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21화 : 흑랑 사자 (3)
흑랑 사자 (3)
고자성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 닥에 몸을 한 바퀴 굴렸다. 구르는 탄력을 이용해 마령귀보를 극대화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한 바퀴 몸을 굴려 바로 서려는 순간 몸이 균형을 잃고 옆으 로 쓰러졌다.
의아한 마음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 다.
“이걸 찾나?”
설우진이 잘려 나간 다리를 흔들어 보였다.
다리가 잘렸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고자성은 무릎을 부여잡고 꺽꺽 비 명을 질렀다.
그런데 설우진은 그마저도 용납하 지 않았다.
“아가리 닥치고 묻는 말에 대답해. 삼 층으로 올라오기 전에 만난 여 자, 어떻게 했지?”
“…….”
“시치미 뗄 생각은 마, 네놈 몸에 서 그녀의 향이 진하게 풍겨 나오고 있으니까.”
설마, 이 괴물이 그 계집의 연인이었던 건가?”
고자성은 눈앞이 캄캄했다.
자신이 상태를 확인했을 때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아니, 시간이 꽤 흘렀으니 십중팔구 죽었을 것이다. 이에 고자성은 모든 책임을 죽은 수하들에게 돌렸다. 설우진은 묵묵 히 그의 얘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그녀가 죽었다 는 거네?”
“아, 아닙니다. 분명 삼 층으로 올 라가기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습 니다.”
“크큭, 그렇게도 살고 싶어?”
‘그래, 네놈만 만나지 않았다면 누 란의 황금을 얻는 데 성공해 본천으로 금의환향했을 것이다.’
고자성은 억울하고 분했다.
한데 그 마음을 알았는지 뜻밖에 설우진이 천뢰도를 거둬들였다.
“사, 살려 주시는 겁니까?”
“살고 싶다면서. 나도 내 칼에 네놈의 더러운 피를 더는 묻히고 싶지 는 않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자성은 혹여 설우진이 마음을 바 꿀까 싶어, 부리나케 그 자리를 벗 어났다.
그는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상황 이라 두 팔을 이용해 땅 위를 기었 다.
“버러지 같은 놈, 어디 한번 살기위해 발버둥 쳐 봐라, 희망을 떠올리는 그 순간에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해 줄 테니.”
설우진은 고자성에게 편안한 죽음 을 안겨 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를 풀어 준 것도 최악의 죽음을 안겨주기 위한 속임수였다.
고자성이 시야에서 멀어지자 설우 진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별궁 쪽 으로 향했다.
“상태가 어떻지?”
“만다르께서 진원내기를 제때 주입 해 주신 덕분에 위험한 고비는 넘겼 “습니다.”
“근데 왜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는 거지?”
“기력이 많이 쇠해져서 그렇습니다.”
“그럼 기력을 보충할 게 필요하겠 군?”
설우진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 늘어 져 있던 살라만더를 향했다.
“설마, 살라만더의 내단을 꺼내자 는 말씀은……?”
“맞아. 길 찾는 것 외에는 아무 짝 에도 쓸모가 없는 놈이잖아, 내단이 라도 꺼내서 필요한 데 써야지.”
“살라만더는 누란의 신수입니다.”
“그건 네놈들 사정이고. 나한텐 자 스민에게 먹일 보약 그 이상도 이하 도 아니야.”
설우진의 살라만더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투르판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살라 만더를 바라봤다. 설우진이 한 번 맘먹은 건 곧 죽어도 행동으로 옮긴 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설우진이 아슬라 공주의 살을 째는 데 사용했던 소도를 들고 살라만더 에게 다가갔다.
살기를 감지했는지 살라만더가 꼬 리를 곧추세웠다. 강한 저항의 표시 였다. 하지만 일전에 꼬리를 끊은 탓에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 았다.
“혼자 오래 사는 것도 못할 짓이 야. 솔직한 말로 너도 갑갑했을 거 아니야, 그 꼭대기 방에서 홀로 머무는 게.”
설우진은 살라만더를 설득했다. 그 런데 신기하게 그 말을 알아듣기라 도 했는지 살라만더가 두 눈에 힘을 풀고 꼬리까지 내렸다.
“잘 생각했어. 내세에는 평범한 석 척으로 태어나라.”
설우진이 잔뜩 날이 선 소도를 살 라만더의 배로 가져갔다. 보통 내단 은 배 속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았 다.
그런데 막 소도를 배에 갖다 대려 는 순간 자스민이 정신을 차렸다. 숨소리를 들은 설우진은 소도를 내 팽개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기는 한데 견딜 만해. 근데 그 개자식은 어 “떻게 됐어?”
자스민은 깨어나자마자 고자성부터 찾았다.
