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6권 – 25화 : 정세 변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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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6권 – 25화 : 정세 변화 (3)


정세 변화 (3)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옷감이 수북 하게 쌓여 있었다.

“힘드니까 내가 일하지 말라고 했 잖아. 산달이 코앞인데 이렇게 무리 하면 어떻게 해!”

청미가 옷감을 보고는 잔뜩 화가 난 어투로 청월에게 소리쳤다.

“미야, 이 정도는 괜찮아. 몸 전체 를 쓰는 것도 아니고 이 오른손만 움직이는 건데 뭘.”

“그래도 안 돼.”

“미야도, 참. 근데 손에 든 건 뭐 니?”

“아, 언니 주려고 말린 해채 잔뜩 사 왔어. 이거 먹으면 젖도 넘치게 나올 거야.”

“그거 살 돈이 어디 있어서? 설마, 너 또 책맹 유작을 팔러 나간 건 아니지?”

청월의 눈매가 위로 올라갔다. 

“헤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 에 없잖아. 그리고 책맹 유작 덕분 에 오늘 뜻하지 않은 귀인도 만났 어. 설우진이라는 오빤데 진짜 착하 고 돈도 많아.”

“오……빠?”

청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찰나에 설우진과 살라만더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미아, 설마 해채를 산 돈이 저 사내에게 나온 거니?”

“아니, 구경꾼들이 줬어.”

“구경꾼들이라니?”

청월의 언성이 높아졌다. 언니의 신경이 곤두섰다는 걸 눈치챈 청미 는 대로변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 하게 전했다.

“대체 어쩌자고 처음 본 사내의 호 의를 그리 쉽게 받아들여! 언니가 누누이 얘기했잖아, 사내들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우진 오빤 기 공자와 달라. 날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돈으로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도 않았어.”

“그게 의도된 거라면?”

“…….”

“넌 아직 어려. 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그, 그래도 난 오빠를 믿고 싶어. 세상에 기 공자 같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

‘흠,사내새끼가 한껏 제 욕심을 채우고는 여자를 버리고 도망간 모 양이군. 하여간 아랫도리 잘못 놀리 는 사내놈들은 불알을 떼 버려야 한 다니까. 괜히 엄한 사람까지 한 묶 음으로 싸잡아서 오해를 받잖아.’

설우진은 자매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기 공자란 작자를 열심히 씹어 댔다.

그 사이 대화를 끝마친 청월이 설 우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동생에게 얘긴 들었어요. 한데 왜 제 동생에게 그런 호의를 베푼 거 죠?”

“호의가 아니라 마땅한 보상을 한 것뿐이오, 내가 빚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미인지라.”

“그럼 동생한텐 아무런 흑심도 없는 건가요?”

청월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생긴 건 한없이 여리게만 보이는데 의외로 당찬 구석이 있었다.

“후훗, 아직 여물지도 않은 아이에게 욕심을 낼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 았소.”

설우진은 담백하게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청월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 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 흔들림 없는 설우진의 눈빛에서 진 심을 읽은 것이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근자에 청미를 노리는 자들이 있어 부득이하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개의치 마시오, 내게도 여동생이

있어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니.” 그녀의 사과에 설우진은 가벼운 미 소로 화답했다.

불편한 첫 대면이 훈훈하게 마무리 된 뒤 설우진은 자매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모처럼 상에 풀 대신 고기가 올라 왔다. 이에 청미는 허겁지겁 고기를 흡입했고 청월은 그 모습을 안쓰럽 게 바라봤다.

“우리 청미, 고기가 많이 먹고 싶 었나 보구나?”

“헤헤, 나 고기 귀신이잖아. 다른 반찬 없어도 고기만 있으면 밥한 그릇 뚝딱 비우고.”

“언니가 미안해, 열심히 일해서 우 리 미아 좋아하는 고기 잔뜩 사 줬 어야 했는데.”

“아니야, 언니. 마을 아주머니들이 그러는데 고기 많이 먹으면 일찍 죽는대, 뱃가죽에 기름이 끼어서.”

청미는 미안해하는 언니에게 불룩 튀어나온 배를 가리키며 그럴싸하게 말을 지어냈다.

