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14화 : 구출 작전 (3)
구출 작전 (3)
설우진은 그 모습을 일별하고는 천뢰도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저자는 대체 누구지?’
뇌옥 안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 켜보고 있던 투르판은 타후란이 쓰 러지는 순간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 다.
타후란은 은퇴 전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허용치 않았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지닌 전사였다.
한데 그런 타후란이 단 한 번의 반격에 무너졌다. 상상도 못했던 일 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투르판은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어렵게 입을 뗐다.
“당신은 누굽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투르판의 눈에는 의구심과 두려움 이, 설우진의 눈에는 흥미와 즐거움 이 떠올라 있었다.
“겁먹을 것 없어. 난 널 이곳에서 빼 주려고 온 사람이거든.”
‘설마, 밀서가 벌써 중원에 닿은 건가? 아니야, 아무리 빨리 사막을 빠져나가도 족히 사흘은 소요될 텐 데 벌써 그곳에 소식이 전해졌을 리 없어.’
투르판은 점점 설우진의 정체가 궁 금해졌다.
자신이 도움을 청하려고 했던 곳에 도 눈앞의 사내만큼이나 강한 자들 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움직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중요한 전력인 만큼 함부 로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정체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얼굴이네? 난 설우진, 황룡 학관의 재학생이야. 이거면 얼추 답이 될 것 같은데.”
“그럼 자스민 공주님의…………?”
“절친한 벗이자 연인이라고 할 수 있지.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달려온 거야.”
“하면 이곳의 사정도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시겠군요?”
“대충은. 자매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다지?”
“사실 그뿐이었다면 전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뮬란 공주는 누란의 신성한 율법 을 어겼습니다.”
투르판의 두 눈에 사나운 불길이 일었다. 아직도 그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많이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역시,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게 문제였나 보지?”
“네. 저희 누란국에서는 초대 태양왕 시절부터 외세의 개입을 철저히 막아 왔습니다. 외세가 개입하면 코 트란 왕조의 정통성이 무너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코트란은 누란국을 처음 건국한 왕 의 이름이었다.
“대체 누굴 끌어들인 거지? 누란의 후계 구도를 뒤엎었을 정도면 그 세 가 보통이 넘을 텐데.”
“그게, 저도 아직은 그 실체를 정 확히 파악해 내지 못했습니다, 워낙 에 그들의 행사가 은밀했던지라 …….”
“그래도 뭔가 특징적인 부분은 있 었을 거 아니야?”
“음, 그러고 보니 그들이 차고 다니는 검에 성화 문양이 새겨져 있었 습니다.”
‘타클라마칸에 성화를 상징으로 삼 은 곳이 있었나?’
설우진은 머릿속의 기억을 찬찬이 훑었다. 한데 그가 기억하는 신강의 문파들 중에선 성화를 사용하는 곳 이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지만 연 관성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설마, 마천이 누란국에 손을 뻗친 건 아니겠지? 딱히 얻을 것도 없는 이곳에 전력을 분산시킬 이유가 없 잖아.’
성화는 마천의 전신인 배화교에서 사용하던 신앙의 상징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화를 사용하는 이들은 차츰 줄고 있었지만 마천을 배화교의 후신이라 믿는 자들은 아 직도 꿋꿋이 성화를 고집하고 있었 다.
설우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투르 판에게 외세가 개입하게 된 일련의 과정들에 대해 물었다.
“외세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만한 대가를 약속했을 텐데, 혹시 그게 뭔 줄 알아?”
“아마도 황금일 겁니다.”
“황금?”
“저희 누란에서는 수대에 걸쳐서 중계 무역으로 얻은 수익을 황금으 로 바꿔 보관해 왔습니다. 아마 그 중의 일부를 준다고 약조했을 것입니다.”
“그 황금이 얼마나 되기에?”
“이 뇌옥의 열 배 정도라고 보시면됩니다.”
“……..”
설우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자스민이 언뜻 지나가는 말로 지참 금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얘기한 금액이 황금 오백 관이었다. 당시엔 너무 터무니없는 금액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는데 투르판의 얘길 듣고 보니 뒤늦게 수 긍이 갔다.
‘놈들은 중원을 치는 데 필요한 군 자금을 이곳에서 얻고자 한 거야. 그래서 승계 순위가 높은 아슬라보다는 셋째인 뮬란을 노린 것이고.’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에 마 천을 끼워 넣자 아귀가 딱딱 들어맞 았다.
