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24화 : 반전 경연 (1)
반전 경연 (1)
경연이 시작된 지 한 시진이 훌쩍 지났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치마와 저고리 를 완성하고 그 위에 새겨 넣을 자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고리와 치마에 들어가는 자수는 옷의 가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였다. 자수가 얼마나 조화를 이루느 냐에 따라 옷맵시가 달라 보이기 때 문이다.
보조들이 옷을 잡고 선수들이 부지런히 바늘을 놀리기 시작했다. 신중하면서도 빠른 손놀림이 인상적이었다.
그중에는 역시나 벽라점의 장학우 와 태희점의 홍설의 솜씨가 돋보였 다. 둘은 서로 경쟁하듯 쉴 새 없이 손을 놀려 댔다.
밋밋하던 저고리와 치마에 두 송이 꽃이 피어났다. 얄궂게도 두 사람이 선택한 꽃이 같았고 그것은 화중화 로 불리는 모란이었다. 차이가 있다 면 장학우는 붉은색 모란을, 홍설은 자줏빛 모란을 택했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이 실력을 발휘하는 동안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렸다. 우위를 가릴 수 없는 두 사람의 솜씨에 다들 한껏 매료된 표정 이었다.
그로부터 반시진 뒤. 다른 경쟁자 들보다 한발 앞서 두 사람이 완성된 옷을 양태성에게 건넸다.
두 사람의 작품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주어진 시간보다 빨리 완 성을 시켰음에도 실이 삐져나오거나 자수의 방향이 어긋난 부분이 전혀 없었다.
“아…….”
여기저기서 절망에 찬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경연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많이 남아 있었지만 다들 전의를 상실한 듯 바늘을 놀리는 속 도가 현격히 느려졌다.
“슬슬, 움직여 볼까?”
경연이 끝나가는 분위기 속에서 설 우진이 두 개의 바늘을 집어 들었 다. 그러고 바늘 코에 각각 흰색과 붉은색 수실을 끼웠다.
“이제 다 틀렸소. 헛고생 그만하고 돌아갑시다.”
나철환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설우 진을 바라봤다.
남은 시간은 이각여 남짓. 정상적 으로 수를 놔도 버거운 시간인데 저 불편한 손으로 자수를 완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후훗, 진짜 경연은 이제부터야.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라고.”
설우진이 단전에서 뇌기를 끌어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온 뇌기는 설우진이 양손에 쥐고 있던 바늘을 서서히 감싸 안았다.
한쌍의 바늘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설우진은 가는 미 소를 그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하나의 그림을 떠올렸 다, 자혜 공주의 마음을 사로잡을 그것을.
“시간 다 돼 가는데, 저게 뭐 하는 짓이래?”
“신령님께 기도라도 하는 모양이 지.”
“천수신녀를 대신해 나왔다고 하더 니 경연이 주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성했나 보군.”
곳곳에서 설우진을 향한 수군거림이 전해졌다.
그런데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 럼 사람들의 눈을 의심케 할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늘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한 쌍의 바늘이 스스로 저고리로 옮겨 간 것이다.
쉭쉭 쉭쉭.
바늘은 경쾌하게 위아래로 춤을 췄 다.
녀석들이 춤을 출 때마다 꼬리에 달린 수실은 밋밋했던 저고리에 아 름다운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그 모습 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시종일관 불만을 표했던 나철환도 끼어 있었다.
‘이런 신기가 있었으면 진즉에 쓸 것이지, 하여간 어린놈이 음흉하다 니까. 그나저나 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으려나?”
나철환은 설우진은 흘겨보며 하늘 을 슬쩍 올려다봤다. 경연이 시작될 때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어느새 서 편 끝자락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하지만 설우진은 시간에 쫓기는 와 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에게 이번 경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책 이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자혜 공주는 황궁 내에서 별종이 라 불릴 정도로 검박한 성품을 자랑 했어. 그런 그녀에게 화려한 자수가 들어간 옷은 어울리지 않지.’
