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5권 – 5화 : 황보 장로 (2)
황보 장로 (2)
“에이, 대남궁세가의 자제께서 왜 이러실까? 너희 가문에서 한 달에 벌어들이는 돈이 성 한 채를 사고도 남을 정도라고 하던데.”
안휘성에 터를 잡고 있는 남궁세가 는 무력만큼이나 대단한 재력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합비 일대의 땅이 모두 남궁세가의 소유였고 십대상단에 드는 무애상단 도 그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남궁세가에서는 개도 전표를 배에 깔고 잔다는 우스갯소리 가 나올 정도였다.
“그, 그건 가문에 돈이 많은 거고 난 해당 사항이 없다. 이 돈도 몇 달 동안 모은 거다!”
남궁벽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대꾸 했다.
사실 그는 가문에서 지원해 주는 돈을 매번 돌려보내고 있었다. 아버 지에 대한 반발심의 표현이었다. 대 신 남몰래 일해서 돈을 벌었다.
“음, 이러면 곤란한데…………. 너한테 받을 돈을 감안해서 할인가를 책정 한 거란 말이지.”
설우진은 이마를 가볍게 감싸 쥐었 다. 그 모습에 마음이 급해진 남궁벽은 돈 대신 다른 걸 지불하면 어 떠냐고 제안했다.
“돈 말고 나한테 줄 게 있어?”
“네 호위를 서 주겠다.”
“호오, 천하의 검귀를 내 호위로 쓴다라…………. 이거 솔깃하긴 하네. 근 데 괜찮겠어? 사람들 눈도 있는데.”
“남들의 이목 따위 신경 안 쓴지 오래다.”
“좋아. 남은 일백오십 냥에 대한 대가는 그걸로 대신하자.”
“오랜만일세, 황보 장로! 그간 잘 지냈는가?”
학사들과 함께 창우대를 맞이하기 위해 밖에 나와 있던 학관 총관주 사마무기가 선두에서 말을 몰고 오 는 황보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 다.
“하하하! 저야 잘 지냈지요. 사마 선배님은 오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 력이 넘쳐 보이십니다.”
“경치 좋은 곳에서 아이들과 부대 끼고 지냈더니 절로 회춘한 모양일 세.”
“그 말씀을 들으니 부럽기 그지없 습니다.”
“자네도 은퇴하거든 이곳으로 오 게. 내 부관주 자리 하나 내줌세.” ‘이 늙은이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이런 궁벽한 곳에서 노년을 보내!’
황보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말로는 반갑다고 하지만 사실 그는 사마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 과는 반대되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마무기는 공명을 탐하지 않는 담 백한 인물이었다. 황룡 학관의 관주 자리도 맹주의 강권에 따라서 맡은 것일 뿐,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지금 그 말씀, 농은 아니겠지요?”
황보준은 속내를 감춘 채 넉살 좋 게 반문했다.
“허허, 내가 이 나이 먹고 자네에 게 농을 하겠는가? 부관주 자리가 없으면 내 자리라도 내줌세.”
“알겠습니다. 그럼 제 노후는 선배님께 맡기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 은 관주실로 향했다.
“저게 쌍룡맹 오대 무력대 중 하나 인 창우대인가?”
“소문대로 멋진걸. 일천에 가까운 숫자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 잖아.”
“우리도 창우대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내가 듣기로 오대 무력대 중에선 그나마 창우대가 진입 장벽이 가장 낮다고 하던데 아마도 가능하지 않 을까?”
연무장으로 향하는 창우대 주변으로 관도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창우대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엔 동경의 빛이 그득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 다. 대표적으로 설우진은 눈앞에 창 우대가 지나가는데도 심드렁한 표정 으로 일관했다.
‘쯧쯧, 녀석들,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 창우대? 말이 좋아 오대 무 력대지 실제론 좀 튼튼한 화살 받이 에 불과해.’
설우진은 창우대의 실체를 누구보 다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그들과 함 께 작전을 수행한 기억이 있어서다.
‘그날은 정말 끔찍했지. 설마 장로 라는 인간들이 우릴 인간 방패로 쓸줄 누가 알았겠어.’
창우대와 함께하던 날, 그는 쌍룡 맹의 의뢰를 맡아 경비 임무를 수행 하고 있었다. 경비를 서는 곳이 쌍 룡맹의 총단이었기에 별다른 긴장도 하지 않았다.