기절해 있는 동안 그녀는 반복적으 로 꿈을 꿨다, 고자성에게 유린당하 는 악몽을.
“그 시체처럼 얼굴이 시퍼런 놈을 찾는 거라면 걱정 마, 두 다리를 잘 라서 밖으로 쫓아내 버렸으니까.”
“왜 안 죽였어?”
자스민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고자성을 풀어 준 게 맘에 안 드는 눈치였다.
“놈한테 쉬운 죽음을 안겨 주기 싫었어.”
“그럼……?”
“놈이 우리를 따라 나오는 순간을 노릴 거야. 살아남았다고 안심하는 그 찰나에 죽음을 안겨 주는 거지.”
“역시, 진랑은 똑똑해.”
자스민이 만족한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화기애애한 두 사람과 달리 한쪽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었다.
소란의 주인공은 살라만더였다. 살라만더는 설우진이 떨구고 간단 검을 앞발러 집어 들고는 제 목을 찌르려 했다. 이에 아지르들이 양쪽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한데 힘이 어찌나 센지 아지르들의 얼굴이 시 뻘겋게 달아올랐다.
“저놈, 뭐 하는 거야?”
설우진은 황당한 표정으로 살라만 더를 바라봤다, 자신이 배를 갈라 내단을 꺼내려 했다는 사실은 까마 득히 잊고서.
“이, 이게 다 은공 탓입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투르판이 퉁 명스레 말을 뱉었다.
“내가 왜?”
“살라만더에게 죽어야 할 이유를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살라만더 는 영성을 지닌 신수입니다. 겉은 석척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그 안에는 인간 못지않은 지성이 담 겨 있습니다.”
투르판은 살라만더가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일방적으로 내 뱉는 말에 번번이 반응을 했었지. 설마, 진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
살라만더를 바라보는 설우진의 눈 빛이 달라졌다. 그리고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살라만더 쪽으로 걸어와 소도를 잡아챘다.
“너, 나랑 같이 다녀 볼 생각 없 냐?”
살라만더가 뭔 개소리냐는 눈빛으로 설우진을 쳐다봤다.
“나와 함께 넓은 세상을 누벼 보는 거야. 그리고 네놈이 한 번도 경험 해 보지 못했을 짝짓기도 질리도록 해 보고.”
순간 착각이었을까? 살라만더의 붉 은색 비늘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 습은 석척들이 구애하는 행동과 영 락없이 닮아 있었다.
“어서 서둘러라, 조선으로 가는 배 가 뜨기 전에 물건을 청도항까지 가 져가야 한다.”
달마저 구름에 가려져 칠흑같이 어 두운 밤.
열 대는 족히 되어 보이는 수레가 횃불에 의지해 관도를 지나고 있었다.
선두에서 펄럭이는 깃발에는 설가 라는 글귀가 금빛 수실로 정교하게 수놓여 있었다.
“고 총관님, 이거 너무 하는 거 아 닙니까? 본래 내주기로 한 날짜는 사흘 뒤인데 어찌 이리 갑자기 말을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급한 사정이 생겼다지 않은가! 하 루 이틀 거래하고 말 사이도 아닌데 이 정도 사정은 봐줘야지.”
상행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던 고간 이 불만을 표하는 조 행수를 달랬 다.
고간은 조 행수의 불만을 십분 이 해했다.
이번 상행은 본래 일정보다 사흘이 나 앞당겨졌다. 인삼 거래를 약속한 조선 상단 측에서 갑자기 본국에 사 정이 생겼다며 거래 일을 바꾼 것이 다.
이는 상도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 었지만 사람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설무백은 당겨진 거래 일에 맞춰서 부랴부랴 완성된 옷가지들을 보냈 다.
덕분에 날벼락을 맞은 건 상행을 마치고 쉬고 있던 행수 조천수였다. 그는 일품점이 조선의 상단들과 거 래를 트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영입 된 인재였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 로 태어났지만 맨몸으로 장사판에 뛰어들어 제 이름을 내건 상단을 낼 정도로 탁월한 상재를 자랑했다. 하지만 상계는 재능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거래처를 뚫기 위해 방방곡곡으로 뛰어다녔지만 그 의 성장을 우려한 대형 상단의 견제 로 결국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도 산했다.
하지만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 다. 다시 밑바닥부터 배운다는 각오 로 짐꾼의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이 다.
그런 와중에 일품점과 연이 닿았 다.
상단을 운영하는 중에 인연을 맺었 던 천중상단의 행수가 설무백에게 그를 추천한 것이다.
설무백은 예고 없이 조천수가 일하 는 상단을 찾아와 그가 일하는 모습 을 지켜봤다. 그리고 다음 날 그에 게 설가상단의 행수 자리를 맡겼다. 조천수는 자신에겐 너무 과한 자리 라며 극구 거부했지만 설무백의 진 심 어린 설득에 결국 행수직을 수락 했다.
