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2화 : 분란 종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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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6권 – 2화 : 분란 종식 (2)


분란 종식 (2)

“당신, 귓구멍이 막혔어? 아까부터 줄곧 얘기했잖아, 사달은 만든 건 우리가 아니라 저 이기적인 놈들이 라고.”

“근거가 있나?”

“여기 있잖아. 당신도 그것 때문에 기를 쓰고 이 녀석들을 죽이려 했던 것이고.”

설우진이 살객들을 손가락으로 가 리켰다.

잠시 후 설우진과 사도군의 보호 아래 칠흑야의 살객들이 사건의 전 모를 낱낱이 밝혔다.

“이 정도면 어느 쪽의 말이 거짓인 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살객의 얘기가 끝나자 설우진은 용 성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에 용성후는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대 꾸했다.

“저놈들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돈을 위해서라면 세 살배기 아이도 서슴지 않고 죽일 수 있는 놈들인 데, 그깟 말 하나 지어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않느냐!”

용성후는 끝까지 황보민의 편을 들었다.

이에 설우진이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칠흑야에서 황보민 일 당에 선금으로 받은 전표였다. 전표 에는 발행일과 중원전장의 것임을 알려 주는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 었다.

“정 그렇게 못 믿겠으면 이걸 들고 중원전장으로 가서 물어보지, 액수 가 크니 아마 그쪽에서도 얼굴이나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것 같은 데.”

설우진이 전표를 앞세워 용성후를 압박했다. 이쯤 되니 용성후로서도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체 어쩌자고 일을 이리 성급하 게 처리한 게냐! 다른 곳도 아니고 칠흑야에 천중오가의 자제를 죽이라 고 의뢰하다니…… 이 사실이 남궁 가주의 귀에 들어간다면 너는 물론 이고 세가까지 곤궁에 처하게 될 것 이다.

-하면 어찌합니까?

-머리를 조아리고 빌어라, 저들이 이번 일을 덮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용성후가 최후의 방법을 제시했다. 황보민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 든 것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황보민은 한참의 망설임 끝에 북리강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선배님, 도리가 아 닌 줄 알면서도 도저히 치밀어 오르 는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하고 이곳까지 도망쳐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 리고 그 사실이 밝혀질까 무서워 저 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크큭, 궁지에 물리니까 이제야 잘 못을 인정하는구나. 한데 어쩌지? 이 정도로는 내 분이 전혀 풀리지 않거든!”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분이 풀리 시겠습니까?”

“네 뒤에 서 있는 놈들과 함께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 내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순간 황보민의 얼굴이 경직됐다. 무릎을 꿇는 것도 한참을 고민했던 그다. 한데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라 니………….

“왜, 싫어? 그럼 이대로 함께 맹으 로 가든가. 아마 네가 저지른 일이 맹에 보고되면 너의 그 잘나신 조부 님도 장로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걸.”

북리강이 비아냥거리며 협박을 해 댔다. 이에 황보민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쥐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힘겹게 앞으로 조금씩 몸을 당겼다. 

“네놈들은 그냥 보고만 있을 거냐?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을 자신이 있 으면 그대로 있고.”

북리강의 시선이 머뭇거리고 있는 관도들에게 향했다. 잠시 후 당문초 를 시작으로 하나둘 황보민의 뒤로 가 몸을 굽히기 시작했다.

“흠, 저대로 두고 볼 텐가?”

사도군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설 우진에게 말을 건넸다.

“후훗, 놔두십시오. 저놈도 당한 게 있으니 분풀이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 네. 저 모습은 마치 마천의 마두들 같지 않은가?”

사도군의 표현 그대로였다.

북리강이 지금 눈앞에서 보여 주고 있는 행동과 말투는 마천의 무사들 과 흡사했다.

마천은 강자존의 법칙을 따른다. 그들에게 우선시되는 건 힘이다. 상대의 나이가 많든 적든, 여자이든 남자든 자신보다 힘이 없으면 깔아 뭉개는 게 마천의 생리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북리강은 강자의 힘을 누렸다.

