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25화 : 반전 경연 (2)
반전 경연 (2)
그런데 이어진 자혜 공주의 반응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가타부 타 말도 없이 다음 옷으로 손을 가 져간 것이다.
“대체 왜……?”
고성만은 저도 모르게 속에 담고 있던 말을 밖으로 내뱉었다. 그녀의 반응이 납득되질 않은 것이다.
“고 점주님, 과유불급이란 말 아시 죠? 저 적모란은 화려함이 너무 과 했어요. 아무리 여자들이 화려한 꽃을 좋아한다지만 저렇게 붉은 건 좀 부담스럽거든요.”
홍설이 미소 띤 얼굴로 자혜 공주 의 속마음을 대신 전했다.
“하면 자모란을 선택한 것도……?”
“네. 과하지 않은 화려함을 찾은 거죠.”
‘빌어먹을.’
고성만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찰나에 자혜 공주 가자모란 궁장을 밀어냈다. 적모란 궁장을 대할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 다.
“후훗, 홍 부인, 당신네 것도 화려함이 과했던 모양이오?”
고성만의 날 선 반문에 홍설은 아 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예측이 빗나간 것에 꽤나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사이 심사는 계속 진행됐다. 옷이 자혜 공주의 손에 머무르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할 정도로 짧았 다. 덕분에 마지막 차례로 밀려 있 던 설우진의 홍매 궁장이 반각여 만 에 자혜 공주 앞에 선을 보였다.
홍매 궁장은 앞서 선보였던 다른 궁장들과 달리 단조롭고 소박했다. 화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담백 한 색감에 자수가 들어가 있는 저고리 오른편에는 은은한 붉은빛을 띤 매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혜 공주는 궁장을 빤히 바라봤 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 다. 이에 참가자들의 얼굴이 굳어졌 다.
‘설마 저런 평범한 옷을 맘에 들어 하시진 않겠지?’
여기저기서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서서히 고조되는 불안감.
바로 그때 자혜 공주의 입이 열렸다.
“별장, 이 옷 누가 만든 거죠?”
그녀가 안태성을 불렀다.
안태성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설우진 쪽을 슬쩍 쳐다본 뒤 답했다.
“저쪽에 서 있는 일품점 대표 설우 진입니다. 한데 그 옷이 맘에 드시 는 것인지요?”
“별장의 눈엔 이 옷이 별로인가 요?”
“아, 아닙니다. 전 그저 앞에 선을 보인 옷들에 비해 지나치게 소박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안태성은 은근슬쩍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후훗, 그렇게 보였다면 유감인데 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궁의 의 복을 책임지고 있는 별장이라면 저 옷의 진정한 값어치를 알아볼 수 있 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면사 너머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전해졌다.
‘대체 내가 뭘 놓쳤다는 거지?’
안태성은 의아한 마음으로 재차 설 우진의 홍매 궁장을 살폈다. 그리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 위해 마음속의 편견을 걷어 냈다.
그런데 그 순간 향기가 느껴졌다, 코끝을 간질이는 싱그러운 매화향 이.
‘서, 설마 심혼자수는 아닐 테지? 그 경지는 전설 속에나 존재하는 것 인데.’
심혼자수. 마음속의 혼을 담아 수 를 놓는다는 뜻으로 강호인들에 비 유하면 심검지경과 비슷한 경지였다.
마음이 이는 대로 바늘이 움직이기 에 사물을 실제와 가깝게 표현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심혼자수로 탄생 한 작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 와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데, 방금 전에 안태성이 맡은 매화향이 바로 그 증거였다.
“어때요, 제 안목이 틀렸나요?”
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뒤쪽 에서 자혜 공주의 나긋나긋한 목소 리가 들려왔다.
안태성은 다급히 몸을 돌려 고개를 조아리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궁의별장으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편견에 눈이 어두워 그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이 옷을 만든 이에게 우승을 안겨 줘도 불만은 없겠지요?”