이후 그를 중심으로 설가상단은 본 격적인 틀을 갖추고 상행에 나서기 시작했다. 물론 취급하는 품목은 일 품점의 옷으로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그 하나의 품목만으로도 설 가상단은 짧은 시간에 눈부신 성장 을 이뤘다. 여전히 일품점에서 만들어진 옷들은 전국 각처에서 큰 인기 를 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바다 건너 조선 땅에서까지 일품점의 옷을 찾고 있 었다.
“총관님, 이번 거래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일정이 당겨진 것 도 그렇고, 이전 거래보다 물량이 수배 이상 는 것도 그렇고.”
“자네, 또 의심병이 도진 건가?”
고간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조천수는 다 좋은데 일을 처리함에 있어 신중함이 과했다. 신용이 확실 한 거래처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새 롭게 계약서를 작성할 정도였다. 그 불만은 고스란히 총관인 그에게 쏟아졌다. 해서 고간은 몇 번이나 조천수를 지적했지만 좀체 고쳐지질 않았다.
“괜한 의심이 아닙니다. 이 계약서 를 보면 아시겠지만 조건이 너무 좋습니다.”
고간의 힐책에도 조천수는 꿋꿋이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갔다.
“조건이 좋은 게 왜 문제가 된단 말인가?”
“장사는 보다 많은 이윤을 목적으 로 합니다. 한데 이 계약서대로라면 조선 상단이 얻어 갈 수 있는 이윤 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조천수가 계약서의 한 대목을 가리 켰다.
거기에는 옷 한 필에 인삼 한 뿌 리를 내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최근의 시세만 놓고 본다면 확실히 조선 상단 쪽에 불리한 요건이었다. 이미 많은 양의 일품점 옷이 조선 으로 건너갔다. 그만큼 가격이 떨어 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에 반해 조선 인삼은 최근 들어 가격이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중원 전역에 창궐하고 있는 전염병 때문 이었다.
“흠,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 군. 조선 상단 쪽에서 인삼 수요량 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래도 누군가 야료를 부린 듯 합니다.”
“야료라니?”
“상계에선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신흥 상단을 미리 밟아 죽이는 것이죠.”
조천수의 눈빛이 사납게 번들거렸 다. 지난날의 쓰라린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고간은 조천수의 얘길 듣고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조선 상단의 의도가 의심스 럽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는 특별한 사유 없이 일방적으로 상행을 취소 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위약금은 문제가 아니다. 그보단 신용을 잃을 수 있다는 게 컸다.
“일단 거래를 조금 뒤로 미루시지요.”
“무슨 사유로 그리한단 말인가? 자 칫하다간 설가상단의 신용뿐 아니라 일품점의 신용까지 잃을 수 있네.”
“그럼 총관님은 뒤로 빠져 계십시 오.”
“그게 무슨……?”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자는 것입니 다.”
조천수의 의지는 확고했다. 고간은 그의 고집을 아는 지라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일각 여 뒤.
고간과 호병 둘이 상단 행렬에서 빠져나왔다. 목적지인 청도항을 십 리 정도 앞둔 때였다.
“크흠, 정말 위약금을 받을 수 있 는 것이오?”
갓을 쓴 중년 사내가 정면에 마주 앉은 이를 보고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청도항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조선 상인 이성철이었다.
“후훗, 그리도 걱정되는가?”
“예 단주라면 걱정이 안 되겠소? 험한 바닷길을 건너 겨우 이곳 청도 에 닿았소. 한데 이 계약서대로 거 래가 이뤄진다면 이익은커녕 잔뜩 손해만 안게 될 것이오.”
이성철은 한 달 전 평소 인연이 있던 중원의 상인으로부터 한 통의 밀서를 받았다. 큰돈을 벌게 해 줄터이니 인삼을 최대한으로 확보해 청도로 건너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앞선 상행에서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터라 유혹을 거부하기 힘들 었다.
결국 그는 자금을 최대한으로 동원 해 인삼을 사 들였다. 그 양은 오백 관을 훌쩍 넘어갔다.
한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돈을 벌 게 해 주겠다며 철석같이 약속했던 중원 상인이 뜬금없이 생소한 이름 의 상단을 소개해 주며 그곳과 계약 을 맺으라 요구했다.
약속과 다르다며 크게 반발했지만 이미 바다를 건너온 터라 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표정 좀 풀게. 놈들은 절대 약속 한 기일 내에 물건을 가져올 수 없 을 것이네.”
“설마………?”
이성철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명한의 말속에 담긴 그 의미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낸 것이다.
‘예도상단의 뒤에 호랑이가 도사리 고 있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 이거 우리도 몸을 조심해야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