설우진은 전생에 자혜 공주를 호위 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그녀의 곁 에는 금의위들이 진을 치고 있어 직 접 얼굴을 볼 기회는 없었다. 하지 만 그녀를 수행하던 시녀들의 대화 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녀에 대해서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알 수 있었 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공주라는 지위 에 어울리지 않게 소박하다는 점이 었다. 그래서 설우진은 저고리에 화 려함의 상징인 모란 대신 수수한 멋을 자랑하는 매화를 수놓았다.
저고리의 어깨 어름에 내뻗은 매화 가지 위로 은은한 선홍빛의 매화들 이 저마다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 했다. 마치 살아 있는 나무처럼 생 동감이 넘쳤다.
하지만 경쟁자들은 대부분 그의 작 품에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쯧쯧, 황궁 경연에서 그 흔하디흔 한 매화를 수놓다니. 이걸로 승부는 결정 났군.’
사람들은 머릿속에 설우진의 이름 을 깔끔히 지웠다.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여긴 것이다.
‘후훗, 아무리 바느질 솜씨가 좋아 도 연륜이란 건 무시할 게 못 되지. 이번 황궁 경연은 우리 벽라점의 승 리야.’
고성만은 설우진의 작품을 보고 승 리를 확신했다.
이윽고 경연의 끝을 알리는 북소리 가 태화전 앞뜰에 울려 퍼졌다.
“경연은 끝났다. 다들 완성된 작품 을 들고 앞쪽으로 나오도록.”
안태성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참가자들은 부랴부랴 완성된 작품을 들고 그의 앞으로 가 건넸다. 안태 성은 참가자들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일각여 뒤에 공주님이 직접 태 화전에 나와 심사를 진행할 것이라 전했다.
“잠깐.”
설우진이 옷을 건네주고 돌아서는데, 고성만이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설우진이 고성만의 얼굴을 빤히 쳐 다보며 물었다.
“왜 다른 문양도 많은데 매화를 택 한 것이냐?”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화 려한 것만 보고 살아오신 공주님이 니 오히려 색다른 것에 시선이 가지 않을까 싶어 매화를 고른 것뿐입니 다.”
“쯧쯧, 아직 생각이 많이 어리구나. 화려한 것에 취해 사는 사람들은 보 다 화려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건 너처럼 탐욕스러운 인간들한 테나 해당되는 얘기고.’
“일단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 습니다.”
설우진은 속내를 감춘 채 정석적인 답변을 했다. 이에 고성만은 자신에 게 쏠린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의 어 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격려의 말을 전했다.
“결과가 좋지 못하더라도 실망 말 거라. 네 나이가 어리니 기회는 언 제고 또 올 것이다.”
“그 말씀, 새겨듣지요.”
설우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감 사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공주님 납시오.”
경연 심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의 시선이 태화전으로 향했다. 면사 로 얼굴을 가린 자혜 공주가 어전 시위들을 대동한 채 계단을 내려오 고 있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경연 참가자들이 앞다퉈 허리를 숙 였다. 자혜 공주는 그들을 흘깃 쳐 다보고는 심사석으로 향했다. 그녀 가 의자에 앉자 안태성은 시녀들로 하여금 참가자들이 제출한 옷을 가 져오게 했다.
참가자들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됐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따라 승부가 결정 나기 때문이다.
안태성은 가장 먼저 벽라점의 옷을 그녀에게 선보였다. 고성만과 은밀 히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보니 사전 에 미리 얘기가 된 부분 같았다.
“공주마마, 벽라점의 침선이 만든 모란 궁장입니다. 붉은빛을 머금은 모란의 자태가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억지로 과장한 말이 아니었다. 장 학우의 손을 통해 완성된 모란 궁장 은 아름다웠다. 특히 여인의 입술처 럼 붉게 물든 모란 꽃잎은 보는 이 의 가슴을 떨리게 할 정도였다.
‘후훗, 여인네란 모름지기 화려한 것에 취하기 마련이지. 홍설의 자모란도 화려하긴 하지만 장 침선의 적 모란에 비할 바는 아니지.’
고성만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번졌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