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10화 : 누란 여로 (3)
누란 여로 (3)
“사, 사여, 주해………요.”
맹유천은 혀를 내민 채로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술기운을 빌어 강한 척했지만 그는 중소 문파의 일개 제자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파잔은 한눈에도 그 강함 이 느껴졌다.
몸에 강철을 두른 것처럼 구릿빛 근육은 탄탄하기 그지없었고 고수를 가늠하는 기준인 관자놀이 쪽의 태 양혈은 우뚝 솟아 있었다.
파잔은 왼손에 맹유천의 혀를, 오른손에 만도를 쥔 채로 뒤를 돌아봤 다.
“두 번 얘기하게 만들지 마.”
공주의 말에 파잔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장난을 즐기듯 맹유천의 혀 를 향해 만도를 가볍게 내리그었다. 맹유천은 눈앞에서 떨어지는 만도 를 보며 그대로 오줌을 지렸다.
한데 절체절명의 순간, 옆에서 날 아든 나무젓가락 하나가 만도의 날 렵한 도신을 때렸다. 힘을 많이 뺀 상태였기에 만도는 속절없이 옆으로 밀려났다.
파잔은 사납게 인상을 구기며 나무 젓가락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설우진이 짝을 잃어버린 젓가락을 흔들어 보이고 있 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적당히 하지. 난 밥을 조용히 먹고 싶거든.”
“크르륵.”
파잔이 입을 열고 짐승의 울음소리 를 냈다. 그런데 그 안에 있어야 할 게 없었다.
“파잔을 자극하다니, 죽고 싶어 환 장했군.”
공주가 설우진에게 독설을 내뱉었 다. 하지만 그 정도에 흔들릴 설우 진이 아니었다.
“누가 죽을지는 붙어 봐야 알 일이지. 그보다 지금 입고 있는 그 옷은 어디서 난 거지?”
공주가 입고 있는 옷에 설우진의 시선이 꽂혔다.
옷에는 사막의 상징인 황금빛 오아 시스가 수놓여 있었는데, 특이하게 도 그 아래쪽에 기서화에나 쓰일 법 한 낙관이 들어가 있었다.
우진羽晉.
“천한 사내놈이 쓸데없는 데 관심 이 많구나. 파잔, 저놈의 혀부터 잘 라 내라.”
공주가 다시 파잔을 불렀다.
파잔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앞 을 가로막고 있는 식탁들을 쳐내 버 리고 곧장 설우진 앞으로 달려갔다.
“개면 개답게 납작 엎드려 있어.”
설우진이 싸늘한 눈빛으로 파잔을 일별하고는 발끝으로 식탁을 차올렸 다.
거친 발길질에 식탁은 그의 머리 위로 훌쩍 떠올랐고 설우진은 의자 에서 일어나 가볍게 발을 휘돌려 찼 다.
파잔은 정면에서 날아드는 식탁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만도를 휘둘러 베려 했다.
한데 만도는 식탁을 베지 못했다. 식탁을 찰 때 설우진이 그 안에 경력을 실은 것이다.
우당탕.
파잔이 식탁을 껴안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 모습에 놀란 공주가 자신을 호위하고 있던 무사들에게 일제히 공 격을 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설우진의 근처에 가 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황수 아가 나서서 무사들을 처리한 것이 다.
“이쪽에 와서 앉지, 할 얘기가 무척 많을 것 같거든.”
설우진이 공주에게 손짓했다.
공주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허튼짓은 안 하는 게 좋아. 난 상 대가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그런 성인군자가 아니거든. 그 예쁜 얼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얻고 싶 지 않다면 조용히 내 말에 따라.” 설우진이 진한 살기를 풀풀 풍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살기는 콧대 높던 공주를 순한양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았다.
“그 옷은 어디서 났지?”
설우진이 재차 옷의 출처에 대해 물었다. 이에 공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언니가 줬어요, 막내가 입던 거라고.”
“그 막내가 혹시 자스민인가?”
“그, 그걸 어떻게……?”
공주가 놀란 눈으로 설우진을 쳐다 봤다.
“당신이 입고 있는 그 옷, 내가 자 스민에게 직접 만들어 준 거거든. 여기 우진이라는 글귀 보이지? 그게 내 이름이야.”
설우진은 일 년차 수업이 끝나 갈 무렵 자스민을 위한 선물을 만들었 다. 그 선물은 바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녀만을 위한 옷이었다. 최고급 비단에 수실도 하나하나 내 기를 불어넣어 빛을 머금게 했다. 그렇게 열흘 밤낮을 고생해 마침내 옷을 완성시켰다. 신의 손이라 불리 던 그가 작정하고 만들었으니 그 완 성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결국 선물을 받아 든 자스민은 설 밤새 울었다. 물론 우진의 품에서 감동의 눈물이었다.