“무, 물론입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참가자들 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막연 한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 이다.
황궁 경연은 자혜 공주의 결정에 따라 설우진의 우승으로 끝이 났다. 참가자들은 영혼 없는 박수로 그의 우승을 축하하며 쓸쓸히 황궁을 나 섰다.
경연이 끝난 뒤, 설우진에게는 자 혜 공주와 독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는 엄청난 혜택이었다.
하지만 정작 설우진은 이 자리가 영 불편했다. 상대가 공주인 점도 한몫했지만 그보단 두 눈을 부라리 며 사납게 노려보고 있는 호위들이 부담스러웠다.
“대체 그 나이에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거죠?” “음, 공주님이 들으시면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운이 좋았습니 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제가 이번 경연에 참가하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이 손을 다쳤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검지가 제대로 움직이질 않습니다.”
“그런 손으로 어떻게……?”
“무인들에겐 기를 다룰 수 있는 능 력이 있습니다. 이 기는 눈에 보이 지 않지만 꾸준한 수련을 통해 마음 이 이는 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설우진은 그녀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손바닥에 두 개의 바늘을 올 려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 에 암습을 우려한 호위들이 저지하 려 했지만 자혜 공주가 손을 들어 막았다.
잠시 후 두 개의 바늘이 허공에서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수를 놓을 때보다 그 움직임이 더 정교해 보였다.
“대단하네요. 무인들은 다 당신처 럼 그렇게 기를 다룰 수 있는 건가요?”
“제 자랑 같지만 이렇게 자유자재 로 기를 다룰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기를 다루는 기술은 축적 된 경험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 다.”
“음, 그럼 말이 안 되잖아요, 당신 은 이제 겨우 약관에 불과한 나인 데.”
“그, 그건…….”
설우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런, 내가 전생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간과했잖아. 이걸 어떻게 해 ……?’
그녀의 의심에 찬 눈초리에 설우진 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일반적으론 그렇지만 천에 한명 정도는 기를 다루는 능력을 타고나 기도 합니다. 제가 딱 그런 경우죠.” “푸훗, 스스로 얼굴에 너무 금칠을 하는 거 아니에요?”
“뭐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 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라………….”
설우진은 구차한 변명 대신 당당히 스스로의 재능을 인정했다.
“당신은 내가 어렵지 않나요? 보통 의 사람들은 날 보면 눈치를 보기 바쁜데.”
“제가 공주님께 죄를 진 것도 아닌 데 굳이 눈치를 볼 필요가 있을까 요?”
설우진은 공주 앞이라고 기죽지 않 았다. 상대가 황제라면 모를까 그 정도는 낭왕 시절에도 적잖게 만나 본 경험이 있었다, 낭인을 필요로 하는 곳은 황궁에도 있었기에.
“그 당당함이 맘에 드네요. 혹시 내게 바라는 게 있나요?”
자혜 공주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 다. 이에 설우진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원하는 바를 얘기했다.
“저희 일품점이 황궁에도 납품할 수 있도록 길을 놓아 주셨으면 합니 다.”
“보기보다 욕심이 많네요. 하지만 내 입장에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 니 들어주죠. 물론 그 이후의 일은 일품점의 몫이에요.”
“그건 염려 마십시오. 당당히 품질 로 승부를 겨뤄 이길 자신이 있습니 다.”
황궁은 중원의 그 어느 곳보다 경 쟁이 치열한 곳이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과도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 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그 과실은 크 고 달았다. 황궁에 납품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업체들과의 경쟁 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어서다.
“시장하지 않나요?”
대화가 끝나갈 무렵 자혜 공주가 넌지시 물었다.
“조금 시장하기는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함께 저녁이나 먹죠.”
“공주님.”
자혜 공주의 등 뒤에 시립해 있던 귀여운 외모의 소녀가 다급히 소리 쳤다. 소녀는 자혜 공주의 전담 시 녀인 란월이었다.
