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5권 – 31화 : 진실 공방 (2)
진실 공방 (2)
“좋아. 일을 그럼 복잡하게 만들 것 없이 그 유객을 용인문으로 불러들여.”
“그, 그건 좀……”
살객이 난감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칠흑야는 강호의 암적인 존재로 뿌리박혀 있 었다. 때문에 칠흑야를 배척하는 세 력이 강호에는 넘쳐났다. 그 많은 세력 중 용인문의 이름도 올라가 있 었다.
“살고 싶다면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토끼 같은 자식들을 생각해야 지.”
설우진은 살객의 귓가에 대고 은밀 한 협박을 가했다. 그 기세에 눌린 살객은 결국 설우진의 요구를 따르 기로 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냥 보험이라고 생각해. 잔머리 가 뛰어난 놈들은 언제나 제 몸 하 나쯤 빼낼 수 있는 구멍을 마련해 놓는 법이거든. 저놈은 아마 그 구 멍을 틀어막는 바위가 될 거야.”
설우진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북리강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 를 지어 보였다.
“왜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거지?”
“조금만 기다려 봐. 놈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잖아.”
“맞습니다, 선배님! 화산에서 만난 마천의 마두들은 잔혹하고 거칠었습 니다. 남궁벽이 제 실력을 믿고 그 들과 정면 대결을 펼쳤다면 아마 지 금쯤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화산에 뿌려졌을 겁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황보민 일행은 용인문에서 내준 객 방에 모여 있었다. 용인문주의 성격 을 보여 주듯 객방에 들여놓은 가구 들은 무척 검박했다.
탁자에는 빈 술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들이 축하주랍시고 비운 술병이 열이 넘었다. 그래서인지 모두들 얼 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선배님들, 골치 아픈 얘기는 이쯤 해 두고 앞으로의 일이나 논의해 보 죠.”
황보민이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이에 모두의 눈빛이 전에 비할 데 없이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황룡삼천을 아우르는 새로운 조직 을 만드는 게 정말 가능할까?”
“이번에 마천 놈들이 학관을 습격 하면서 삼천에 속해 있는 관도들 중 상당수가 죽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그중에서도 남천회의 피해가 컸지 요.”
“후훗, 모두 네 덕분이다. 기숙사를 배정할 때 남천회 놈들을 일부러 배 제하지 않았다면 그런 결과는 나오 지 않았을 것이다.”
당문초가 황보민을 한껏 치켜세웠 다.
이미 둘 사이에 은밀히 얘기가 오 고갔었는지 둘의 호흡은 척척 들어 맞았다.
“그럼 새롭게 만들어질 조직의 이 름은 무엇으로 하는 게 좋을까?”
“새로운 하늘을 열자는 의미에서 창천회 어떻습니까?”
“창천회라…….이름은 좋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당문초가 일행의 의견을 물었고 다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세를 따라가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전해졌 다.
“그럼 초대 회주는 당 선배가 맡아주시죠?”
명칭이 정해지자 황보민은 당문초 를 회주로 추천했다. 이번엔 서로 눈치를 봤다. 회주 자리만큼은 다들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욕심을 내는군.’
당문초가 사납게 눈을 흘겼다.
지금은 뜻이 맞아 한자리에 모여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서로 경쟁하던 사이였다.
그 말은 곧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당문초는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 서기로 했다.
“학관이 다시 문을 열려면 꽤 시일 이 걸릴 테니 회주를 정하는 건 조 직이 만들어진 뒤에 다시 논의하도 록 하지.”
당문초의 양보로 팽팽하게 전개되 던 신경전이 일단락됐다. 그러고는 다시 술자리가 이어졌다.
한데 바로 그때, 용인문의 총관이 그들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시죠?”
황보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총관을 쳐다봤다.
“새로운 생존자들이 찾아왔네.”
순간 모두의 얼굴이 경직됐다. 칠흑야의 살행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직감한 것이다.