한데 느닷없이 야음을 틈타 마천의 무사들이 들이닥쳤다. 역천회가 은 밀히 내성으로 통하는 문을 연 것이 다.
쌍룡맹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부랴부랴 무사들이 뛰쳐나오고 곳곳 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방 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진 탓에 전황은 쌍룡맹 쪽에 극 도로 불리하게 흘러갔다.
결국 수뇌부는 후퇴를 결정했고 도 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전장의 한복 판에 창우대와 낭인들을 밀어 넣었 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창우대는 그날 이름을 잃었다. 그 혈전에서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창우대 놈들도 참 바 보 같단 말이야. 자신들이 버려진 걸 알았으면 뒤늦게라도 제 살길을 찾았어야지, 그렇게 우직하게 버틸 건 뭐냐고. 덕분에 우리는 목숨을 건지게 됐지만.’
설우진은 창우대에 목숨을 빚졌었 다. 특히 저쪽에서 걸어오는 거구의 사내에게.
관운장을 연상시키는 사내는 창우 대를 이끌고 있는 대주 악불휘였다. 그는 산동악가를 대표하는 창의 달 인으로, 등에 걸치고 있는 백 근짜 리 장창으로 뿌려 대는 광풍창이 일 품이었다.
“무천, 연무장에 진지를 구축해라. 언제 이곳을 떠날지 모르지만 머무 는 동안 대원들이 푹 쉴 수 있도록 배려해라.”
“존명!”
악불휘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무장에는 막사가 세워졌다. 그사 이 악불휘는 관도들 쪽으로 다가왔 다.
한데 공교롭게도 그 방향은 설우진이 서 있는 쪽이었다.
“자식, 어린놈이 눈빛이 살아 있구 나. 이 형님이 배가 고파서 그러는 데 식당이 어느 쪽이냐?”
악불휘가 설우진과 시선을 맞추며 식당의 위치를 물었다. 설우진은 살 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손가락으 로 식당 건물을 가리켰다.
“고맙다.”
악불휘는 손을 흔들며 식당 쪽으로 향했다. 한데 다음에 이어진 설우진 의 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지금 가 봐야 빈 솥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거예요. 불과 반 시진 전 에 식사 시간이 끝났거든요.”
“그래도 나 먹을 밥은 남아 있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남은 밥은 가축들 먹 이로 다 나갔을 거예요. 학관 축사 에서 소와 돼지를 키우고 있거든 요.”
황룡 학관은 많은 관도들을 수용하 는 만큼 요리에 쓰일 가축들을 따로 키웠다. 설우진의 말대로 관도들이 남긴 음식은 고스란히 가축들의 먹 이로 쓰였다.
“정말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거냐? 아침을 부실하게 먹었더니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
“정 그러시면 근처 식당에라도 가 실래요? 맛있는 집들이 많이 있는 데.”
“보는 눈도 있으니 그건 좀 그렇 고・・・・・・ 혹시 너희 집에 남은 밥없 냐? 여기 다니는 애들은 근처에 따 로 집을 얻어서 산다고 하던데.”
악불휘는 창우대주라는 신분이 무 색하게 설우진에게 밥을 달라 청했 다. 참으로 모양 빠지는 일이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먹을 거 밝히는 건 그때나 지금이 나 한결같군. 뭐, 그게 이 인간의 매력이긴 하지만.’
설우진은 흔쾌히 악불휘를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아침에 먹다 남 은 밥과 찬을 내놨다.
“이, 이게 다 뭐냐? 무슨 관도 놈이 밥을 이렇게 거하게 먹어?”
악불휘는 상다리가 부러지게 가득 쌓여 있는 찬을 보고 입을 쩍 벌렸 다. 동파육부터 어향육사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런 눈으로 보실 것 없어요, 능 력껏 먹는 거니까.”
“너희 집 부자냐?”
“뭐, 그냥 먹고살 걱정은 안 하고 살 정도예요.”
“젠장,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해도 한 달 식비를 걱정해야 할 판인데.”
‘그거야 당신이 많이 먹어서 그런 거잖아. 혼자서 열 사람 몫을 먹어 대는데 어떻게 월봉으로 충당되겠 어.’
설우진은 속에서 맴도는 말을 억지로 참았다. 전생에도 그는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먹었다. 낭인들 중에서도 식신이라 불리던 이가 혀 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넉넉히 있으니까 마음껏 드세요. 저흴 지키러 먼 곳에서 불원천리 달 려오신 분인데, 이 정도는 대접해 드려야죠.”
“고맙다.”