“황금은 어디에 보관돼 있지?”
“바흐만의 신전입니다. 그곳은 태 양왕의 피를 이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문을 열기 위해선 바흐만 의 심장이 필요합니다.”
“그건 지금 누가 가지고 있지?”
“그게, 행방이 묘연합니다. 뮬란 공 주가 바흐만의 심장을 찾기 위해 왕 궁 곳곳을 뒤졌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아슬라 공주가 가지고 있는 거 아니야? 제일 계승권자이니 아무래도 그녀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은데?”
“뮬란 공주가 첫 번째로 수색을 명 한 곳은 아슬라 공주님의 처소였습 “니다.”
“본인이 직접 가지고 있을 수도 있 잖아?”
“뮬란 공주가 직접 아슬라 공주님 의 속곳까지 벗겨서 확인했습니다.”
‘이상하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라면 자기 몸에서 떼어 놓을 리가 없는데.’
설우진은 좀체 의구심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는 낭인으로 일하면서 적잖은 숫 자의 부자들과 인연을 나눈 바 있었다.
그들은 사는 곳도 생긴 것도 다 달랐지만 유일하게 한 가지가 같았 다. 그것은 바로 금고를 여는 열쇠 를 항시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것이 었다.
‘분명 열쇠는 아슬라 공주의 손에 있어. 그걸 확인하려면 일단 녀석을 데리고 이곳부터 나가야 돼.’
설우진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심중 에 남겨 둔 채 뇌옥의 두꺼운 자물 쇠를 일격에 부쉈다. 자물쇠 전체가 흑광철로 이뤄져 있었지만 폭뢰의 힘을 견뎌 내지는 못했다.
‘이자라면 뒤틀린 누란의 운명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투르판은 설우진을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약속한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한 내에 황금을 가져오지 못하면 네 목을 잘라 아슬라 공주에게 가져 갈 것이다.”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내는 대전 안에 굳은 표정의 미녀가 음침한 분 위기를 자아내는 중년 사내와 얼굴 을 마주하고 있었다.
미녀는 누란국의 새로운 왕이 되고 자 나선 뮬란 공주였고 맞은편에 선 이는 마천의 흑랑사자 고자성이었 다.
흑랑사자는 마천의 군사인 사마중달이 부리는 말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약속했 던 황금에 일 할을 더 얹어 주겠어 요.”
“좋다. 그럼 앞으로 열흘의 말미를 더 주겠다.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때는 정말 이 손톱이 네 년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그 안에 숨어 있는 심장을 뽑아낼 것이다.”
어느 틈에 움직였는지 고자성의 손 톱이 뮬란 공주의 왼쪽 가슴에 닿아 있었다. 검붉은 빛이 감도는 그의 손톱은 금방이라도 가슴을 파헤칠 듯 진한 살기를 뿌려 댔다.
왕좌에 앉은 뮬란 공주의 두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사실 그녀는 다섯 명의 공주들 중에서 가장 왕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 다.
지닌 능력에 비해 욕심만 넘쳐 났 고 주변의 평판도 아주 나빴다. 공 주라는 신분을 악용해 온갖 패악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 건 반 년 전이었다.
새로 사귄 연인과 함께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을 때였는데 창밖 에서 들어온 한 줄기 바람에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사막 한복판이 었다.
겁이 나고 무서워 살려 달라 소리 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타클라마칸의 거친 모래바람뿐이었다.
그렇게 악몽 같은 반 시진이 지났다.
타오르는 갈증에 그녀는 죽음 직전 에 이르렀다. 물만 준다면 악귀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그때 한 사내가 물통을 들고 눈앞에 나타났다.
사내는 시체처럼 얼굴이 창백하고 두 눈에 흰자위가 도드라져 있었다. 그녀는 사내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애원했다, 물을 달라고.
이에 사내는 물을 내주는 대가로 한 가지 제안을 해 왔다. 그것은 왕 의 자리에 앉혀 줄 테니 누란이 가 지고 있는 황금을 일부 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사막 한복판에서 은밀한 거 래가 이뤄졌다.
이후 사내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 다. 아슬라 공주를 지지하는 대신들 을 은밀히 제거해 주기도 하고 거사 일에 병사들을 유인해 궁 밖으로 빼 내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원하던 대로 왕좌에 올랐다.