황보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총 관을 따라나섰다. 그가 용인문주에 게 화산에서의 일을 털어놓기 전에 입을 막겠다는 심산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접객당에서 설우 진 일행과 맞닥뜨렸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북리강이 저들과 같이 있는 거 지?’
황보민은 다른 사람들보다 북리강 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다들 오랜만이다.”
북리강이 먼저 황보민 일당에게 알은척했다. 그의 말투엔 사나운 가시 가 돋쳐 있었다.
“선배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황보민이 북리강의 안위를 걱정했 다. 용인문주의 눈을 의식한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날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양쪽 발을 못 쓰게 됐다.”
“죄송합니다. 늦게라도 선배님을 구하러 나섰어야 했는데………….”
“정말 날 구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거냐?”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날이 밝는 대로 용인문의 무사들과 함께 화산으로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황보민은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 으며 슬쩍 용인문주 사도군과 눈을 맞췄다. 이에 사도군이 황보민의 말 에 힘을 실어줬다. 물론 순수한 의 도였다.
“저 친구의 말이 맞네. 내가 이미 늦었을 거라고 만류했음에도 불구하 고 부득불 화산으로 함께 가자고 청 하더군. 그 진심을 헤아려 주게나.”
“크큭, 사 문주님은 소문대로 사람 말을 참 잘 믿으시네요. 저놈이 이 곳에서 와서 어떤 헛소리를 지껄였 는지 모르겠지만 저기 모여 있는 저 치들은 위험에 빠진 관도들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천하의 개잡놈들입니 다.”
북리강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면전 에서 뻔뻔하게 말을 지어내고 있는 황보민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 진 것이다.
“자네 말이 심하군. 적들이 파 놓 은 함정에 걸려든 건 자네들의 잘못 이지 저 친구의 잘못이 아니지 않은 가? 더욱이 극구 말렸는데도 억지로 관도들을 끌고 갔다고 하던데…….”
“황보민, 아주 네 입맛대로 판을 꾸며 놨구나! 사 문주님,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십시오! 저놈 들은 화산에서 저와 함께 있었습니 다. 함정이라고 말리는 이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저놈들과 함께 그 함 정으로 뛰어들었단 말입니다!”
북리강이 설우진을 가리키며 화산 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밝혔다. “문주님, 저 말 귀 기울여 듣지 마 십시오. 저희한테 분풀이를 하기 위 해 말을 지어낸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흰 관도들을 버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북리강의 얘기에 황보민 일당이 입 을 모아 반박했다. 다수가 입을 털 어 내니 아무래도 혼자인 북리강 쪽 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바로 그때 한쪽에서 침묵하고 있던 설우진이 입을 뗐다.
“거, 작작들 하지. 집주인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들이야?”
“네 녀석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당문초가 적의 어린 시선으로 설우 진을 노려봤다.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이 반갑지 않은 것이다.
“하여간 옛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 다니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더니 내가 딱 그 꼴이잖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마천 놈 들에게 뒈지게 놔뒀어야 했어.”
“자네, 방금 그게 무슨 말이지?”
“들으신 그대롭니다. 제 등에 업혀 있는 멍청이가 말한 대로 함정에 빠 진건 저희들이 아니라 저놈들이었습니다.”
“그럼 더 말이 안 되는 것 아닌 가? 상대는 마천의 무리네. 함정에 빠졌던 게 사실이라면 어찌 저들이 이리 멀쩡한 모습으로 이곳에 와 있 겠나?”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함정에 빠졌던 것치고는 황보민 일 행은 너무 멀쩡했다. 진짜 마천의 무리와 부딪혔다면 적어도 사지 하 나쯤은 잘려 나갔어야 정상이었다.
“당시 매복해 있던 마천 놈들은 방 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저놈들의 피를 말려 죽이려 했던 겁 니다. 한데 바로 그때 제가 나타났습니다.”
“설마 자네가 마천의 무리를 제압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겐가?”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설우진은 사도군을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실을 얘기했다.
“문주님, 저놈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헛소립니다. 일개 관도가 무슨 수로 마천의 무리와 맞설 수 있겠습니까?”