설우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악불휘 는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 다. 그의 젓가락이 접시를 한 번씩 훑을 때마다 쌓여 있던 음식들이 순 식간에 사라졌다.
식사를 마친 그가 설우진에게 말했다.
“동생, 창우대에 들어올 생각 없어? 이 형님이 네 자리 하나 정도 는 빼 놓을 수 있는데.”
악불휘는 잇새에 낀 찌꺼기를 이쑤 시개로 긁어내며 은근히 말을 건넸다.
‘인간아, 그렇게 대놓고 물주가 되 라고 하면 누가 그러겠다고 답하겠어.”
설우진은 악불휘의 행동에 고소를 머금었다.
악불휘는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좋게 보면 순박한 거고 나쁘게 보면 무식한 거였다.
“창우대 월봉이 얼마죠?”
“일반 대원은 은전 쉰 냥, 나 같은 대주급은 금전 세냥. 맹 내에서도 이 정도로 월봉을 챙겨 주는 것은 본대가 유일하지.”
“음, 안 되겠네요.”
“동생, 언제까지
부모님께 의지하고 살 거야? 약관이면 이제 어른이 야. 어른이면 어른답게 돈은 스스로 벌어서 써야지.”
악불휘는 설우진에게 경제적 독립 을 종용했다.
명문가의 자제들이 경제적으로 독 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맹에 서 지급되는 월봉만 가지고는 커져 버린 씀씀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 이다.
실례로 쌍룡맹이 일반 맹원에게 지급하는 월봉은 고작해야 은전 스무 냥에 불과하다. 맹 내에서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기 때문에 별도의 식 비가 들지는 않지만 술이라도 거하 게 마실라 치면 그 돈으론 어림도 없었다.
“대주님,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계 신 모양인데. 저 경제적으로 독립한 지 한참 됐어요.”
“네가 무슨 수로? 여기 학비도 꽤 비싼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손재주가 좋은 편이거든요. 요 바늘하고 실만 있으면 대주님 월 봉 정도는 하루 만에 너끈히 벌어 요.”
설우진은 바늘과 수실이 들어가 있는 작은 함을 그 앞에 내보였다.
“그,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 될 건 뭐예요. 강호의 유 명 야장을 떠올려 보세요. 쇠만 두 들겼을 뿐인데 그 값어치가 수백 배 로 뛰잖아요. 제가 만드는 옷도 마 찬가지예요. 똑같은 재료를 썼지만 이 손이 닿으면 그 값어치가 뛰는 거죠.”
“가만, 그러고 보니 황룡 학관에 일품점의 아들내미가 다닌다고 하더 니, 설마 그게 너냐?”
악불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우진에 대한 소문은 그도 익히 들 어서 알고 있었다. 그의 가까운 지 인들 중에 일품점의 옷에 빠져 사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저 맞아요.”
설우진은 순순히 인정했다. 굳이 숨길 일이 아니라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악불휘가 설우 진의 손을 덮썩 잡았다. 기습적으로 뻗은 손이라 미처 피할 새가 없었 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설우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까칠하 게 반응했다. 보드라운 여자 손이라 면 모를까 악불휘처럼 굳은살이 깊 게 박인 남자 손은 달갑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악불휘는 순순히 손 을 놔주지 않았다.
“동생, 우리 함께 밥도 먹은 사이인데 이 형님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
“밥은 대주님 혼자 드신 건데요.”
“하하,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옷 한 벌만 지어 줘. 일품점 옷에 환장 한 여자가 우리 집에 두 눈 부릅뜨 고 기다리고 있거든.”
‘그러고 보니 이 인간 생긴 것과 다르게 엄청난 공처가였지! 뭐, 누 구라도 그녀가 부인이라면 그랬을 테지만.’
악불휘에겐 암호랑이 같은 부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호연지.
여린 느낌의 이름과 달리 그녀는 궁연대에서 부대주를 꿰차고 있었 다.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무력대에서 부대주를 차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데 그녀는 해냈다. 어떻게?
그녀는 사내 여럿 찜쪄 먹을 정 도로 대단한 악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부대주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그 무게가 백 근에 이르는 철궁을 들고 숨 한 번 몰아쉴 동안 열 대의 화살을 연 속적으로 날려 보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화살들이 정확히 한 표적에 꽂혔다는 점이다.
이런 전례가 있다 보니 괄괄하기로 소문난 궁연대의 사내들도 그녀 앞 에서는 전혀 기를 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