“당신, 막내와 무슨 관계죠?”
누란의 넷째 공주 자밀라가 조심스 럽게 물었다.
“몸과 마음을 나누는 사이라고 해 두지. 그보다 자꾸 눈에 거슬려서 그러는데 그 옷 당장에 벗지 그래. 네년의 몸뚱이하곤 전혀 어울리지 않거든.”
“여, 여기서 옷을 벗으라고요?”
“남의 옷을 훔쳐서 입은 거잖아.”
“난 그저 언니가 줘서 입은 것뿐인데………….”
“그래서 넌 죄가 없다? 좋아, 스스로 벗지 않겠다면 강제로 벗겨 주는 수밖에………….”
설우진이 자밀라에게 다가섰다. 그 는 진짜 옷을 벗겨 버릴 기세였다.
“벗을게요. 벗을게요.”
자밀라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옷을 벗었다. 더운 지방이라 그런지 겉옷 안쪽엔 노출 심한 속곳이 자리 하고 있었다.
꿀꺽.
객잔 안에 남아 있던 점소이들의 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험악한 상황임 에도 사내들의 본능은 한결같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 요?”
황수아가 속곳 바람으로 서 있는 자밀라를 가리키면서 설우진에게 불 만을 표했다. 아무래도 같은 여자로 서 그녀가 겪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 나마 계집이니까 이 정도로 그친 거 야. 사내였으면 양물을 걷어차서 평 생 밤이 두렵게 만들었을걸.”
설우진은 전혀 뜻을 굽히지 않았 다.
황수아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지 만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을 걸 알 기에 이 층 객방으로 올라가 버렸 다.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이제 누란 왕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봐. 그리고 자스민의 행방까지.”
“선왕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후계자 자리를 두고 큰 분란이 일었어요. 첫째 공주인 아슬라 언니를 지지하 는 쪽과 셋째 공주인 뮬란 언니를 지지하는 쪽이 맞붙은 거죠. 처음엔 아슬라 언니 쪽이 유리했어요. 남은 공주 중 둘이 언니를 지지했으니까 요. 그런데 뮬란 언니가 외부의 세 력을 끌어들이면서 판이 뒤집혔어 요. 그 사내는 스스로를 뮬란 언니 의 연인이라 밝혔는데 왕궁의 수신 호위들이 일격에 나가떨어질 정도로 대단한 무위를 지니고 있었어요. 상 황이 그리되고 보니 아슬라 언니를 지지했던 공주 중 한 명이 뮬란 언 니 쪽으로 돌아섰어요.”
“그럼 자스민 혼자 끝까지 아슬라 공주를 지지했다는 거로군?”
“네. 뮬란 언니가 여러 번 찾아가 설득을 했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자 스민은 아슬라 언니와 함께 열사동 으로 보내졌어요.”
‘설마, 그 지옥의 사막을 뜻하는 건 아닐 테지?’
열사동이란 이름에 설우진의 얼굴 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가 기억하는 열사동은 사막 한가 운데 자리하고 있다는 신비의 금지 로 사방에 유사가 흐르고 있어 한 번 그 안으로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언제 열사동으로 보내졌지?”
“보름 전이에요.”
“그럼 이미 그곳으로 들어갔다고 봐야겠군?”
“……네.”
“크큭, 친혈육을 그 지옥으로 보내 놓고 밥이 넘어갔어? 아무리 권력이 좋다지만 그건 아니지. 차라리 깔끔 하게 목을 베어 주지 그랬어. 그편 이 그 지옥에서 하루하루 버텨 내는 것보단 나았을 텐데.”
설우진의 두 눈에 진한 광기가 떠 올랐다. 제대로 뚜껑이 열렸다는 증 거였다.
“사, 살려 주세요.”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자밀라 가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살고 싶으면 자스민을 내 앞에 데 려와.”
“그, 그건 불가능해요. 열사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복잡한 기관이 설치돼 있어서 이를 해체하지 않고 는 그 안으로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어요.”
“그럼 얘기 끝났네.”
설우진이 의자 옆에 세워뒀던 천 뢰도를 집어 들었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는 진 짜로 그녀를 죽일 맘을 품고 있었 다.
“투, 투르판! 투르판이라면 분명 방법을 알고 있을 거예요.”
“투르판?”
“선황의 책사예요. 머릿속에 만 권의 지식이 들어 있다 하여 본국에서 는 만서진인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자는 지금 어디 있지?”
“본국의 뇌옥에 갇혀 있어요.”
“아슬라 공주를 지지했던 모양이군?”
