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4권 – 26화 : 반전 경연 (3)
반전 경연 (3)
자혜 공주가 배를 매만지며 오리 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얼른 북경고 압을 만들어 달라는 무언의 요구였 다.
이에 설우진은 생오리를 들고 화로 로 향했다. 그리고 천뢰도를 오리 궁둥이에 깊숙이 꽂아 넣고 적당한 높이에서 굽기 시작했다.
기름이 뚝뚝 떨어지면서 껍질이 노르스름하게 익어 갔다.
‘이쯤에서 슬슬 안을 익혀 볼까.’
떨어지는 기름의 양이 줄어들 무렵 설우진은 단전의 뇌기를 끌어 오려 천뢰도 쪽으로 서서히 밀어 넣었다. 뇌기는 오리의 살 속으로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때를 기 다렸다.
“타올라라.”
뇌기가 골고루 퍼졌을 무렵 설우진 이 순간적으로 강한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뒤이어 오리의 몸통에서 흰 김이 피어올랐다. 그 김 속에는 코끝을 간질이는 고소한 향이 듬뿍 담겨 있 었다.
“자, 완성됐습니다.”
설우진이 탐스럽게 익은 북경고압을 접시에 내려놨다.
애타게 요리가 완성되기만을 기다 리고 있던 자혜 공주는 공주로서의 체통도 잊은 채 손으로 살점을 뜯어 냈다.
어찌나 고루 잘 익었는지 그녀의 가녀린 손길에도 살점은 쭉쭉 찢어졌다.
바사삭.
입안에 들어간 오리 고기는 한입 베어 물기 무섭게 바스러졌다. 그리 고 그 바스러진 살점 사이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했던 기름이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고소함의 결정체였다.
‘너무 맛있어.’
자혜 공주의 손길은 빨라졌고 순식 간에 오리 한 마리가 그녀의 배속으 로 사라졌다. 그 모습에 설우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미리 차려 져 있던 다른 요리들로 배를 채웠 다.
“황궁 숙수로 전향해 볼 생각 없어 요?”
식사가 끝나고 가볍게 차를 나누는 자리에서 자혜 공주가 뜻밖의 제안 을 했다.
설우진은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 지 않고 정중히 거절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가 만들 수 있는 요리라곤 구이가 전부입니다.”
“흐음, 그거 아쉽네요, 당신이 만든 요리를 매일 먹고 싶었는데.”
‘이 아가씨가 무슨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는 거야?’
설우진은 순간 움찔했다.
묘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 때문 이었다.
눈앞의 자혜 공주는 아름다웠다.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이목구비는 화공이 직접 그려 넣은 것처럼 크고 또렷했다. 게다가 몸매는 세류요처 럼 가늘어 남자로 하여금 절로 보호 본능이 일게 했다.
‘설우진, 정신 차려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여자한테 무슨 되도 않는 흑심이냐!’
설우진은 머릿속에서 야릇한 옷차림으로 미소 짓고 있는 자혜 공주를 애써 떨쳐 냈다.
바로 그때. 시녀 란월이 손님이 찾 아왔음을 알렸다. 그런데 그 손님이 달갑지 않은 손님인지 자혜 공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잠시 후 방 안에 화려한 궁장으로 치장한 여인이 들어섰다. 걸어 다니 는 보석함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 을 정도로 그녀는 온몸에 보석을 치 장하고 있었다. 수수하게 차려입은 자혜 공주와는 확실히 대비되는 모 습이었다.
“언니가 제 방엔 무슨 일이죠, 평 소엔 발이 더러워진다고 근처에 오는 것도 꺼려하시더니?”
“호호홋, 인상 좀 피렴. 난 그저 네가 젊은 사내를 백화전 안으로 들 였다고 하기에 궁금해서 찾아와 본 거란다.”
여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설우진 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는 품평하듯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제법 곱상하게 생겼구나. 듣기엔 포목점 아들내미라고 하던데, 이렇 게 보니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 나.”
“손님을 앞에 두고 이 무슨 무례 죠?”