“이제 좀 화가 풀리셨습니까?”

황보민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물었다.

이에 북리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너희들이 완전한 내 사람이 되면 이번 일은 자연스럽게 묻히게 될 것 이다.”

충성 맹세, 북리강이 진정으로 원 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황보민 일당이 그것을 거부할 수 없 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황보민과 그 일당은 북리강에 게 평생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원하 는 것을 얻어 낸 북리강은 설우진에 게 뻔뻔스러운 요구를 했다.

“이 녀석들이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 같으니까 이쯤에서 이번 일은 조 용히 묻자.”

“……”

“나 혼자 득 보자고 이러는 게 아 니야. 잘 생각해 봐. 저 녀석들에게 빚을 지우면 네가 강호 생활을 하는 데 두고두고 도움이 될 거야. 솔직 한 말로 작금의 강호는 인맥 없이는 위로 올라가기 힘들잖아, 특히 너처 럼 출신 성분이 무가가 아닌 경우에 는 더더욱.”

인맥의 강호. 호사가들이 비판적인 시각으로 강호를 부를 때 자주 붙이 는 이름이었다.

쌍룡맹이 강호의 지배자로 올라선 뒤 인맥은 중요한 성공 수단으로 자 리 잡았다.

뛰어난 일부 무인들을 제외하고 보 통의 재능을 지닌 무인들은 작은 인 맥이라도 잡아야 쌍룡맹에 적을 둘 수 있었다. 해서 쌍룡맹 내에선 빈 번하게 인사 청탁이 이뤄졌다.

북리강은 바로 그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우진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네놈은 그 머릴 장식으로 달고 사는 거냐? 이곳에 오기 전에 마천 놈들이 내 손에 아작이 났다. 맹의 정예도 쉬이 해 내지 못하는 일을 이 몸이 해냈단 말이다.”

“그, 그게 뭐?”

“그깟 인맥 따위 없어도 맹에서는 날 알아서 모셔 가려고 할 거란 얘 기지. 그리고 무엇보다 네놈은 그딴 소리를 지껄일 자격이 없다. 애당초 네놈이 그따위 허접한 함정에 걸려 들지만 않았어도 지금의 사달이 벌 어지지 않았을 것 아니냐!”

설우진은 신랄하게 독설을 날렸다. 북리강은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그저 얼굴만 붉혔다.

“이번 일은 용인문주님을 통해 맹에 공식적으로 보고될 거다.”

순간 황보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 소리쳤다.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 용서 해 준다고 해서 무릎을 꿇고 가랑이 사이로 기기까지 했는데!”

“그건 저 머저리의 말을 믿은 네놈 들 잘못이지.”

설우진의 뜻은 단호했고 보다 못한 용성후가 다급히 중재에 나섰다.

“동문끼리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

“먼저 뒤통수를 친 건 저놈들입니 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놈도 제대 로 반성하는 놈이 없지 않습니까!”

“그, 그건…….”

“무사님, 잘 선택하십시오, 조용히 대세를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저놈 들과 하나로 묶여서 나락으로 함께 떨어질 것인지!”

설우진이 두 눈에 힘을 실어 용성 후와 시선을 맞췄다. 부릅뜬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는 용성후의 기 세를 찍어 눌렀다.

‘저놈,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여기 서 더 발버둥 쳐 봐야 내 꼴만 더 우스워지겠어. 그럴 바엔 차라리 놈 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차후에 맹 내부에서 해결 방법을 찾는 게 나을 터.’

용성후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좋다. 내 용인문주와 함께 맹으로 가겠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 가 감 없이 집법전에 전할 것이다.” “집법전이 제대로 움직이겠습니까, 여기저기 눈치를 주는 곳이 많을 터 인데?”

설우진은 맹 내에 도사리고 있는 유력 세가 출신 간부들의 개입을 우 려했다.

“흠흠, 그런 염려는 할 필요 없다. 집법전에 속한 이들은 모두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 일을 처리하지 않는 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천금은 귀신도 부린다고 하는데?”