“월아, 그렇게 도끼눈 뜨고 쳐다볼 것 없어. 이미 폐하께도 허락받은 일이야.”
“그래도 자칫 저자로 인해 지저분 한 구설수에 오르지는 않을까 소녀 는 걱정되옵니다.”
란월이 설우진을 사납게 째려봤다. 하지만 공주와의 식사 자리가 달갑지 않은 건 설우진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상 황궁의 인물들과 얽히는 건 뒤끝이 좋지 못했다.
궁내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해관 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 자혜 공주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덕분에 주변에 적이 많았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자혜 공주. 당시에는 그녀가 병사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는 독살을 당 했었지, 저 어린 계집에 의해.’
설우진의 시선이 란월의 얼굴에 꽂 혔다.
사실 그는 자혜 공주보다 란월의 얼굴이 더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와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었기 때문이 다.
당시 란월의 신분은 상재였다. 상 재는 후궁들 중 가장 아래 서열에 속했다.
한데 그녀는 상재의 신분에 만족하 지 못했다. 그녀는 더 높은 곳을 바 라봤고 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았다. 그 독란함에 설 우진도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똥이 무서워 피하냐? 더러워서 피 하지.’
“공주님, 시녀의 말이 맞습니다. 식 사는 다음 기회에 하시지요.”
설우진은 정중히 식사 제안을 거절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호의로 가득했던 시선이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지금 일개 시녀의 말이 내 뜻보다 더 중하다는 건가요?”
‘뭐야, 갑자기!’
설우진은 한순간에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난 황제 폐하의 피를 이은 공주예 요. 내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건 황 제 폐하 단 한 분뿐이에요.”
자혜 공주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 기세는 거칠게 몰아치는 파랑처 럼 위압적이었다.
‘이거 순진한 얼굴 뒤에 사나운 암 호랑이가 숨어 있었군. 역시 패황이라 불리는 영락제의 딸이라는 건 가?’
설우진은 자신을 찍어 누르는 자혜 공주의 기세에 다급히 고개를 조아 렸다. 그녀의 심기를 더 거슬러 봐 야 득 될 게 없다 판단한 것이다. 그의 재빠른 대처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자혜 공주의 기세가 봄날의 순풍 으로 변했다.
저녁 식사는 자혜 공주가 머무는 홍화전에 마련됐다.
그녀가 미리 지시해 뒀는지 설우진 이 그녀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서자 천하 진미들이 식탁에서 저마다 그 자태를 뽐냈다.
그런데 특이하게 식탁에 단 하나 조리되지 않은 상태로 올라 있는 것 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갈색 몸체를 한 오리였다.
녀석의 목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긴 시간 말렸음에도 껍질에서 팽팽 한 탄력이 느껴졌다.
“지난번에 나한테 약속했었죠, 다 음에 만나면 맛있는 북경고압을 만 들어 주기로.”
자혜 공주가 환하게 웃으며 오리를 가리켰다.
그녀의 말에 설우진은 살짝 당황하 다가 이내 이틀 전에 식당에서 만났던 복면 여인을 떠올렸다.
그러고 면사 여인과 눈앞의 자혜 공주의 체형이 꼭 닮아 있었다.
‘이것 참, 경연을 앞두고 나도 정 신이 없었나 보군, 두 사람이 동일 인이었다는 걸 여태껏 눈치채지 못 하고 있었다니.’
설우진은 어이없다는 듯 입가에 실 소를 머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절 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그만큼 황궁 경연은 그에게도 꽤 큰 부담으 로 작용했다.
“설마 북경고압 때문에 절 뽑으신 건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다시 무르기라도 할 건 가요?”
자혜 공주가 장난스러운 미소로 반문했다.
“그럴 리가요. 그게 사실이라면 저 오리한테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했습니다.”
“푸훗,재밌네요. 더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배속이 아우성이 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