자혜 공주가 발끈해 소리쳤다.
“너한테나 손님이지 내게는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너! 왜 날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거지? 황족 능멸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괜한 불똥이 설우진에게 튀었다.
‘보아하니 공주 중 하나인 것 같은 데, 성깔 한번 고약하군. 게다가 분 을 얼마나 찍어 바른 거야? 그 분 내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네.’
설우진은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흘 겨봤다.
분명 예쁘장한 외모였지만 자혜 공 주에 비해선 손색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장이 과했다. 흰 피부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이마며 볼에 분이 짙게 묻어 있었다.
“제 손님한테 쓸데없이 시비 걸지 말고 용건이나 말씀하죠.”
“쯧쯧, 누가 천박한 강호 출신 아 니랄까 봐 그 성질머리하고는. 오늘 내가 널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천 장군 때문이야.”
“……”
자혜 공주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다.
“장군가에서 전해 오기를 이번에 천 장군이 북벌을 끝마치고 돌아오 는 대로 폐하를 만나 뵙고 성혼을 청할 것이라고 하더구나.”
“그게 어쨌다는 거죠?”
“어이없게도 천 장군이 원하는 여인이 바로 너라고 하는구나.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니?”
만화 공주가 얼굴을 붉히며 열을 냈다.
그녀가 얘기하는 천 장군은 대명의 병권을 쥐고 있는 구문제독의 차남 으로 약관이라는 젊은 나이에 장군 의 지위에 오른 천강후란 인물이었 다.
그는 훤칠한 외모에 지덕체를 두루 갖춰 북경 여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에는 한 여 자가 들어와 있었다. 바로 자혜 공 주 주소령이었다.
“그분과 제가 맺어지는 걸 걱정하는 거라면 염려 말고 돌아가세요, 그분과 제가 성혼하는 일은 절대 없 을 테니.”
“그 말을 어찌 믿는단 말이냐?”
“그럼 제가 어떻게 해 줄까요?”
“천 장군의 마음이 돌아서도록 확 실하게 해 줬으면 좋겠다. 가령 다 른 이와 약혼을 한다든가.”
만화 공주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설 우진을 향했다.
‘저 미친년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 이는 거야? 보아하니 그놈이 탐나서 강짜를 부리는 모양인데, 이런 식은 곤란하지, 아무리 공주라도.’
설우진은 슬쩍 바닥으로 뇌기를 흘 려보냈다. 비침자수를 통해 제뢰의 경지가 한층 더 올라간 상태라 뇌기 는 은밀히 그녀의 발끝까지 조용히 파고들었다.
“억지도 정도껏 부리세요. 이런 식 이면 저도 폐하께 고할 수밖에 없어 요.”
“지금 네년이 폐하의 총애를 믿고 까부는 것이냐? 어디 한번 해볼 테면 해봐라! 네가 그리 입을 놀리 는 순간 그 화는 네 어미에게 닥치 게 될 테니.”
만화 공주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협 박했다.
그 협박이 먹혔는지 자혜 공주는 몸만 부르르 떨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천 장군이 북경으로 돌아오기 전 까지 태도 분명히 해.”
만화 공주는 섬뜩한 경고를 남긴 채 방을 나섰다. 그 순간 설우진은 그녀의 발끝에 뇌기를 침투시켰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에게 뇌 기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 방에서 나간 뒤에 쓰러지면 괜한 의 심을 살 수 있기에 최대한 뇌기가 늦게 발동하게끔 손을 썼다.
“아까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요.”
만화 공주가 방을 나선 뒤 자혜 공주는 설우진에게 정식으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에 설우진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 다.
“아닙니다. 공주님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한데 언제부터 이리 홀대받으신 겁니까?”
“사실 전 황궁 밖에서 태어났어요. 황궁 밖으로 외유를 나온 폐하와 세 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 나던 강호 여인이 만나 사랑하게 된 거죠.”
“어머니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셨겠네요.”
