼떴다.

“미안하지만 의뢰인은 밝힐 수 없어요.”

유설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 저었고 순간 설우진의 얼굴에서 웃 음기가 사라졌다.

“아직 사태 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인데, 의뢰가 실패한 시점에선 너희들은 죽은 거나 다름없어. 이 몸뚱이도 마찬가지고.”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