그런데 그녀가 지어낸 말에 설우진 이 뜻밖의 사족을 덧붙였다.

“이야, 어디서 그런 고급 정보를 들은 거야? 청미, 네 말대로 고기는 자주 먹으면 위험해. 고기에서 나오 는 기름이 피가 흐르는 길을 틀어막 게 되거든.”

“그게 정말이에요?”

청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 우진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 반응이 귀여웠던지 설우진은 청미의 머리를 가볍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후훗, 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건 없어. 하루 배 터지게 먹는다고 그 런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거 든.”

“후우, 다행이다.”

설우진의 답을 듣고 나서야 청미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청미가 맛있게 고기를 먹는 동안 설우진은 청월과 자연스럽게 일상적 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까 보니까 옷감들이 제법 있던 데. 그 몸으로 삯바느질을 하는 건가요?”

“네, 몸이 무거워져서 전처럼 장사 에 나갈 수가 없거든요.”

“힘들겠네요. 주변에 도움을 청할 만한 곳은 없나요?”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땐 많았는데 지금은 한 곳도 없네요. 사람 인심 이 참으로 야박한 것 같아요.” 

청월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그녀의 가문은 청가장이었다. 청가 장은 사천에서 명망 높은 가문으로 수대에 걸쳐 관인을 배출했다.

당대에 들어 장주가 관직에 뜻이 없어 그 맥이 끊기는 했지만 그의 높은 학식을 흠모한 많은 이들이 하 루가 멀다고 청가장을 찾곤 했다. 그런데 오 년 전 사달이 벌어졌다.

외출에 나섰던 장주 부부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산적들의 피습을 받 아 비명횡사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세상에 내놓인 어린 두 딸은 어른들의 탐욕에 철저히 농락 당했다. 부모를 대신해 돌봐 주겠다 고 나섰던 친척들은 청가장의 재산 을 야금야금 빼앗았고 아버지를 흠 모한다던 학사들은 노골적으로 그녀 들의 몸을 탐했다.

이에 청월은 어머니가 남몰래 숨겨 둔 패물을 가지고 어린 동생과 함께 마을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거참, 빌어먹을 인생이네. 게다가 저 배 속의 아이도 정상적인 관계로 얻은 것 같지 않고…………..’

청월의 얘기를 다 듣고 난 후 설 우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배 로 향했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청월이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이곳에 정착하면서 도움을 준 이 가 있었어요. 처음엔 그의 호의를 완강하게 거부했었어요. 그도 제 몸 을 노리고 있다 생각했거든요. 그런 데 그 사람은 매번 거절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찾아왔어요.”

“진심이었다는 건가요?”

“전 그렇게 믿었어요. 한데 몸을 허락한 순간 그 믿음은 송두리째 무 너져 내렸어요. 그는 자존심이 상했 었던 거예요, 저처럼 하찮은 계집이 자신이 내민 손을 거부한다는 게.” 

“개자식이네요.”

설우진은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한데 그녀는 그 말에 선뜻 동의하 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직 그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 군. 하기야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한 다면 냉정하게 떨치기 힘들 테지.’ 설우진은 그녀의 속내를 쉬이 짐작 해 냈다. 그래서 오히려 냉정하게 물었다.

“혼자서 아이를 낳아서 키울 거 요?”

“제 배 속에서 열 달을 품은 아이예요.”

“어린 동생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아이가 제대 로 클 수 있겠소?”

“그, 그건…….”

“아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그 아비의 돈이라도 챙기시오, 그깟 자 존심 때문에 여인을 헌신짝처럼 내 버린 걸 보면 분명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가 분명할 테니.”

설우진은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 다.

그는 직접적으로 나서서 여인에게 지아비를 찾아 줄 마음은 없었다. 자신이 찾아 준다 한들 정상적인 관 계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 다.

한데 청월은 끝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더라도 그 사람의 도움은 받 지 않을 거예요.”

“뭐, 당사자의 뜻이 그렇다면 나도 더는 그 일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않 겠소.”

설우진은 그녀의 뜻을 존중해 주기 로 했다.

그렇게 사천에서의 첫 날 밤이 훌쩍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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