“그들은 돈 따위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그건 내 이 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다.”

‘지금 가장 부패가 심한 곳이 집법 전인데 퍽이나…..’

설우진은 용성후의 호언장담에 코 웃음을 쳤다. 그가 알고 있는 쌍룡 맹은 어느 한 군데도 썩지 않은 곳 이 없다고 할 정도로 곳곳이 병들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집법전은 장로원의 개 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그 정체 성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집법전은 본래 맹 안팎의 규율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맹이 아닌 장로원에 반하는 세력이나 인물들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그렇게 자신하신다면 함께 가시지요.”

‘저놈이 무슨 꿍꿍이지?’

설우진의 뜻밖의 요구에 용성후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 다.

쌍룡맹은 설우진에게 호굴이나 다 름없었다.

이곳이야 중도적 인물인 용인문주 가 있으니 그의 말이 먹혔지만 맹은 달랐다.

“동행하는 건 어렵지 않다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저도 그 인맥이란 걸 한번 써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맹 내에 지인이 있는 게냐?”

용성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설우진은 자세한 언급을 피 했다. 이곳에서 패를 까 보이기엔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놈이 저리 자신 있는 모습을 보이 는 걸 보면 분명 맹 내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이를 알고 있는 게 분 명한데……… 대체 누굴까?’

용성후는 간부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하지만 설우진과의 연결 고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용성후는 설우진의 청을 받아들여 맹까지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설우진에게 일방적으로 관도들을 맡겨 놓고 길을 나섰던 적사호는 한 낡은 사찰에서 자신을 대신해 가문 을 다스리고 있는 사제와 얼굴을 마 주하고 있었다.

한데 둘 사이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사형이 그토 록 추종했던 역천회가 지금 쌍룡맹 의 전철을 밟아 가고 있습니다. 아 마 이대로 몇 년이 더 흐른다면 수 호 가문의 이름은 사라지고 탐욕에 찌든 역천회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토록 상황이 심각한 것이냐?” 

“다섯 가문 중 세 곳이 이미 노골 적으로 야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청룡문이 유일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지만 그들도 언제 변할지 안심할 수 없습니다.”

신추명이 무거운 표정으로 역천회 의 상황을 전했다. 그동안 적사호는 역천회 내부의 상황에 별다른 관심 을 두지 않았다. 자신이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것이라 믿은 것 이다. 그런데 그의 맹신이 작금의 사태를 불러왔다.

초창기의 역천회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다들 쌍룡맹에 대한 복수심 에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시간이 흐르고 역천회에 많은 힘이 집중되면서 복수심은 차츰 흐 려지고 그 자리에 욕망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역천회의 변질은 바로 거기서부터 비롯됐다.

“사형은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역천회에서 나와 문으 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정식으로 문주위를 승계해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가주가 오랫동안 부재중 이니 적잖은 숫자의 문도들이 흔들 리고 있습니다.”

통천문은 마천 쟁투 당시에 문주를 잃었다. 마천이 작정하고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 후 통천문은 문주의 자리를 비 워 둔 채로 운영됐다. 본래대로라면 당시 대제자 신분이었던 적사호가 문주위를 승계해야 했지만 그는 역 천회에 들어가겠다며 이를 뒤로 미 뤘다.

그 때문에 통천문은 아직까지도 문 주 없이 둘째 제자인 신명이 가문 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혼자서 세 가문의 수장들을 견제 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그렇 다면 남은 방법은 가문을 등에 업는 것뿐이야.’

전 같았으면 칼같이 끊었을 제안이 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 다. 혼자보다는 다수의 힘이 필요한 시기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 언제까지 문주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최대한 빨리 신변 정리를 마치고 문으로 돌아 가마.”

“진심이십니까?”

신추명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만날 때마다 청했지만 한 번도 받아 들여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염치없지만 지금은 사문의 힘이 필요하다.”

적사호는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이에 화를 낼 법도 하련만 신추명은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긴 채 조용히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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