당문초가 사도군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노력이 통 했는지 사도군은 설우진의 말을 신 뢰하지 못했다. 이에 설우진은 천뢰 도를 빼 들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도군 뒤 에 시립해 있던 호위들이 다급히 허 리로 손을 가져갔다.
“지금 그 행동은 무슨 의미인가?”
사도군이 손을 들어 호위들의 섣부른 움직임을 막으며 설우진에게 물 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니 행동으로 보여 드리려는 겁니다. 어디 한번 받아 보십시오.”
설우진이 좌보를 뻗으며 사도군의 정면으로 천뢰도를 세차게 휘둘렀 다. 강한 힘이 실려 있는 쾌도였다. 이에 사도군이 오른편에 서 있던 호위의 검을 뽑아 천뢰도의 궤적을 차단했다.
그런데 천뢰도와 맞닥뜨리는 순간 사도군의 두 다리가 뒤로 밀렸다. 내공을 쓰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설우진이 천뢰도를 거두며 의미심장한 미소로 그를 바라봤다.
사도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용인문의 비전검법 비룡검의 기수식 을 취했다.
“이번 공격을 막아 낸다면 자네의 말을 믿어 주겠네. 내공을 쓸 터이 니 자네도 힘을 아끼지 말게.”
내력을 끌어 올리자 사도군의 검 끝에서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 어올랐다. 순도 짙은 검기였다.
사도군이 보법을 밟으며 설우진의 전면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검기를 머금은 그의 검은 먹잇감을 노리고 달려드는 한 마리의 용처럼 사납게 아가리를 벌렸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한지 인의대협이라는 별호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뿌리가 의심될 정도로 기세가 사납군. 하지만 살기가 실려 있지 않은 검은 그저 소리만 요란할 뿐.’ 전면에서 사납게 들이치는 검을 보 면서도 설우진의 얼굴은 태연자약했 다.
분명 눈에 보이는 사도군의 검술은 위협적이었다, 공격을 허용하면 부 상을 피하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그의 검에는 중요한 한 가 지가 결여돼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살심이었다.
설우진은 검의 궤적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그의 돌발 행동에 사도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고 검의 흐름이 순간 적으로 끊어졌다. 설우진은 그 빈틈 을 놓치지 않고 검의 중단을 때렸 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강한 힘에 사도 군의 손아귀에서 검이 속절없이 빠 져나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검이 황보민 과 당문초 사이로 날아갔다. 두 사 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몸을 돌려 검을 피했다.
덕분에 그 뒤에 서 있던 양진걸이 벼락을 맞았다. 시야 너머에서 날아 든 검에 왼쪽 어깨가 꿰뚫리고 만 것이다.
“장강후랑추전랑이라 하더니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나의 완벽한 패밸세.”
사도군이 깔끔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럼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겁니까?”
“저 모습을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군.”
사도군의 시선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는 황보민과 당문초를 향 했다. 두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의 실책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젠장, 용인문주가 돌아서면 이제 까지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사도군의 시선이 싸늘해지자 황보민은 머릿속이 복잡 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도 당장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그사이 사도군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날 농락한 것은 참고 넘어가 줄 테니 이제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저 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게. 이게 내가 자네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렬세.”
사도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압박 을 가해 왔다. 하지만 황보민은 끝 까지 침묵을 고수했다.
“정녕 내가 손을 쓰기를 바라는가?”
사도군은 거칠게 기를 발산해 황보 민과 그 일당을 찍어 눌렀다. 스스 로 하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사죄 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그들의 무릎이 서서히 굽혀졌다. 그들은 거칠게 저항했지만 일문의 문주를 감당해 내기엔 아직 너무 어 렸다.
한데 무릎이 바닥에 닿으려는 찰나 접객당 안으로 일단의 무리가 들이 닥쳤다. 그들의 가슴에는 포효하는 황호의 얼굴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 었다.
‘저들은 검호대……… 게다가 그들을 이끄는 건 용 숙부잖아! 잘하면 이판 다시 뒤집을 수 있겠어.’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던 황보민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