처음엔 무척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내 가 약속한 황금을 내놓으라고 독촉 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황금이 보관돼 있는 바흐만의 신전을 열 수가 없었다. 신전을 열 수 있는 바흐만의 심장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분명 바흐만의 심장은 아슬라 언 니가 가지고 있을 거야. 이번엔 그 배를 가르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찾아내고야말겠어.’
뮬란의 두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정말 방법을 모른다고?”
설우진의 날선 목소리에 투르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두 사람은 지난밤에 금뇌고를 무사 히 빠져나왔다.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일일이 기관을 해체해야 했는데 기관진식에 능했던 투르판이 앞장서서 해결했다.
그런데 금뇌고를 빠져나온 뒤 큰 문제가 발생했다.
설우진이 열사동으로 들어가는 방 법을 알려 달라 하니 투르판이 난색 을 표한 것이다.
“분명히 사막에서 만난 네 부하 놈 이 너라면 열사동으로 들어가는 방 법을 알거라고 했는데…….”
“열사동 입구에 설치된 기관은 이 중 삼중으로 잠금장치를 해둔 터라 태양시 없이는 해제가 불가능합니 다.”
“너 머리 좋다면서! 태양시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거야?”
“흠, 유사의 흐름을 읽어 낼 수 있 다면 가능합니다.”
“사람이 무슨 수로 모래의 움직임 을 읽어 내? 우라질, 괜한 헛고생만 했잖아!”
설우진은 허탈한 마음에 힘없이 바 닥에 주저앉았다. 피로감이 한꺼번 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투르판이 한 가지 새로 운 정보를 전했다.
“인간은 불가능하지만 살라만더라 면 가능합니다.”
“살라만더? 그건 또 뭐 하는 놈이야?”
“살라만더는 태양신의 가호를 받고 태어난 사막의 영물입니다. 모래 속 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쉼 없이 흐 르는 유사 속에서도 용케 길을 찾아 냅니다.”
살라만더는 수백 년 동안 태양의 정기를 머금고 살아온 석척(도마뱀) 이었다. 누란의 역사와 함께해 온 영물로 누란인들은 왕만큼이나 살라 만더를 신성시했다.
“정말 그 녀석만 있으면 열사동에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설우진은 영 미심쩍은 눈치였다. 한 번 믿음을 배신당하고 나니 그 가 무슨 말을 해도 신뢰가 가질 않 는 것이다.
“태양신을 두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좋아. 속는 셈 치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믿어 보지. 대신 이번에도 날 물 먹이면 그땐 사막 한복판에 널 매다 꽂아 버릴 거야.”
“그,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투르판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설우진을 살라만더가 살고 있는 태 양의 방으로 안내했다.
태양의 방은 왕궁 맨 꼭대기에 위 치해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병사들의 눈 에 걸릴 확률이 높았기에 설우진은 투르판을 등에 업고 병사들의 눈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이용해 성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에서 상당한 무게감이 전해졌지만 극한무도로 단련된 설우진에겐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성곽 너머로 붉은 태양이 서서히 저물어 갈 무렵 설우진이 꼭대기 층 에 닿았다.
설우진은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 간 후 벽 쪽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안의 동태를 살폈다. 혹시라 도 있을지 모르는 경비 병력을 확인 하기 위해서다. 다행히 별다른 인기 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설우진이 살라만더를 어찌 대해야 할지 물었다.
한데 그 물음에 투르판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 는 게 있는 듯했다.
잠시 후 투르판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살라만더는 영성을 지니고 있어 아무에게나 그 손길을 허락하지 않 습니다. 오로지 태양왕의 피를 이은 고귀한 분들만 이 살라만더에게 손 을 내밀 수 있지요.”
“그럼, 태양왕과 아무 관련도 없는 내가 손을 내밀면 어떻게 되지?”
“음…… 아마도 무시하거나 공격하 려 들 것입니다.”
“석척 주제에 콧대가 하늘을 찌르 는군. 하지만 이 세상엔 변하지 않 는 진리가 하나 있지, 몽둥이엔 장사가 없다는.”
설우진은 투르판의 경고를 무시하 고 그대로 살라만더의 방으로 들어 갔다.
방 안은 후끈했다. 마치 난로를 피 워 놓은 것처럼. 한데 난로는커녕 그와 비슷한 화로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