“네. 하지만 뮬란 언니는 그를 열사동으로 보내지 않았어요.”
“그의 재능이 탐났을 테지.”
“그건 아니에요. 사실 투르판은 뮬 란 언니의 스승이에요. 어릴 때부터 총기가 남달랐던 언니를 투르판이 제자로 삼은 거죠.”
‘그 인간이 결국엔 괴물을 키운 셈 이군.”
설우진은 투르판의 어리석은 선택 을 힐난했다.
으적으적.
“오랜만에 보는 싱싱한 먹잇감이로 군. 어려서 살이 야들야들하겠어.”
횃불이 일렁이는 동굴 안, 쇠창살 너머에 사람인지 짐승인지 도통 분 간이 안 되는 사내가 피범벅이 된 손으로 뭔가를 뜯어먹고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찢겨 나가는 살 점 그리고 그 끝에 매달린 긴 꼬리. 식사의 정체는 쥐였다.
“언제까지 처리하면 되지?”
사내가 눈앞에 펼쳐진 초상화를 보 면서 물었다.
“정확한 기일은 말씀해 주시지 않 았지만 천주님의 불편한 심기를 헤 아리신다면 최대한 빨리 움직이시는 게・・・・・・ 커억.”
사내가 갑자기 초상화를 들고 있던 복면인을 철창 쪽으로 거칠게 끌어 당겼다.
“네놈의 의견 따위는 필요 없어. 우리 귀마들이 따르는 건 천주님의 명령뿐.”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 똑바로 처신해, 또 한 번 그 따위로 입을 놀리면 그때는 네놈 의 혀를 뽑아 잘근잘근 씹어 줄 테니.”
사내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 안에는 지독하리만치 사나운 마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쉬이잉, 쉬잉.
사막의 삭풍이 요란스레 비명을 질 러 댔다. 그때마다 가는 모래가 공 중으로 밀려 올라와 사방으로 흩날 렸다.
이곳은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누란 국에 닿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 는 곳이었다.
“상상한 것 이상으로 험악한 땅이 군. 누란국은 대체 이 험지에서 어 떻게 왕국을 일군 거지?”
터번으로 얼굴을 가린 설우진이 낙타를 몰며 연신 푸념을 해댔다. 그는 자밀라에게 투르판이 갇혀 있 는 뇌옥의 위치를 알아낸 뒤 곧장 시장으로 가서 낙타를 구매했다. 한 시라도 빨리 자스민을 구하기 위함 이었다.
인질인 자밀라는 황수아에게 떠맡 겼다. 당연히 그녀는 펄쩍 뛰었지만 설우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장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향했다.
그 뒤로 황수아의 구성진 욕이 이 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나저나 누란국은 얼마나 더 가 야 하는 거야? 자밀라 그 계집의 말로는 해를 따라 남쪽 방향으로 하루 반나절 정도 내려가면 된다고 했 는데………….”
타클라마칸 사막에 들어선 지도 벌 써 이틀째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 봐도 보이는 건 작열하는 태양과 그 아래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누런 모래뿐이었다.
설우진은 타는 목을 달래려 낙타 옆구리에 채워 뒀던 물통을 집어 들 었다.
물은 넉넉하게 챙겨 왔음에도 이틀 째가 되자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 다.
설우진은 적당히 목을 축인 뒤 다 시 고삐를 당겼다.
날이 저물기 전에 누란국에 닿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지난밤에 경험한 사막의 밤은 가혹했다.
차라리 열사의 태양이 낫다 싶을 정도로 뼛속까지 시린 바람이 몰아 쳤다. 사막은 바람을 피할 곳이 없 기에 온전히 맨몸으로 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편으로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설우진은 열심히 남쪽 방향으로 낙 타를 몰았다.
그의 의지가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 내 아스라이 먼 곳에서 사람의 것으 로 짐작되는 음영이 비치기 시작했 다.
설우진은 다급히 낙타의 옆구리를 후려 찼고 이내 낙타가 요란한 울음 소리를 내며 사막을 내달렸다. 그 속도는 웬만한 말보다 더 빨랐다.
“놈들을 잡아 투르판의 밀서를 빼 앗아라! 그 밀서가 중원으로 넘어가 게 해서는 안 된다!”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사막 을 내달렸다.
그 위에는 활을 든 병사들이 시위 에 화살을 걸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 었다.
화살이 향하는 방향에는 상체를 시 원하게 드러낸 사내들이 정신없이 뛰고 있었고 무공을 익혔는지 모래 를 박찰 때마다 신형이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거리가 좀체 좁아지질 않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손목을 살짝 비틀어 팽팽하게 당긴 시위를 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