“아니, 그렇지 않았어요. 어머닌 폐 하와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당당히 세상을 살아가셨어요, 그들이 마수 를 뻗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혜 공주의 두 눈에 전에 없던 살기가 일었다.
‘뻔히 짐작되는 상황이군. 황제에 게 새로운 비가 생기는 걸 원치 않 았던 황궁의 여인들이 은밀히 손을 썼을 테지.’
“그들의 손에 어머니가 억류되어 있는 상황인가요?”
“그, 그걸 어떻게?”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지레짐작한 것입니다. 한데 폐하께는 그 사실을 고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 께서는 억지로 그들과 함께 있는 것 이 아니거든요.”
“그게 무슨……?”
“그들은 야비하게 절 볼모로 내걸 었어요, 제가 공주의 자리에서 내려 오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자신들의 뜻에 따르라고.”
‘이거 기가 막히는군, 모녀가 스스 로 올가미에 걸려들도록 만들다니. 누가 머리를 썼는지 몰라도 그 속에 구렁이가 득실거리는 건 분명해.’
설우진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천 장군을 만나서 솔직하게 사정 을 얘기해야죠.”
“흠,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 은데요. 천 장군이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다면 되레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가령 공주님의 어 머니를 구하겠다고 그들을 직접 찾 아간다든지요. 아마 그들은 공주가 자신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며 되레 큰소리칠 것입니다.”
설우진은 예상되는 상황들을 하나 씩 짚어줬다. 전생의 경험이 뒷받 침됐기에 가능한 조언들이었다. “하면 어떻게 해야 하죠?”
자혜 공주가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설우진은 한 가지 묘책을 제 안했다. 그것은 바로 거짓 소문을 통해 어머니가 제 발로 밖으로 나오 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런 소문 하나로 어머니께서 움직이실까요?”
“하나뿐인 딸이 이름 없는 상가의 아들에게 시집간다고 하는데, 어느 부모가 가만있겠습니까? 아마 버선 발로 달려오실 겁니다.”
설우진은 성공을 자신했다.
황궁 경연이 끝난 뒤 황궁 안팎으 로 은밀한 소문 하나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자혜 공주가 황궁 경연의 우승자와 눈이 맞았다는 내용이었 다.
다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얘기라 며 일축했다.
공주와 상가의 아들은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한데 시녀들 사이에서 설우진을 공주의 처소에서 봤다는 목격담이 하 나둘 흘러나오면서 그 소문은 진실 에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그 소문 은 심처에 머무르고 있는 중년 여인 에게도 전해졌다.
“상아, 지금 그 말 누구한테 들은 게냐?”
“공주님의 처소에서 일하는 시녀들 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도통 믿을 수가 없구나. 그 자존 심 강한 아이가 어찌하여 그런 사내 에게 마음을 빼앗겼단 말이냐?”
“저도 그것이 의문스러워 더 자세 히 알아봤더니 그 사내가 무공을 익 히고 있다 합니다.”
“그럼 혹여 그자가 딸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은 아니냐? 섭혼술과 같은…….”
“그것까지는 저도…….”
“안 되겠다. 내 직접 령아를 만나 봐야겠다.”
중년 여인 설예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딜 가십니까?”
설예군이 처소를 벗어나려 하자 문 을 지키고 있던 수문위사가 팔을 들 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에 그녀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자혜 공주를 만나러 가는 길이 다.”
“천 귀비님의 허락은 받으셨습니 까?”
“잠시 얘기만 나누고 올 것이다. 그것도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하지 만 수문위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 았다.
“죄송하지만 천 귀비님의 허락이 없이는 이 문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 가실 수 없습니다.”
“일개 수문위사 주제에 오만방자함 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좋다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라.”
설예군이 앞으로 신형을 튕기며 허 리의 요대에서 낭창거리는 연검을 뽑아 들었다.
“서 부인, 검은 여인네가 휘두를 만큼 만만한 무기가 아닙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얌전히 내려놓으시 죠.”
수문위사는 정중히 말을 건네면서 도 입가에는 진한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에 설예군은 그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